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Episode. 37 북쪽과 남쪽 (3)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한없이 자애로운 빛무리가 앨런의 볼을 간질였다.
그것은 마치 변절자들을 즉결 심판한 앨런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만 같았다.
“아!”
앨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만족감이 온몸을 내달렸다.
자신이 마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도 더한 쾌감이었다.
“…….”
앨런의 환희 가득찬 눈에 설핏 광기가 감돌았다.
‘더 많은 변절자들을 찾아 모조리 화형시킨다면…… 호르께서 기뻐해 주실까?’
‘감히 당신을 믿지 않는 불경한 놈들을 죄다 불태워 버리면 좋아해 주실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지팡이를 둘러싼 빛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조금 전까지의 자애로움은 사라지고, 지엄하고 거룩한 신격만이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 또 다른 사명을 부여하노니.』
『잘못된 것을 섬기는 자들에게 마땅한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고.』
『끝끝내 죄악을 저지른 악인들에겐 나의 노여움을 알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앨런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더욱 낮추는 것으로 예를 다할 뿐이었다.
『남쪽의 성자여.』
『나의 이단심판관이여.』
『역병의 근원에서 이단 중의 이단이 태동하고 있노라.』
『그를 막지 못하면 온 세상이 이단과 역병으로 들끓을 터이니.』
『너는 북쪽의 성자와 함께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신격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머물렀던 지팡이에선 상서로운 빛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이단심판관……!”
앨런은 제 지팡이를 그러쥔 채, 몇 번이고 계시를 곱씹었다.
황홀한 듯, 희열에 찬 듯.
“내 본연의 임무, 사명…… 그것은 이단을 심판하는 것.”
그는 전의를 불태웠다.
이단 중의 이단이 태동하고 있다셨다.
호르께서 굽어 살피실 세상에서 감히.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화형시켜 주마.”
◈ ◈ ◈
“후…….”
나는 계시의 격통을 억눌렀다.
그 와중에 귓가로 미치광이 성자의 독백이 반복되었다.
이 세상을 백지로 만들겠단다.
나 참.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하긴. 그래서 기어코 바텐베르크를 몰락시켰지.”
놈이 바라는 건 나와 다르지 않았다.
세계 평화.
다만 그 평화가 피로 범벅된 것인지, 화합을 통해 일구어지는 것인지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다 알면서도 그를 성자로 만들었다.
또, 이제는 이단심판관이라는 감투까지 씌워 주었다.
‘차라리 목줄을 채우는 게 낫다.’
이단심판관.
내가 놈에게 부여한 자격은 이단을 처벌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여지는 주지 않았다.
세상 모든 분란의 씨앗을 없애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포부에 제동을 걸기엔 충분할 것이다.
물론 본인은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마르를 통해 전달하면 될 거고…….’
나는 애써 머릿속에서 앨런을 지우고 화제를 돌렸다.
앨런에게 말했던 ‘이단 중의 이단’.
붉은 역병 거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데드 전쟁 당시에 모습을 드러낸 칼고스.
“……빌어 처먹을 아버지라 했었지.”
놈은 분명 내게 아버지라 외쳤다. 그 괴성에 가까운 울부짖음은 몹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애당초 자식이란 생각조차 들지 않지만, 놈이 나를 아버지라 부른다면, 나 또한 이렇게 부를 것이다.
천하의 씹어 죽일 패륜아라고.
◈ ◈ ◈
시간이 흘러 리오 성의 출정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빠!”
정신체를 구현한 아델이 내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그래, 그래.”
워낙 오랜만인 터라, 그런 아델을 밀어내지 않고 꼭 안아 주었다.
그런 내 왼쪽 손등엔 나뭇잎 형태의 문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성 곳곳에서 바삐 움직이는 병력들 모두 그러했다.
“정원 내에서 만큼은 아니어도, 어머니의 정신체와 함께라면 파수꾼의 가호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줄곧 이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타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간 어머니의 기력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게 전부 호르께서 빛을 나누어 주신 덕이지요.”
그 말에 새삼 아델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기력이 회복되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지, 아델은 어느 때보다도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아델. 마르가르텐의 상태는 좀 어때?”
“마르도 제법 활력을 되찾았어! 그런데…… 그 미치광이 때문에 골치 아프다던데. 성자로서의 적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대. 마법 연합을 강제로 끌고 가려는 중이라고…….”
아델과 마르는 뿌리를 통해 의사를 나눈다.
그 덕에 마르에게는 신안이나 계시를 사용할 필요 없이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다.
“적성이 뭐가 중요하겠어. 그놈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뒷목을 부여잡는 게 일상이 된 마르를 떠올리자니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그의 전언대로 앨런의 성정은 성자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진 배경과 능력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성자님. 전원 출정 준비 완료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델과의 해후를 반기던 중, 지휘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째로 템플나이츠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웃으며 제 옆자리를 가리키는 모습들이 유난히 익살맞았다.
둘째론 언데드 전쟁을 이겨 낸 연합의 간부들이 보였다.
그 뒤로 쭉 도열한 병력 또한 제법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든든하군.’
이만하면 전쟁을 끝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자.”
