119화. Episode. 38 자이언트 슬레이어 (4)
비명과 고함이 끊이지 않았다.
앨런의 눈에 비친 것은 온통 죽어 가는 이들뿐이었다.
손으로는 창칼을 쥐고, 입으로는 포효를 내뱉었으나.
흉악한 거인 앞에선 한낱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커헉-!”
앨런이 피를 토했다.
역병이 그의 몸을 좀먹었다.
신앙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칼고스의 역병은 악랄하고 지독스러웠다.
“앨런 도련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부관이 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은 퇴각한 뒤에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법사들이 지켜야 할 땅은 이곳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정예 마법사들이 앨런을 바라보았다.
진즉에 전의를 잃은 시선들이었다.
“……저 거인을 이곳에서 막지 못하면 남대륙 또한 역병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희도 알고 있을 텐데?”
앨런의 표정에 서릿발이 내려앉았다.
감히 마르크스의 문장을 매달고 퇴각을 논하다니.
겁을 집어먹은 마법사들을 보자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앨런은 고개를 돌렸다.
북대륙의 병력은 사력을 다해 거인을 막아서고 있었다.
칼고스의 검에 쓸려 나갈지언정, 한낱 병사에 불과한 이들조차 도망치지 않았다.
“……정말 일개 병사만도 못한 건가.”
사명도, 신념도 없는 마법사들.
앨런이 탄식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마법이 발현되었다.
한쪽 손에서 뿜어진 신앙의 빛은 병사와 기사들의 기운을 북돋았다.
‘놈이 있었다면…….’
분전을 거듭하는 그의 머릿속엔 자꾸 북쪽의 성자가 떠올랐다.
만약에 그가 살아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쓸데없는 망상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가 없었다.
앨런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두근.
돌연 심장이 크게 뛰었다.
리하르트로부터 전해 받은 빛이 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마기와 역병의 기운이 진득하게 끼인 하늘.
까맣던 그것이 점점 밝게 개여 갔다.
“호르……?”
악착같이 검을 휘두르던 누군가가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전장의 모두가 싸움을 멈추곤,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두근- 두근-
심장을 두드리는 거룩한 기운.
그들은 직감했다.
“아빠……!”
복수를 천명하던 세계수가 환희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
칼고스는 하늘을 움켜쥘 듯 팔을 뻗었다.
역병의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붉고 더러운 손끝이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빛이 터져 나왔다.
◈ ◈ ◈
조금씩 감각이 돌아온다.
없던 몸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리하르트는 감았던 눈을 떴다.
하늘을 감싼 빛, 그 안에 그가 ‘실존’하고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입고.
『아버지!』
거인의 괴성이 들렸다.
뒤이어 거대한 손이 빛을 헤집으며 다가왔다.
아비를 붙잡아, 저 아래로 끄집어 내리고자 하는 패륜아의 손짓이었다.
[네 자루의 검성 ? 발동.]
한 자루의 별이 엮어졌다.
곧 그 별이 두 자루, 세 자루, 네 자루로 늘어났다.
콰가각-!
별에 가로막힌 놈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우악스럽게 치고 올라가려던 흉수(兇手)는 결국 신성에 닿지 못했다.
“안 그래도.”
거룩한 음성이 하늘을 울렸다.
칼고스의 귀에서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려가려 했다. 네놈을 족쳐야 하니까.”
하얗게 물든 하늘에서 인형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크, 크아악-!』
칼고스가 하나 남은 눈을 부여잡았다.
피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며, 마찬가지로 연기가 피었다.
“아…….”
모리츠가 입을 벌렸다.
리오 성의 모든 병력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호르시여.
부디 그를 살려 주십시오-
이제,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 이루어졌다.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던 리하르트가 이내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런 그의 모습은 너무나 성스러웠다.
상상 속 천사가 이러할까.
신의 모습이 이러할까.
역병에 더럽혀진 모두가, 신화의 한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확- 일어난 빛이 땅을 덮었다.
숱하게 뿌려진 피와 마기에 불모지가 된 대지에 돌연 풀과 꽃이 자라났다.
빛이 다시 한번 하늘을 쓸었다.
끈질기게 꿈틀거리던 먹구름이 개이고, 마기가 저만치 뒤로 물러났다.
태양이 홀로 뜬 채로 성자를 비추었다.
“후우…….”
성자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마저도 아찔하고 아름다워,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듯했다.
지금까지의 리하르트 바텐베르크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외양은 같았으나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호르’라는 성부로부터 ‘이지훈’이라는 성령을 통해 태어난 성자 ‘리하르트’.
신화를 목격한 아델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리, 리하르트!”
반쯤 무너져 내렸던 모리츠가 힘겹게 일어섰다.
그렇지만 떨리는 발걸음은 쉬이 옮기지 못했다.
감히 그에게 다가가도 될까, 라는 이유 모를 위압감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리하르트의 시선이 모리츠를 향했다가 떨어졌다.
신비한 빛을 품은 눈동자가 전장의 모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 ◈ ◈
나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육체와 그 위에 일렁거리는 빛의 경계가 희미했다.
이는 곧 육체와 빛이 같은 본질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템플나이츠.”
작게 읊조렸다.
그러자 진정 템플나이츠를 포함한 리오 성의 병력이 나를 보았다.
