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Episode. 37 북쪽과 남쪽 (2)
천벌의 후유증이 완전히 나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마침내 신앙과 권능을 다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신안을 사용해 역병의 성을 살펴보았다.
‘과연…….’
지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역병의 성은, 그의 보고대로 끔찍한 역병 거인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연신 꿈틀거리며 기이한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주변을 가득 메운 마기는 얼마나 농도 짙던지.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었다.
이후, 수뇌부들은 리오 성의 병력에게 현 상황을 전파했다.
눈에 보이는 사내들마다 긴장이 만연해졌다.
“바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보고 있는데, 오르드 성주가 물어왔다.
당연히 내가 바렌의 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는 기색이었다.
물론 그게 맞는지라 순순히 답해 주었다.
“예상대로입니다. 왕도 측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국왕 폐하께선 최선의 선택을 내리신 것이겠지요.”
언제였을까.
그는 내게 바렌티스 국왕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프로트 왕국이 국왕 폐하의 깊은 뜻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군요.”
한 번 깨진 신뢰는 여간해선 다시 이어 붙이기 힘들다. 그것도 깨뜨림을 당한 입장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재차 손을 내밀었다.
저번엔 오물이 묻은 손이었다면, 지금은 빛을 쥔 손으로 말이다.
나는 사절단을 꾸리던 왕도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전부 잘 풀릴 겁니다. 바렌의 호르가 이곳을 굽어살피고 계시니.”
내 말에 성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바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랴, 보고서를 작성하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바텐가의 가주도 늘 서류 따위를 달고 살았는데, 역시 직책이 높을수록 고달픔도 커지는 모양이었다.
속으로나마 성주의 노고를 기리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끝이 보이고 있군요. 이 역병 전쟁도.”
이번엔 아론이 다가왔다.
그의 옆엔 모리츠와 기드도 함께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어째서인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뜨거워, 슬쩍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성자님.”
아론이 우직한 얼굴로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우면, 호르께서 중급 성기사의 자격을 내려 주시는 건지요.”
셋의 눈빛이 유난히 불타오른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경쟁 아닌 경쟁이 붙었다고.
“이것들이. 성기사가 돼서 급을 나눠?”
따끔하게 한마디 쏘아 주자 모리츠가 발끈하며 나섰다.
“그런 속되고 천박한 이야기가 아니야!”
“그럼 뭔데?”
“업적을 세우고 싶은 것은 기사의 덕목 아니겠어? 이건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거라고.”
너무도 당당한 발언.
이 자식이 이런 사람이었나 새삼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듯, 기드 역시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칼고스와의 전투에서 활약하면 중급 성기사가 될 수 있을 거다.”
사실, 나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군단장 칼고스.
그 흉악한 놈을 참살하고 신격의 상승을 이룰 생각을 하노라니, 온몸이 절로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이번엔 기드가 나서서 말했다.
“도련님, 병사들의 사기 역시 모리츠 도련님과 다르지 않더군요.”
기드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 물자를 꺼내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긴장감을 감추진 못했을지언정, 두려움까지 집어먹진 않은 듯했다.
꼭, 우리만 전의로 끓어오르는 게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기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지요.”
어느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기드가 병사들의 용맹함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려스러웠는데, 잘되었지.”
저기 있는 일만의 병력은 고작 한 번의 전투밖에 치르지 못했다.
그것이 설령 3세대 역병이라 하더라도, 칼고스와의 대치를 앞두고 겁을 집어먹지 않은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는 것을 이제야 받아들였나 봅니다. 일전의 벼락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아! 맞아. 그건 정말 굉장했지. 그 마르크스 가문의 가주란 작자도 이런 기적을 보여 주진 못할 거야.”
아론과 모리츠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 모리츠의 발언은 내가 잠시 잊고 있던 문제를 상기시켜 주었다.
“마르크스라…….”
◈ ◈ ◈
얼마 전의 회의에서 나는 마법 연합도 전투에 참가하도록 만들 것이라 했다.
그러자 수뇌부를 비롯한 성의 기사들이 결사반대를 외쳐 댔다.
남대륙의 마법사들과는 곧 죽어도 손을 잡지 않겠다며 아우성치는 모습.
물론 마법 연합이야 다르겠냐만은, 북대륙의 방패라 불린 바렌의 사내들은 저 밑의 마법사들을 무척이나 혐오하고 있었다.
“으음.”
나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북대륙과 남대륙의 화합은 아주 멀고도 험한 길이구나.
뒤늦게 실감이 났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하나 추가되어 버린 참이었다.
“앨런아. 앨런아……. 이 미친 자식아.”
머릿속에 한 소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후유증이 나은 후에 신안으로 보았던, 미치광이 성자의 화형식이 말이다.
“내가 얕보고 있었어.”
그래. 난 정말로 앨런의 성정을 얕보았다.
길만 잘 들이면 고분고분해질 줄 알았건만, 그놈은 양날의 검이었다.
그것도 내가 본래 알고 있던 것보다도 더더욱 날카로운 검.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뒤늦게 호르를 믿게 된 앨런의 신앙심은 어딘가 광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어쩔 수 없지.”
