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Episode. 38 자이언트 슬레이어 (2)
툭, 투두둑-
거인의 거친 살가죽을 타고 흐른 피눈물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땅을 적시다 못해 흐르기 시작한 그 눈물은 흡사 작은 강을 연상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이윽고, 땅을 흠뻑 적신 피의 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1열은 방진을 갖춰라!”
“시위 걸어!”
그 모습에 불길한 예감을 느낀 사내들이 긴장을 굳혔다.
그리고.
푸확-
“키에에에엑-!”
수천의 괴물이 동시에 튀어 올라 순식간에 칼고스의 앞을 가득 메웠다.
군단장의 권속도 뭣도 아닌, 그저 칼고스의 핏속에서 탄생한 병균이었다.
하지만 바렌의 병력과 마법연합은 놈들의 악독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끔찍한 광경에 놀랄 틈도 없었다.
지휘관이 바로 악을 쓰듯 외쳤다.
“쏴라-!”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화살을 쏘아냈다.
수백의 화살이 기다란 빛줄기를 매달고 날았다.
화약을 머금은 대포가 빛을 뿜어내고, 엘프가 마법진을 그려 냈다.
칼고스의 뒤편에 위치한 마법 연합도 역병 괴물들을 폭격했다.
『정녕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전력입니까.』
『이제는 그때 그 시절의 위용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군요.』
칼고스의 중얼거림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놈은 자신의 주변을 헤집는 빛들을 바라보았다.
화살도, 포탄도, 고절한 마법도.
하찮은 벌레들의 발악을 내려다보듯 무심한 시선이었다.
그러다 이내, 역병 괴물들이 양쪽의 나무줄기를 향해 움직였다.
연신 쏟아져 내리는 폭격 속에도 놈들은 우악스럽게 덤벼들었다.
“방패 들어!”
“결계를 강화하라!”
한쪽에선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반대쪽에선 마법사들이 요새를 견고히 다졌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
전쟁의 양상을 살펴보던 지크가 나무를 타고 올랐다.
그 끝엔 리하르트가 오롯이 서 있었다.
지크를 시작으로 모리츠와 아론, 기드가 속속 모여들었다.
칼고스를 처치하기 위해 엄선된 정예들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나같이 의문이 짙게 섞인 눈빛.
참다못한 지크가 넌지시 물었다.
“리하르트. 너 저 괴물이랑 대체 무슨 사이냐? 아버지라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리하르트는 별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붉은 거인을 놓치지 않았다.
거인 또한 반달같이 휘어진 눈으로 리하르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크의 표정이 더욱 오묘한 빛을 품을 때였다.
콰과광-!
칼고스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그것은, 마법 연합 측의 공격이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거인의 모습을 가렸다.
“성자님! 역병 괴물들을 처리하고 금방 합류하겠습니다!”
그때, 괴물을 막아 내던 오르드 성주가 리하르트를 향해 외쳤다.
“우리도 얼른 시작하자.”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곤 별 위에 올라탔다.
지크 또한 와이번을 불러 출전 태세를 갖췄다.
◈ ◈ ◈
“쯧.”
나무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앨런이 혀를 찼다.
그의 주변에 늘어선 마르크스의 마법사들도 경악 어린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흙먼지가 걷히고 나타난 칼고스.
정예 중의 정예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쏟아부은 마법이었건만, 칼고스의 몸엔 이렇다 할 피해가 없었다.
아니, 하다 못해 시선조차 끌지 못했다.
놈은 저를 공격한 마법사들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아버지-!』
별을 타고 날아드는 리하르트만을 반길 뿐이었다.
그 작태가 앨런의 심기를 더욱 거슬리게 만들었다.
한껏 미간을 찌푸린 앨런이 지팡이를 치켜세웠다.
이번에는 리하르트를 향해서.
키이잉-
녹색의 마법진 다섯 개가 리하르트 주위를 에워쌌다.
하나하나가 전부 상급의 버프 마법이었다.