“전원 전투 준비.”
그 한마디에 모두가 내 뒤편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힘을 끌어올렸다.
빛으로 이루어진 이 몸 위에, 호르의 신격을 과감히 드러냈다.
파아앗-!
거룩한 아지랑이가 온 전장을 휩쓸었다.
내 뒤편에 늘어선 이들의 몸에서 들불 같은 빛이 번졌다.
『템플나이츠……!』
『가증스러운 벌레들!』
칼고스가 악을 썼다.
그런 와중에도 한 손으로는 눈을 부여잡은 채였다.
이단 중의 이단.
타락한 왕의 타락한 군단장.
“안타깝구나.”
나는 놈이 불쌍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호르’로서 느끼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존재가 이곳에 있는데.”
네 자루의 별이 날을 세웠다.
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그 끝은 놈을 향해 있었다.
“너는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조차 할 수 없구나.”
놈이 괴성을 질렀다.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원망과 증오, 그리고 한 줌의 애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쿵……!
쿠웅……!
그 거대한 육신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역병의 검을 쥔 팔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앨런.”
신격이 담긴 음성이 저 멀리 퍼졌다.
과연 남쪽의 성자는 내 뜻을 잘 알아주었다.
콰아앙-!
칼고스의 몸을 집어삼킨 백염.
여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과 크기의 불꽃이 폭발했다.
신격으로부터 힘을 나눠 받은 건 템플나이츠 뿐만이 아니었으니.
콰앙, 콰아앙-!
한차례 전의를 잃었던 마법사들이 이를 악물고 마법을 쏘아 댔다.
강맹하던 거인의 육신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다 죽어 가던 쓰레기들이-!』
이성을 잃은 칼고스가 몸을 돌렸다.
멀리서 폭격이나 해 대는 마법사들부터 처리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멍청하게도.
놈은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기사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상식을 잊은 모양이었다.
콰드득-
아델과 마르의 나무가 서로 얽히며 칼고스를 옭아맸다.
난동을 부리는 거인의 몸짓에도, 세계수의 줄기는 꺾이지 않았다.
“가자.”
템플나이츠가 성가를 불렀다.
함성 같은 노래를 부르짖으며 진군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네 자루의 검을 하나로 엮어 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별이 완성되었다.
◈ ◈ ◈
별과 거검이 서로 검격을 주고받았다.
성스러운 기운과 더러운 기운이 수십 번이고 맞부딪쳤다.
칼고스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등과 다리를 피투성이로 만든 템플나이츠도.
적재적소에 폭격을 가하는 마법사들도.
전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분명 그랬을진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
『당신은 몰락했습니다.』
『세상을 밝히던 신성은 고작 한 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이런 빛을 피울 수 있는 겁니까!』
자신이 죽였던 아버지가 다시 살아났다.
부활한 뒤에도 그 보잘것없는 신성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찮은 육신 안에 숨어 있던 신격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것.
그 차이가 칼고스로 하여금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저는 영락한 당신조차 넘을 수 없단 말입니까!』
울분이 터졌다.
타락한 군단장은 거검을 휘둘렀다.
꽈앙, 교차된 빛과 어둠 너머로 증오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화끈거렸다.
“보잘것없는 신성은 널 양분으로 삼아 상승할 거고.”
그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거룩한 음성에 귀에서 피가 흘렀다.
“제발 아버지라고 좀 부르지 마. 기분 엿 같으니까.”
하나 남은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피눈물은 아니었다.
“너같이 변절해 버릴 새끼들은 애초에 만드는 게 아니었는데.”
참으로 모진 말이었다.
칼고스에겐 빛보다도 뜨겁고 날카로운 말이었다.
콰아앙-
지크와 모리츠의 혼신의 일격이 거인의 왼쪽 무릎을 크게 베어 냈다.
앨런과 마법 연합의 공격이 거인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휘청이다 이내 무릎을 꿇은 칼고스는 자신을 둘러싼 템플나이츠를 둘러보았다.
성마대전 당시의 템플나이츠와 비교하면 아직은 부족하기만 한 인간들.
이 자리에 아버지만 없었다면 아무런 맥도 추리지 못했을 벌레들.
하지만 그들의 곁에는 아버지가 쭉 함께할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들과는 다르게.
『흐.』
칼고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리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키이잉-
하나로 모인 네 자루의 별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내 별이 칼고스의 검보다도 더욱 커졌다.
『…….』
마침내 전의가 꺾인 걸까.
그는 검을 내려놓은 채, 서서히 두 손을 그러모았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신도처럼.
◈ ◈ ◈
별이 떨어졌다.
그 궤적에 걸린 거인의 머리도 함께 떨어졌다.
쿠웅-
칼고스의 머리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을 굴렀다.
혀를 잔뜩 빼물곤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은 그것은 참람함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오 성의 병력도, 마법 연합도 침만 꿀꺽 삼켜 댔다.
당장에라도 거인이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불안함도 잠시였다.
“역병 전쟁은 끝났다.”
리하르트의 음성이 그들의 귀에 틀어박혔다.
“우리가 승리했다.”
곧, 전쟁의 끝을 알리는 빛이 리하르트로부터 터져 나왔다.
[역병 군단장을 처치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 달성 2/2]
[신격이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