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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16화 (116/216)

116화. Episode. 38 자이언트 슬레이어 (1)

스윽-

한참 머뭇거리던 앨런의 손이 곧, 제 앞에 내밀어진 손 위에 포개어졌다.

리오 성의 경우에 빗대어 보면 신앙심이 커질수록, ‘리하르트’의 육신을 뒤집어 쓴 그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건 남쪽의 성자인 앨런도 피할 수 없었다.

말끝마다 붙이던 잡것이란 표현도 쉬이 내뱉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제 스스로가 무척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아- 호르시여.”

리하르트는 앨런의 양 손을 맞잡고는 읊조렸다.

앨런 또한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산스러워진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시선들이 두 성자를 향했다.

“오늘에서야 마주한 두 형제가 당신께 간곡한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하르트가 주도적으로 기도를 이어 나가려 할때였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불경한 존재를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부디 이 앨런을 지켜봐 주시옵소서.”

앨런이 선수를 쳤다.

그렇게 싫은 티를 낼 때는 언제고, 막상 기도를 시작하고 나니 무척 진지하고 간곡한 태도였다.

“…….”

리하르트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마저 기도를 이었다.

“당신의 빛을 가슴 속에 품은 자들이 악과 대적하고자 합니다. 부디 우리 두 성자와 신도, 신자들을 굽어살펴 주시고.”

그 뒤는 또다시 앨런의 몫이었다.

“이 세상 모든 이단의 목을 잘라 당신을 욕보인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

기도의 온도차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리하르트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야 했다.

“사명을 잃지 않은 자들과, 아직은 무지한 자들에게도 은혜를 내려 주십사 기도를 올립니다. 호-르.”

“……호-르.”

어쩐지 유난히 힘겨웠던 기도가 끝났다.

그 직후, 두 성자가 맞잡은 두 손에서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리하르트가 괜히 손을 잡자고 한 것이 아니었으니, 이 모든 건 사실 앨런과 마법사들을 위한 일이었다.

“헉!”

두 성자를 집어삼킨 빛이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뒤편에 늘어선 마법사들을 휩쓸었다.

신앙을 쬔 그들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호르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그 빛이 함께하는 한 너희는 이깟 역병에 쓰러지지 않을 테지.”

맞잡았던 손을 놓은 리하르트가 말했다.

“…….”

남쪽의 성자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몸에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빛이 휘감겨 있었다.

이 어둡고 추운 곳을 밝힐 등불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녹색 머리칼의 소년, 마르가르텐과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 수많은 뜻이 오갔다.

“아론, 기드. 돌아가지.”

“충!”

창기사 둘을 대동한 리하르트가 발걸음을 돌렸다.

“이봐. 북쪽의 성자.”

그때, 뒤편에서부터 앨런의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저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성자인 척 하지 마라. 멍청한 기사 놈아.”

자존심에 상처가 났을 때.

그리고.

“만약 기사들 중에 내 발목을 붙잡는 놈이 있다면 모조리 화형시켜 주겠다. 감히 성자를 방해하는 놈은 이단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인정하기 싫은 상대를 인정해야만 할 때.

앨런은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치켜 뜬 눈엔 끝 모를 질투가 담겨 있었다.

“호르 님의 총애를 받는 것은 나다. 그 빛 또한 나의 것이다. 네놈은 그동안 나의 빈자리를 대신해 왔을 뿐이다.”

그는 리하르트를 질투했다.

저와 같은 성자에게 경외심을 느끼고 말았으니.

‘호르’를 향한 신앙심이 ‘리하르트’를 향할때는 질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 말에, 리하르트는 빙긋 웃어 보이곤 다시 뒤돌아섰다.

“어디 한 번 열심히 해 봐. 호르께선 유능한 자를 좋아하시니까.”

◈          ◈          ◈

얼을 빼놓고 있던 마법 연합은 나를 붙잡지도, 기습을 가하지도 않았다. 앨런의 독단에 억지로 끌려왔다더니, 그래도 제법 상황 파악 정돈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법 연합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때, 아론이 나직하게 물었다.

“남쪽의 성자라니. 저자는 분명 마르크스의…….”

“그래. 마르크스의 막내지. 그리고 호르로부터 성자의 칭호를 받은 자이기도 하다.”

“맙소사…… 어찌…….”

아론과 기드가 끙끙 앓았다.

하기야,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남쪽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았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성자님!”

이내 병력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니, 지휘관들이 부리나케 모여들었다.

조금 전의 빛을 보아서일까.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왔느냐고 쪼아 댔다.

나는 손을 들어 역병 성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마법연합이 자릴 잡았습니다.”

“마, 마법연합이 이 근방에 있단 말씀이십니까?”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 또한 좋든 싫든 이번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마법 연합이 참전하도록 채찍질을 가한 것은 앨런이다.

하나 그들이 무작정 앨런을 따라 온 건 아니다.

다만 마법사들도 나름대로 계산을 내리긴 했을 터다.

가령, 상황이 더욱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역병을 종결시키고 모든 피해 보상을 바렌으로부터 뜯어낼 심산이라던가.

어쩌면 합당한 전쟁의 명분을 원할지도 모른다.

