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Episode. 35 지크 바텐베르크 (1)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 거대한 와이번이 하늘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그 위에 올라탄 미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와, 형.”
히죽 웃으며 환영해 주니 그의 얼굴이 오묘한 빛을 품었다.
지크 바텐베르크.
그가 온다는 것쯤이야 신안을 통해 미리 파악하고 있던 일이었다.
루드비히, 그 양반이라면 호르교에게 제 기사들을 홀랑 빼앗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테지.
키르르륵-!
날갯짓을 하던 와이번이 울부짖었다.
전장의 열기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저, 저건……!”
한창 괴물과 드잡이질을 하던 기사들이 뒤늦게 와이번을 발견하고 당혹성을 흘렸다.
괴물들 몇 놈도 고개를 쳐들곤 입을 딱딱거리기 바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외쳤다.
“정신 차려! 지금은 전투 중이다!”
신앙 섞인 외침이 아군의 정신을 일깨웠다
“괴물들한테 집중해라!”
“한눈 팔지 마!”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양손에 드래곤 투스와 백귀를 그러쥐곤 쉴 새 없이 휘둘렀다.
그때 내 옆으로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지크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너, 리하르트 맞냐?”
대뜸 물어 온다는 것이 고작 동생 확인 여부라니.
어째 모리츠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그때 모리츠도 나보고 리하르트가 맞냐고 물었었지.
“맞긴 한데, 우선은 괴물부터.”
촤악-!
난 검을 흩뿌리며 대꾸했다.
역병과 악취가 들끓는 전장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진짜 믿기지가 않네.”
혼란한 와중에도 지크의 음성은 잘만 들렸다.
이내 그에게서 엄청난 기세가 솟구쳤다.
나는 흘끔 눈만 돌려 지크를 바라보았다.
“동생아. 얼른 끝내고 얘기 좀 나누자.”
흥미 가득한 눈길.
씨익 미소를 지은 그가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칼끝의 궤적에 걸린 괴물들에게서 피보라가 일었다.
“……괜히 바텐가의 유력한 차기 후계자가 아니다, 이거지.”
솔직히 말해서 혀가 절로 내둘러지는 칼솜씨였다.
아무래도 오늘의 전투는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날 것 같았다.
◈ ◈ ◈
지크는 전투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바텐베르크로부터 리오 성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전투 후 곧바로 소집된 회의, 수뇌부의 시선을 한 몸에 끌어모은 지크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선 내가 알던 지크의 최후가 떠올랐다.
‘앨런과 마법가의 총공세에 폭사…… 였던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텐베르크의 혈통 중 침상에서 명을 달리한 이는 없다는 것이다.
“……어려움을 헤아려 주신 바텐베르크의 배려에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내가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수뇌부와 지크가 인사를 끝마쳤다.
특히 수뇌부와 모리츠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이, 기별도 없이 방문한 손님이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바렌의 정황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다년간 오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소식이 늦습니다.”
지크의 물음에 답한 건 오르드 성주였다.
폴린 성을 집어삼켰던 세 마리 리치부터 시작하여 언데드 전쟁까지.
일목요연하게 요약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럼 조금 전의 그 마물들은 뭡니까?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놈들이었습니다만.”
“그건…….”
돌연 오르드 성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걸까.
그를 따라 지크의 시선도 내게 향했다.
“마왕 휘하의 군단장 중 하나, 칼고스라는 괴물의 저주야.”
“마왕? 군단장……?”
내 불친절한 설명에 지크의 고개가 갸우뚱한 것은 당연했다.
“있어.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들. 아무튼 우리의 적은 칼고스란 녀석의 저주로부터 창궐한 놈들이야.”
마왕이니, 칼고스니.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실감도 나지 않을 것이다.
지크가 당장 알아야 할 것은 역병 괴물들에 대해서일 뿐이었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차차 알아 가면 됐다.
“폴린 성이 있던 자리에 역병의 성이 자리 잡았지. 그 성에서부터 괴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끔찍한 전염병을 품은 놈들이야.”
“……전염병이라.”
힐끔 제 몸을 내려다본 지크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전염병을 품은 괴물들 사이에서 난리를 쳤는데, 제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게 퍽 의문스럽나 보다.
“자비로운 세계수가 형을 구해 줬나 보지.”
◈ ◈ ◈
지크가 상황을 파악하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리오 성의 상황은 특이해도 너무 특이했다,
“웬 나무가 성을 휘감고 있다 했더니만 설마 세계수였다니.”
이제는 전설 취급이나 받던 나무가 리오 성에 솟았단다.