“도련님! 저들은 바텐베르크의……!”
“지금은 이단을 처단하는 것이 급선무다.”
단호한 앨런의 음성에 마법사들이 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거칠게 휘둘러진 지팡이가 녹색 마법진을 엮어 냈다.
그들 또한 깨달은 것이다.
저 붉은 거인의 마법 저항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놈에게 유효타를 먹이기 위해선 기사들이 놈의 체력을 뺄 필요가 있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이곳에서 죄다 죽을지도 몰랐으니, 자존심 따위는 접어 둬야 했다.
그사이 리하르트가 칼고스의 지척까지 이르렀다.
아론과 기드, 지크 또한 와이번의 등에서 내려왔다.
“나도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칼고스.”
리하르트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
붉고 거대한 손이 덮쳐 왔다.
하나 벌레를 잡아 쥐려고 하는 아이처럼, 그 손길엔 티끌만 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땅을 박차 자리에서 벗어났다.
리하르트는 칼고스의 손을 스치듯 지나며 백귀를 그었다.
카각-
신앙으로 만들어 낸 오러가 거친 살갗에 실선 하나를 그려 냈다.
동시에 별 두 자루가 칼고스의 눈을 향해 쏘아졌다.
“아론, 기드!”
리하르트의 호령에 고개를 끄덕인 두 창기사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땅을 짚은 칼고스의 왼손을 타고, 팔을 타고.
역병 군단장 위를 질주하는 두 창기사의 몸에선 호르의 빛이 타올랐다.
『같잖은!』
오른팔로 별을 막아 낸 칼고스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무언가가 눈앞으로 뚝 떨어졌다.
지금껏 와이번을 타고 기회를 노리던 모리츠였다.
“방심하면 안 되지.”
모리츠가 신앙이 가득 담긴 단검으로 놈의 눈을 파헤쳤다.
『끄아…….』
거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일부러 빛을 밝히며 시선을 끌던 창기사들이 물러났다.
모리츠 또한 리하르트의 별을 딛고 태세를 정비했다.
콰과광-!
때마침 최상급 마법이 놈의 몸을 뒤흔들었다.
거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피를 줄기줄기 내뿜는 눈.
놈은 제 눈가를 짚은 채로 목울대를 꿀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다.’
리하르트가 백귀와 드래곤 투스를 꽉 그러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고스는 고작 눈 하나 잃은 것으로 전의를 잃을 상대가 아니다.
놈은 지독한 광전사다.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광폭해지고 독해지는.
타락한 왕의 타락한 군단장.
『끄흐!』
예상대로, 칼고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만개한 미소와는 반대로, 거대한 몸에서는 살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재밌군!』
푸욱-
놈은 빛을 잃은 자신의 눈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꾸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눈알이 뽑혀져 나왔다.
제 앞에 놓인 눈알을 바라본 칼고스가 손에 힘을 줬다.
『재밌어!』
콰직!
아직 신경줄이 붙어 있던 눈알이 처참히 뭉개졌다.
“……진짜 역겨운 놈이군.”
그 모습을 본 지크가 질린 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눈을 짓뭉갠 칼고스의 오른손에서 불길한 기운이 솟구쳤다.
이내 유형화된 그것은 검의 형상을 이뤄 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긴장 풀지…….”
리하르트가 미처 경고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이었다.
역병의 피로 이루어진 거검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리하르트와 지크가 몸을 굴러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큭, 이게 무슨…….”
놀랄 새도 없었다.
피해 낸 자리, 쩍 갈라진 땅에서 거대한 역병 괴물이 꿈틀거리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가겠어.”
지크가 핼쑥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검을 타고 고절한 오러가 피어올랐다.
리하르트 또한 백귀와 드래곤 투스에 신앙의 오러를 재차 엮었다.
콰앙!
다시 휘둘러진 역병의 검을 향해 두 형제가 검기를 쏘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거인의 검격을 수십 번이나 받아 내는 것은 무척이나 고됐다.