하나 지금은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우선 이 싸움을 끝낼 준비나 합시다.”

◈          ◈          ◈

흉측한 살덩어리.

불길한 기운을 줄줄이 뿜어내는 역병의 근원 양 옆으로 거대한 나무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한쪽은 아델의 것이었고, 반대쪽은 마르의 것이었다.

“옛 생각이 나는구먼.”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무슨 옛 생각이야.”

아델의 나무줄기에 올라탄 기사들이 애써 호탕한 척 떠들었다.

연합의 기사들은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뒤를 따라 나머지 병력이 전투 물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화살과 성수를 비롯한 갖가지 물자들이 굵은 뿌리 위에서 밝게 빛났다.

어렵게 끌고온 대포까지 설치를 하고 나니 그야말로 천혜의 성벽이 만들어졌다.

“예전보다 훨씬 낫네.”

리하르트가 코 밑을 훔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그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춥고 어둡다.

까맣게 때 묻은 하늘은 한겨울의 그것보다도 더욱 무심했다.

“안되지. 우리 용사님들이 싸울 자린데.”

그래서 리하르트가 직접 하늘을 열어 주기로 했다.

사아아-

빛 한 줄기가 눅눅한 땅을 내리쬐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다가왔다.

“호, 호르!”

“호르께서 우리들을 굽어살피고 계신다!”

나무 성벽에 올라탄 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아발트를 포함한 헬가의 기사들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연합의 사내들과 왕실 병력이 뒤따라 목청을 드높였다.

“…….”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병사들의 눈빛에 불이 확 솟구쳤다.

그들의 손등에 새겨진 가호가 욱신거린 것도 동시였다.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이제는 동이 터 오를 차례이리라!”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한 군기.

파도처럼 요동치는 기세가 마치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호르의 빛이나 세계수의 가호만으로 일구어진 광경이 아니었다.

바렌의 사내들에겐 이 땅 자체가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나라의 파수꾼이었다.

언데드와 역병에 유린당한 바렌, 그 아래 절망과 비탄에 빠졌던 백성들.

그들은 리오 성에서 지내는 동안, 숭고한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복수의 칼을 벼렸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그 칼을 휘두를 차례가 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오르드 성주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바렌은 더욱 단단해지겠지요.”

“……예.”

“절반이 깎이고 갈려 나갔을지언정, 저희는 우직하게 웅크려 기반을 쌓아 왔습니다. 성자님이 일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리하르트는 흐뭇하게 웃는 것으로 답했다.

몰락을 면치 못할 왕국이라던 바렌은 이제 없었다.

프로트 왕국은 다시금 약조를 떠올리게 될 것이고, 숙적이었던 마법사들은 지금 이자리에서 동일한 적을 앞두고 있는 중이었다.

키잉-

마르의 뿌리가 솟구친 방향에서 갖가지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이내 희미하게 변했다.

“마법사들은 역시나 요새를 준비하나 봅니다.”

“저들의 별명이 ‘준비하는 자’이지 않습니까. 골방에 틀어박힌 자들을 낮잡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어서 오르드 성주는 마법사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덧붙였다. 전투 중에 이쪽을 공격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말까지 꺼냈다.

“물론 저들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나, 애당초 협력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눈앞의 적을 헷갈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남쪽의 성자는 호르의 신도를 겁박하지 않으니까요. 기사와 마법사라는 구분은 호르 앞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          ◈          ◈

기사와 병사들이 날을 벼리고, 마법사들이 요새를 준비했다.

그렇게 삼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으으-

기이한 울음이 역병의 성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마침내 완전한 거인의 모습이 된, 추악한 살덩어리.

꾹 감겨 있던 두 눈이 서서히 뜨이기 시작했다.

『아아…….』

붉은 역병 거인.

칼고스의 음성이 지천을 울렸다.

“전투 준비!”

거인을 둘러싼 공기가 요동쳤다.

바렌의 사내들이 나무 성벽에 붙어 기세를 드높였고,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칼고스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아버지!』

다른 인간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붉은 얼굴이 사방을 훑었다.

사방에서 풍기는 신앙이 칼고스를 더욱 폭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나무의 가장 윗부분, 거기에 오롯이 별을 쥐고 선 인간.

『…….』

붉은 거인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한데 두 눈에선 시뻘건 피눈물이 흘렀다.

“씹어 죽일 놈이. 아버지는 무슨.”

리하르트가 서서히 별을 들어올렸다.

“어차피 튀어나올 거. 무슨 뜸을 이렇게 들여?”

그 신경질적인 음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삼 일이나 늦게 나타난 칼고스를 책망하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칼끝도 안 박힐 정도로 딱딱하던데, 뭐, 지금은 아니겠지. 아주 잘됐어.”

별에서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고작…….』

『고작, 그런 나약한 빛밖에 피우지 못하시는 겁니까.』

칼고스가 리하르트를 어루만지기라도 하듯 손을 쓸어내렸다.

닿지 않는 그 손길엔, 너무도 보잘 것 없어진 아버지를 향한 안타까움과 황홀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 그래서 널 죽이고 내 양분으로 삼을 셈이다.”

반대로 칼고스를 향한 리하르트의 기세는 살기가 등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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