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Episode. 37 북쪽과 남쪽 (1)
어둠 속, 한 붉은 거인이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죽은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왕이시여. 어서 결단을.”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건만, 마치 대화라도 하는 듯이 누군가에게 채근하는 듯한 어조였다.
다름 아닌 우매하고도 공포스런 자신의 왕을 향해 아뢰는 것이었다.
언뜻 고요해 보이는 그의 표정 속엔 휘몰아치는 성마름이 담겨 있었다.
붉은 역병 거인, 칼고스는 자신이 본 것을 떠올렸다.
여리디여린 인간의 육신에 갇힌 신.
그 보잘것없는 빛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아버지, 아버지……!”
칼고스는 그리운 이름을 되뇌었다.
곧 그의 하반신이 뻣뻣해졌다.
그를 둘러싼 병균이 들끓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를 향해 품을 만한 감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상스럽고 저급한 욕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저희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권좌에 앉은 거인은 그렇게 홀로 중얼거렸다.
“당신만큼은 저희의 손으로 더럽히고 싶었단 말입니다.”
깊고 깊은 지하에서, 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댈 뿐인 존재들.
날 때부터 패륜아요, 부정(不淨)한 성정을 타고난 그들은 자신의 아비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은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닿기 위해 악을 썼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제는 닿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저 높은 하늘에서 추락해 버리고 말았지요.”
마왕이 보았고, 칼고스 역시 보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저들이 기억하던 전지전능한 신은 이제 없노라고.
그날 이후로 푸르른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케케묵은 목적은 완벽히 방향을 틀었다.
지하에서부터 기어 올라가, 땅을 딛고 하늘에 닿을 필요조차 사라졌다.
“끄흐, 끄흐흐……! 당신의 자리는 그곳이 아닙니다.”
칼고스가 저 위로 손을 뻗었다.
나약한 육신을 뒤집어쓴 아버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꽈아악-
붉고 거대한 손아귀가 공간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일대의 마기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그사이로, 칠흑보다 어두운 기운이 섞여 들었다.
“……드디어!”
우매하고 공포스러운 왕에게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칼고스의 눈이 반달처럼 크게 휘었다.
◈ ◈ ◈
“이건…….”
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이 불쾌함은 뭐랄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을 코앞에서 받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성벽, 그 너머 역병의 성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왜일까.
경각심이 종을 울려 댔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으로 이유 모를 땀이 흘러내렸다.
무언가 이변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수뇌부들에게 긴급회의를 열라고 전해.”
병사 하나를 붙잡고 명하곤 성벽에 올라갔다.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는데…….’
늘 그렇듯 역병의 성 쪽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역겨웠고, 정원의 공기는 싱그러웠다.
어쩌면 이 정원의 장막 속에 오래 있다 보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아니야. 경계나 서.”
친근히 물어오는 기사에게 고개를 저었다.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것으로 이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었다.
‘신안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천벌의 후유증은 채 가시지 않았다.
신앙 자체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권능을 사용하기엔 아직 무리가 있었다.
워낙에 유용한 힘이다 보니, 요 며칠 간은 장님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이 기분을 애써 억누른 채 회의장으로 향했다.
◈ ◈ ◈
“첫 3세대와 전투를 치른 뒤 이 주가 흘렀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갑자기 왜 긴급 회의를……?”
“아무래도 이변이 생긴 듯합니다.”
“…….”
일순,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그중에서도 오르드 성주의 눈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오르드 성주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이변입니까?”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확신은 있었다.
뭔가가 있다고.
“역병 성의 성장세는 제가 상정한 것 이상으로 가팔랐습니다. 이번에 3세대로 거듭난 것 또한 이변이라 칭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
수뇌부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대승을 거뒀다 하나, 놈들의 기미가 너무나도 조용합니다.”
“그…… 말씀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무래도 적은 이 싸움을 질질 끌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
사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긴 했다.
마왕이 나를 봤고, 칼고스가 나를 알아보았다.
그 폭급한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애당초 마계가 이 땅을 넘보는 것도 전부 신의 격에 닿기 위해서였다.
모르긴 몰라도 불을 뒤집어쓴 멧돼지처럼 잔뜩 안달이 났을 것이다.
“정찰을 통해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론을 꺼내며 지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뜻을 알아들은 지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다녀오지. 마기에 대한 방비만 단단히 하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오르드 성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지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그 면면들에는 막연한 긴장감이 엿보였다.