◈ ◈ ◈
화르륵-!
시뻘건 불꽃이 타올랐다.
역병 괴물들을 집어삼킨 화마(火魔), 그 위에 마법사들의 시체가 쌓였다.
명망 높은 마법가, 롤랑의 주인도 새까맣게 타 버린 시체 한 구가 되었다.
“…….”
장내에 침묵이 깔렸다.
마법 연합의 일원들은 그저 혼란스러운 눈길로 한 소년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소년이 갑작스레 동료들을 공격했음에도, 어째선지 그 앞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들까지, 저 보이는 광기에 찢겨 나갈 것만 같았다.
“후, 후후…… 더러운 변절자들아, 이 성화(聖火)로 네놈들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겠노라.”
화아악-!
앨런의 손짓에 화마가 더욱 크게 몸집을 불렸다.
변절자.
앨런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변절자란 소리를 내뱉었다.
마르크스의 정예 마법사들도 하나같이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앨런은, 그야말로 귀족의 표상이었다.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의 품격과 능력을 갖춘, 완벽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도련님이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언제나 냉철함을 품었던 그의 눈빛엔 형언할 수 없는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언뜻, 저 깊은 곳에서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 여태까지 보아 왔던 그라면, 이렇게 얘기하는 것에 거짓은 없을 터.
이를 지켜보던 부관이 의문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저들이 배신자였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들은 배신자다.”
앨런이 즉답했다.
“응당 섬겨야 할 빛을 온몸으로 거부한 것이 변절의 증거임과 동시에 크나큰 죄악이다.”
확신에 가득 찬 음성.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다시 한번 상서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빛을 쬔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제 가문의 수장을 잃은 자도, 동료를 잃은 자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게 꼭 빛 때문은 아니었다.
빛을 쥔 미치광이가 두려웠을 뿐이었다.
무언가 반박의 목소리를 내면 화형에 처해질 것 같았다.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법사들은, 문제를 문제 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선은 위험을 피하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난데없는 화형식은 앨런을 보좌하는 부관의 지휘하에 정리되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지금.
거하게 미쳐 날뛰던 앨런은 제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중이었다.
“호르시여. 보셨습니까?”
그가 두 손을 맞대고 기도를 올렸다.
“제가 당신의 빛을 품지 못하는 변절자들을 불로써 정화시켰습니다.”
찬란한 신의 빛을 떠올린 앨런의 입꼬리가 크게 올라갔다.
칭찬을 해 주시겠지.
북쪽의 잡것보다도 내가 더 유능하단 것을 알아주시겠지.
칭찬을 바라는 원색적인 감정들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저는 당신의 위대함을 홀로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바라 왔던 평화…… 그것을 위해선 당신의 빛이 필요합니다.”
앨런은 자신의 원대한 꿈을 상기했다.
지금껏 이 세상의 평화는 칼과 마법으로 인해 지켜지고, 또 너무나 쉽게 깨졌다.
누군가에겐 평화를 지키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불행을 불러왔으니.
그렇다면, 완전무결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앨런 마르크스는 열 살이 되었을 적에 그 해답을 찾았다.
“칼과 마법이 필요 없는 세상! 당신 또한 그러한 세상을 바라고 계시겠지요!”
지금 이 세상엔 칼과 마법이 필요했다.
곳곳에 괴물과 이종족이 기승을 부리고, 이제는 더러운 마기까지 들끓었다.
칼과 마법이 더욱 절실해진 지금의 시대를 두고, 앨런은 난세라 칭했다.
“저는…… 당신의 성자가 되었을 때, 그때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세상 모든 괴물과 이종족을 죽이고, 모든 불화의 씨앗을 없애겠노라는 앨런의 포부.
그 포부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호르시여. 당신은 저를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주셨지요. 그 찬란한 빛을 제게 나누어 주셨지요.”
구원의 빛.
난세에 도래한 신의 빛.
바라마지 않던 평화의 빛.
스윽-
앨런이 손을 저 높이 치켜들었다.
“제가 이 세상을 백지로 만들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만든 세상의 꼭대기에서 어린 양들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호르시여.
그것이 제가 당신께 바칠 선물입니다-
남쪽의 성자가 황홀한 듯 중얼거릴 때였다.
방 한편에 늘어트려 놓았던 지팡이에서 찬란한 광채가 터져 나왔다.
“아, 아아! 호르시여!”
앨런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환희에 가득 차오르며 크게 뜨였다.
필시 자신의 염원을 듣고 대답해 주러 온 것이다.
어쩌면 상을 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남쪽의 성자여…….』
웅대한 신의 음성이 어쩌면 이토록이나 경외로울 수 있는지.
“예! 말씀하십시오! 이 앨런이 듣고 있습니다!”
앨런이 넙죽 엎드리곤 고개를 조아렸다.
『너에게서 보았노라.』
『악을 처단하는 심판관의 모습을.』
『신벌을 대행하는 사도(使徒)의 모습을.』
자애로운 빛무리가 앨런을 휘감았다.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노니.』
『난세를 헤쳐 나갈 영웅으로서 부족함이 없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