믿기 힘들었지만, 성 곳곳에 가득 찬 신령스러운 기운은 세계수가 아니라면 더욱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코끝을 스치는 풀내음은 엘프의 것이 분명했다.
이 좁은 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차례 마른세수를 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회의실엔 지크와 리하르트, 모리츠만이 남은 상태였다.
“혀, 형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 모리츠. 경황이 없어 이제야 인사를 나누게 됐구나. 그동안 잘 지냈냐.”
눈이 초롱초롱해진 모리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어릴 적부터 곧잘 지크를 따르던 모리츠였던지라 새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녀석. 제법 기세가 정돈되었구나. 몰라보게 성장했어. 장하다!”
애정 어린 지크의 음성에 모리츠가 얼굴을 홍시처럼 벌겋게 물들였다.
“조, 존경하는 형님을 본받아 열심히 수양하였습니다. 제 성취를 알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툭툭.
지크가 손을 들어 모리츠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한 발 물러선 채로 둘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크의 형제애는 남다르지.’
형제간에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한다는 이야기는 포악하던 시절의 모리츠를 두고 생겨난 뜬소문이었다.
“이놈들아. 너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문을 박차고 나선 거냐?”
지크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모리츠와 리하르트를 다그쳤다.
그러나 형으로서 형식적으로 내뱉는 꾸지람일 뿐이었다.
“아무런 비전도 없이 출가한 건 아닐 테고.”
오히려 그 음성엔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했다.
지크는 마냥 어리기만 하던 동생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특히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는 막둥이.
커도 너무 커 버려서, 이제는 청년이 되어 버린 리하르트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단단한 기백은 이미 드높은 경지에 들어선 것이 분명했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어째서 바텐가가 그렇게나 리하르트의 이름으로 떠들썩했는지, 지크는 절로 납득하고 말았다.
“그야 비전은 있지. 형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래?”
리하르트가 지크에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우습게도 그 실없는 웃음조차 거룩하고 고결해 보였다.
휘릭-!
리하르트가 대뜸 깃발을 펼쳐 들었다.
이미 몇 번이고 보았던 십자 문양의 깃발이었다.
“그건…….”
“우리 호르교의 휘장이지. 여기까지 오는 길에 꽤 자주 봤을 거야.”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지크로서는 무척이나 얼토당토않는 소리였다.
호르교.
다시 말해서 호르라는 신을 믿는 집단.
그 수장이 다름 아닌 리하르트고, 모리츠와 제3기사단은 호르를 섬기기 위해 바텐가를 떠난 것이란다.
그리고 이제 바렌 왕국까지 호르를 섬기고 있다고.
“신이라…….”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지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용케 살아 있구나. 가주님의 칼에 맞아 죽지 않고.”
힐난도, 비웃음도 없다.
지크는 제 동생들이 신을 섬긴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북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너희가 선택한 길. 부디 후회 없기를 바라마.”
그것은 동생들을 향한 존중이었다.
신뢰 가득한 눈길에 모리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리하르트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우리 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나 보네.”
“그야 당연하지. 내 길은 어디까지나 바텐베르크니까.”
지크의 꿈은 현 바텐베르크의 가주, 루드비히 그 자체.
그 맹목적인 목표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쯧.
단호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리하르트가 남몰래 혀를 찼다.
◈ ◈ ◈
바텐베르크의 합류는 리오 성에 커다란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새삼 바텐베르크의 위세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물론, 호르교보다 지크 바텐베르크가 더욱 믿음직스럽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리오 성을 뒷받침해 주는 지지대가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래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는 눈을 흘기며 지크를 바라보았다.
막 잠에 들려는 참이었는데.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털썩-
멋대로 의자를 빼 앉은 지크가 볼을 긁적였다.
물어보고 싶은 거라.
“마나 불감증이라던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한 거야?”
“뭐,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네 얼굴을 보니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지는 않네.”
그럼 뭐가 그리 궁금해서 오밤중에 찾아온 걸까.
“으음.”
지크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그럴수록 나는 그의 의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다른 사람들 말로는 네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던데. 그 덕에 아무도 모르는 정보도 여러 가지 알고 있고.”
“…….”
조금씩,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혹시. 우리 형…… 하인리히 바텐베르크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없나?”
우려하던 질문이 나왔을 때, 난 눈을 감고 말았다.
바텐베르크의 첫째, 하인리히.
이미 옛날 옛적에 종적을 감춘 사내.
지크가 매번 장기 임무를 받는 것도 실은 하인리히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지크의 뜻이었고, 친애하는 아들을 잃은 루드비히의 미련이었다.
“리하르트. 뭔가 알고 있다면 부디 알려 다오.”
그 간곡한 부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일축했다.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형은 이미 죽어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 차마 하지 못할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