◈ ◈ ◈
와이번이 리오 성의 상공을 선회했다. 그러다 이내 남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등에 매인 호르교의 휘장이 거칠게 나부꼈다.
“우선 정황이 확실시되기 전까진 입단속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느새 점처럼 멀어진 지크를 눈으로 쫓고 있는데, 오르드 성주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다만…… 당초의 계획이 무산되어서 큰일이군요.”
오르드 성주가 그답지 않게 우려 짙은 음성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역병의 성을 막으며 바렌이 다시 일어설 기반을 만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성자님 말씀대로 곧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미, 기반은 충분합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았다.
다만 그것은 기우일 뿐이었다.
“역병 성과의 전면전은 생각보다 이르긴 하나, 바렌 또한 빠르게 변했습니다.”
오르드 성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바렌은 교국이 되었다.
국왕의 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져 갔고, 백성들의 믿음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 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바렌에겐 프로트 왕국이라는 옛 우방도 존재했다.
설령 잠시 그들 사이가 틀어졌을지언정, 바렌티스 국왕이라면 호르교를 통해 평화를 추구할 것이 자명했다.
그런데도 오르드 성주의 염려는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마법가입니다. 그 비열하고 명예를 모르는 탐구자들은 어부지리만을 노릴 것이 분명합니다.”
엘프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덧붙인 성주의 투덜거림은 유난히 적대적이었다.
“하하. 우선 전면전이 확실해진 것도 아니니 기다려 보시죠.”
나는 지금처럼 웃으며 성주의 근심을 덜었다.
그렇게 나흘이 흘렀다.
저 멀리, 회색빛 와이번이 허공에서 비틀거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 위에 올라탄 지크의 안색 역시 썩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회의가 열렸다.
“마기의 밀도가 이상하리만치 높더군.”
성수를 벌컥 들이킨 지크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고갯짓도 함께였다.
“와이번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포이르 백작령까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역병의 성을 중심으로 밀도를 더해가는 마기.
그런데 그 성의 외양이 무척 기괴했단다.
“거대한 인간…… 거인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혹 원래 그런 모습의 성인지요.”
지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에 모인 이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 일이 있어도 정말 단단히 있나 봅니다.”
“사태가 이만큼이나 악화되기 전에 처리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지였습니다……!”
지휘관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틴 가스타인 기사단장은 지난 리오 성의 결정을 질타했다.
삽시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기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내게 재차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호재로군요.”
그렇다. 이건 호재였다.
그것도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호재라니, 이게 어찌 호재란 말입니까?”
아발트가 물었다.
나는 반대로 되묻고 싶었다.
그럼 이게 악재라도 되는 거냐고.
일전에도 말했듯, 칼고스는 마왕 휘하의 군단장 중 일각이다.
“적군의 장수가 홀로 대가리를 들이대려 하고 있으니, 목을 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성의 사내들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역병의 성은 칼고스의 저주로 빚어졌습니다. 세대를 거듭하며 더욱 악질적인 역병 괴물들을 쏟아내지요. 그리고 그 저주의 종착점은…….”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을 통해 유추한 걸까.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군단장 칼고스. 놈이 바로 역병의 저주 그 자체입니다.”
혹자는 이 이야기를 두고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려먹은 소리였다.
“이번에야말로 그놈의 목을 따 버립시다.”
일전에 칼고스를 처리하지 못한 게 어찌나 아쉽던지.
놈 하나만을 상대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준단다.
“군단장을 처리하기 위해선 군단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억지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저주.
놈의 자랑인 수천의 권속들이 나타날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때, 묵묵히 듣기만 하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기회라고 여기면 기회이긴 하지. 다만 위기인 건 변함이 없다. 네 말마따나 장수와 싸워 이긴다 한들, 그 뒤에는 마법 연합의 습격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흘 전 오르드 성주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나는 다시 웃었다.
“싸움이 다 끝나면, 마법 연합도 우릴 공격할 여유는 남지 않을 거야.”
“뭐?”
“설마 우리만 놈과 싸울 생각이었어?”
그거야말로 어림도 없는 소리지.
남쪽의 성자 나으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마침 타이밍도 딱 좋았다.
슬슬 실제로 대면하고 싶던 참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