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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12화 (112/216)

112화. Episode. 36 역병 거인 (3)

회의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만큼 국왕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프로트 왕국.

바렌과 함께 북대륙의 방패라고 불리는 나라.

하지만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었다.

오늘날 프로트 왕국은 바렌의 어려운 정세로부터 눈을 돌렸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마저 쳐냈다.

심지어는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곤 모든 교류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그에 바렌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던가.

귀족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재, 재고해 주십시오. 전하!”

비교적 젊은 귀족 하나가 정적을 깨고 외쳤다.

국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프로트 왕국은 이미 약조를 깨트렸습니다. 그들의 치졸함에 저희는 물론이고 바렌의 백성들이 얼마나 큰 절망에 빠져야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빛을 나누어 주는 것은 아니 됩니다!”

젊은 귀족은 열변을 토하곤 이미 삭아 없어져 버린 두 왕국 간의 약조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바렌 왕국이 북대륙의 최남단 국가로서 남대륙의 습격에 대비한다면, 프로트 왕국은 우방으로서 바렌의 비상사태에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것이다.

입술과 이의 관계.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시작된 두 국가의 인연은 마기의 발생 이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맞습니다! 누대에 걸쳐 이어지던 약조는 이미 끝났습니다. 프로트 왕국은 바렌의 우방으로서 누리던 특혜만을 탐냈을 뿐, 책임과 의무는 지려 하지 않습니다!”

젊은 귀족의 말에 다른 이들이 동의를 표했다.

평소 온건파에 속하던 귀족들까지 프로트의 행태를 성토했다.

“…….”

국왕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귀족들의 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등 돌린 우방을 보며 가장 크게 절망했던 자가 다름 아닌 국왕 자신이었다.

“짐이라고 어찌 아무렇지 않겠는가.”

곧 국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음성은 비탄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현 바렌이 가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군사력이 리오 성에서 전투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 모든 물자와 부담을 끌어안기엔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프로트 왕국이 예전의 기상을 잃고 움츠러든 원인은 온 대륙을 삼킨 마기다. 우리가 그들 스스로 어둠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촉진한다면, 잠시 흐트러졌던 우정 또한 다시금 이어질 것이다.”

국왕은 지금껏 몇 번이나 고심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을까.

결국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사절단을 꾸려라. 그 사절단의 책임자는 트란티스 후작으로 임명하겠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줄곧 잠자코 있던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그에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독단을 내린 국왕의 귓가로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별다른 도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손에 쥔 것을 내줘야 하냐는 이기심, 혹은 안타까움.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성인군자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들에게 선뜻 빛을 건네주어선 안 됩니다.”

그때, 처음 우려를 표명했던 젊은 귀족이 나섰다.

“그들에게는 없고, 저희에게는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호르입니다. 프로트 왕국에겐 무척이나 간절한 빛이지요. 그러니 그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과 약조 위반의 배상을 치르기로 약속하기 전엔…….”

쿵!

늙은 국왕이 팔걸이를 내리쳤다.

“어찌하여 호르가 우리의 것이란 말인가. 대체 어찌 호르를 한낱 협상 따위에 들먹인단 말인가.”

바렌티스 국왕의 음성은 덤덤했다.

하나 그 속에는 젊은 귀족을 묵직하게 질타하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리하르트 공은 우리의 불신을 감내하며 빛을 전해 주었다. 한데, 그 자비에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떻게 호르의 빛을 제 것으로 여기며 대가를 바란단 말이더냐.”

“…….”

“프로트 왕국 또한 바라고 있을 뿐이다. 하루빨리 마기가 걷히기를, 어두운 밤이 지나가기를.”

후우-

숨을 크게 내쉰 국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곧 우리 우방의 간절한 소망이고, 호르일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호르 또한 바렌의 안녕일지니. 서로가 서로의 소망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          ◈          ◈

리오 성에선 여느 때와 같이 우렁찬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좋네.”

리하르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차례 전투를 겪어서일까, 천벌이라는 이적을 직접 보아서일까.

원군의 목소리엔 성스러운 음색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신을 믿는 자들이 부르는 성가임이 틀림없었다.

문득, 리하르트는 휴거가 떠올랐다.

매번 메리를 부르짖으며 성을 시끄럽게 하던 오크가 없으니 어쩐지 좀 허전하기도 했다.

잘 가고는 있으려나.

중얼거린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안으로 휴거의 여행길을 살펴보고 싶건만, 천벌의 부작용이 채 가시지 않아 있었다.

몸 안엔 신앙이 가득한데, 도통 움직이질 않으니 마나 둔감증에 시달릴 적이 생각날 정도였다.

“흐음.”

리하르트는 천벌의 위력을 떠올렸다.

아직은 과분한 힘이었다.

이적을 행할 신앙은 충분했으나, 그 힘의 주체가 하급 신격에 지나지 않았으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서 성장이 정체된 기분인데.’