쿠구궁-
숱하게 역병을 막아 낸 성문이 열렸다.
도합 일만삼천의 병력이 열린 성문 사이로 진군을 시작했다.
“오오오! 호르 가라사대!”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우리를 해하지 못할지어다!”
“오늘이 역사가 될지어다!”
그들은 목청을 드높여 노래했다.
채 일만 필의 말을 구할 수가 없어, 보행으로 실시된 진군은 고달팠다.
그럼에도 내 뒤편의 사내들은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 혼자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은 잘 모른다.
군단장 칼고스의 무시무시한 힘을.
그 악랄하고 잔인한 흉성을.
이번 전투가 놈을 참살할 기회라지만, 그것이 꼭 쉽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한참 폐허가 된 영지를 지나치는 와중에 아론이 내게 물어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의 모두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또 예전처럼 저희가 죽을지 살지 염려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히죽 웃은 아론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드래곤 토벌을 앞뒀을 적의 기억과 겹쳐졌다.
“케케묵은 이야기를 이제 와서…….”
내가 불만스레 중얼거릴 때였다.
“저희 걱정하시기 전에 성자님부터 꼭 살아남으십시오!”
“성자님이 살아야 이 난세에도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홉슨 산맥에서부터 쭉 함께한 기사들이 웃으며 외쳤다.
나는 식겁해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진군 중에 이런 이야기는 최악이다.
살아남으라는 소리는 생존보다 죽음이 더욱 가까울 때에나 하는 말이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칠 터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성자님! 부디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주십시오!”
눈에 익은 창병, 한스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 뒤를 이어 일만이 넘는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행진가를 제창했다.
“끌끌…… 바렌은 예로부터 단단하고 용맹하기로 정평이 났습니다. 지금은 호르의 빛을 품어 더욱 웅대해졌군요.”
기드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이 도사리는 길.
등불에 옮겨 붙은 횃불이 내 앞을 밝혀 주고 있었다.
◈ ◈ ◈
리하르트를 선두로 한 대군은 역병에 물든 땅을 지나쳤다.
검게 물든 숲을 가로질렀고, 오물이 흐르는 강을 건넜다.
정원의 가호가 담긴 문장과 신앙이 없었다면 진군 중에 전멸을 면치 못했을 만큼 지독한 고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역병의 성 앞에 당도했다.
“허…….”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이것을 그 누가 폴린 성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야말로 살덩어리였다.
그것도 산처럼 거대한 붉은 살덩어리.
그것은 이미 거인의 모습을 거진 갖춘 채였다.
아직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일진대, 겉모습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흉흉함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대기.”
리하르트는 역병 성 근처에 병력을 대기시키곤, 호르교의 깃발을 땅에 꽂아 넣었다.
그 안에 담긴 수백만의 신앙이 사내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 주었다.
“아론, 기드. 둘은 나 좀 따라와.”
“예.”
지체 없이 걸음을 옮기는 리하르트의 뒤를 아론과 기드가 따랐다.
묵묵히 역병의 성 측면을 따라 걷기를 한참.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론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저, 저들은……!”
저 멀리 힘겹게 마기를 헤치며 다가오는 대규모의 병력이 보인 것이다.
기수들이 치켜든 깃발들은 하나같이 마법가의 문양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 보이는 드래곤 문양이 그려진 깃발.
바로 마르크스 가문의 것이었다.
“타이밍 좋네. 호위 좀 부탁한다.”
“성자님!”
리하르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들에게 휘적휘적 다가갔다.
그렇지 않아도 고행길에 올랐던 마법사들이 예민하게 대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잉-!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마법이 아론의 오러에 꿰여 흩어졌다.
잔류하는 마나의 기류 속, 리하르트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다들 낯빛이 영 좋지 못하네.”
그에 대한 답은 날이 잔뜩 선 살기였다.
뒤이어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오! 너구나? 남쪽의 성자가. 음, 척보기만 해도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걸?”
“북쪽의…… 잡, 것…….”
앨런 마르크스.
지팡이를 소중히 감싸 쥔 그의 눈가가 사정없이 떨렸다.
어째서인지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분통을 터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잡것이 아니라 성자인데.”
까드득-
앨런의 이가 갈렸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의 반응에도 무척 태연했다.
대신에 아론과 기드가 양옆에서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까딱 잘못하면 마법 수천이 한꺼번에 쏟아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흐음. 남쪽의 성자가 동료들을 잘 이끌지 못했나 보군. 다들 도살장에 끌려온 얼굴을 하고 있어.”
와중에도 리하르트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품평하듯 마법사들을 훑어보는 시선엔 실망감이 엿보였다.
앨런에겐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그는 곧 죽을 것처럼 구는 마법사들을 보며 분노를 삼키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남쪽의 성자여.”
리하르트가 앨런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앨런과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차마 마법진을 그려 내진 못했다.
사아아-
북쪽의 성자를 휘어감은 후광이 무척이나 짙고 찬란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면, 호르께서 크나큰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네 동료들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테지.”
앨런은 멍한 눈으로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결코…… 맞잡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 마음과는 달리, 손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빌어, 먹을…….”
이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앨런은 호르의 빛을 처음 영접했을 때처럼, 혼란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