흥이 잔뜩 오른 거인의 광소가 하늘을 울리고, 거검과 검기의 충돌이 전장을 울렸다.
역병의 검에서 떨어져 나온 괴물들도 괴성을 질러 댔다.
“아론, 기드! 너희는 괴물들을 처리해!”
악에 받친 리하르트의 고함에 두 창기사가 신형을 날렸다.
『고작 이걸로 지치신 겁니까!』
『이 불효자를 더욱 즐겁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참전하신 전장일진대 어찌 예전만 못합니까!』
한참 광소를 터트리던 칼고스가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하늘을 찌를 듯 추켜올려진 검이 곧, 우악스럽게 떨어졌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거검은 폭풍마저 일으킬 듯했다.
“리하르트! 이건 내가 막겠다!”
지크가 리하르트를 온몸으로 밀어 내곤, 모든 힘을 담아 검격을 내질렀다.
꽈아앙-
그야말로 경천동지.
단 한 순간, 전장의 소음이 하나의 굉음에 잡아먹혔다.
“컥……!”
카드득, 거인의 검을 막아선 지크의 팔이 사정없이 떨렸다.
명장이 벼려 낸 명검에 금이 쩍쩍 갈라져 버렸다.
◈ ◈ ◈
‘젠장! 형님……!’
모리츠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에 비친 지크의 상태는 무척 처참했다.
귀와 눈, 코, 입에서 새빨간 핏물이 쏟아졌다.
눈동자 역시 초점이 흐려진 듯했다.
평소 정광 넘치던 지크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모리츠의 속에서 천불이 솟구쳤다.
그와 반대로 그의 기세는 더욱 가라앉았다.
‘은신…… 은신을 유지해야 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불결한 살갗을 기어올랐다.
‘하나 남은 네 눈깔도 후벼파 주마.’
부릅뜬 모리츠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 독기는, 온몸이 역병으로 거멓게 물들었음에도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죽어가는 몸으로 칼고스의 육신을 기어오를 때였다.
수십 개의 마법이 칼고스를 두드렸다.
모리츠에게 영향이 끼치지 않을 방향으로.
동시에 모리츠의 몸에선 활력이 맴돌았다.
이리도 완벽하게 합을 맞출 수 있는 마법사 집단은 하나뿐이었다.
‘흥. 제법 센스는 있군.’
삐뚜름하게 입매를 비틀어 올린 그가 다시 움직였다.
쉴 새 없이 불끈거리는 칼고스의 육신.
그 더러운 몸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어깨에 도달했을 때.
『흐…….』
『쥐새끼 자식.』
기다렸다는 듯, 칼고스가 그를 잡아챘다.
“어?”
눈앞에 들이밀어진, 붉게 번들거리는 눈알.
모리츠는 의문을 느낄 틈조차도 없었다.
칼고스가 과자를 집어먹는 것처럼, 그를 한입에 털어넣었으니.
허공을 나는 것도 잠시, 짓쳐 드는 송곳니를 보는 모리츠의 눈앞으로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리하르트의 주먹에 코가 깨졌을 때.
호르의 빛으로 심마를 벗어 던졌을 때.
리오 성에서 동료들과 울고 웃을 때.
“호르시여…….”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그래. 호르께서 널 살리실 거다.”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카드득!
익숙한 검이 거인의 이빨을 힘겹게 막아 냈다.
“우리 첫 번째 성기사가 왜 이런 데서 죽으려 해.”
모리츠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리하르트……? 왜 네가…….”
왜 여기 있어?
리하르트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한쪽 팔로는 거인의 이빨을 막아서고, 한쪽 팔로는 모리츠의 몸을 별 위에 실었다.
그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는 듯, 한쪽 무릎이 서서히 굽혀지기 시작했다.
“너, 뭐 하는 거야?!”
“…….”
“야, 리하르트!”
“미안.”
거인의 입에서 별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빨과 이빨이 맞물렸다.
꽈직!
악물린 잇새로 새빨간 핏물이 흘렀다.
성스러운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