호르교 자체는 무서운 기세로 커지고 있었지만, 신격의 단계는 아직도 하급에 머무르고 있었다.

검성의 성취 역시 아직도 두 자루에 불과했다.

하루빨리 네 자루에 도달해야 발락을 볼 수 있을 텐데.

알게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그가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땀에 흠뻑 젖은 지크가 무척이나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리하르트! 너도 단련이나 하지 않을래? 맨날 놀기만 하면 정체된다?”

“……보자마자 아픈 곳을 찌르는군.”

리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심심하면 대련 한 번 할까?”

그런 와중에 지크가 제법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해 왔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대련은 별로.”

리하르트가 계승받은 검성은 한계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성장한다.

미적지근한 대련 같은 것으론 성취를 꾀할 수 없었다.

“흠, 그럼 나중에 모리츠 녀석이나 좀 봐줘야겠네. 아, 그나저나…….”

지크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

“아, 그거? 이제야 알았어?”

얼마 전에 떠난 휴거의 목적지를 알게 된 것이다.

“설마 했는데 타이탄이라니.”

바텐베르크가 북대륙에 군림함으로써 겨우 틀어막은 야만 전사들의 땅.

그 폭탄과도 같은 나라에 이변이 생기면 바텐베르크가 나서야 했다.

지크는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곳에 네 동료를 보낸 이유가 뭐지?”

리하르트는 그저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사무치도록 성스러워서, 지크는 무어라 다그칠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 타이탄의 전사들이 미쳐 날뛸 일은 없을 테니까. 오크 나라에 오크가 가는 건데, 뭐 그리 이상하다고.”

“……평범한 오크가 아니잖냐.”

호르라는 신을 섬기는 성기사 오크.

만약, 아주 만약에 타이탄에 호르교가 퍼진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타이탄의 왕은 오크들이 꺾고 싶은 상대 1순위이자, 닮고 싶은 존경의 대상이라지.”

리하르트는 그리 말하며, 기대된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내 곳곳에서 태동을 시작하는 호르교.

그 미래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          ◈          ◈

3세대 역병의 습격을 받은 건 마법연합의 요새도 마찬가지였다.

“허…….”

연합의 일원들이 두터운 결계 뒤편에서 헛숨만 연신 들이켰다.

그 얼굴엔 지친 기색과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마르크스…… 역시 위대한 가문이군.”

“분명 이전보다도 더욱 흉악한 놈들이었는데…….”

그들은 요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결계의 코앞까지, 괴물들은 파편이 되어 땅을 나뒹굴고 있었고, 이곳저곳엔 강렬한 마법의 흔적이 크레이터로 남아 있었다.

“사, 사망자와 부상자는 전무합니다.”

마법 연합은 이번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었다.

붉은 역병 거인들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땐 연합의 패배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역겹군. 아주 역겹기 짝이 없는 기운이야.”

거인과 괴물을 모조리 죽이고 연합을 승리로 이끈 일단의 무리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소년이 중얼거렸다.

“앨런 도련님. 마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뒤쪽으로…….”

“흥. 되었다.”

부관의 말에 앨런이 손을 휘저었다.

눈으로는 결계 너머 괴물들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불쾌한 악취가 숨결마다 섞여 들어왔다.

“큭!”

앨런은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호르의 빛으로 저 깊숙이 가라앉았던 마기가 몸속에서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꽈악-

호르의 축복을 부여받은 지팡이를 꽉 쥐고 나서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곳이군.”

리치에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앨런의 표정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반대로 그 작은 체구 위로 거대한 마력이 일렁였다.

“이 짜증나는 마기도, 악취를 풍기는 미친 녀석들도. 북쪽의 잡것도…… 전부 마음에 안 들어.”

“도련님?”

부관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의문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럼에도 앨런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호르. 호르시여. 저를 지켜봐 주소서.”

고개를 푹 숙인 앨런의 주변으로 공기가 급격히 떨렸다.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당신의 유일한 성자입니다. 오직 저만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 겁니다. 호르시여.”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음성에 뒤쪽에 있던 마르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치겠군. 몸속에 웅크린 마기 때문에 흥분한 건가…….”

성자치고는 정말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당장에라도 난동이라도 피울 것 같은 모습.

마르가 그를 진정시키고자 할 때였다.

앨런이 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파아앗-!

그곳에서 신앙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헉!”

“저건 무슨……?”

영문도 모른 채 빛을 직시한 마법사들이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 아아……!”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신앙의 기운은, 잔뜩 지친 그들의 심신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다.

다만 모두가 빛을 반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끄윽!”

“뜨거워!”

빛을 쬔 마법사 중 일부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 깡마른 몸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

앨런의 시선이 서서히 그들에게 향했다.

“……찾았다. 변절자 녀석들.”

주욱-

그의 입꼬리가 사납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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