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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06화 (106/216)

106화. Episode. 34 신성 국가 (3)

리오 성에선 한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여느 때보다도 더욱 많은 수의 괴물들이 성 앞을 빼곡히 매웠었다.

장장 나흘에 걸친 대전투.

적지 않은 병사가 죽고 많은 기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승리했다.

리오 성에 흙발을 들이민 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와아아-!”

성벽 위에 늘어선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고된 전투에 잔뜩 지쳤음에도 그들의 기세는 결코 상하지 않았다.

나는 성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붉고 검은 시체 밭, 늘 그렇듯 나를 포함한 돌격대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발트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선 숨을 몰아쉬고 있는 헬가의 기사.

“네가 오늘의 주역이다.”

아발트의 어깨를 토닥이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에 아발트는 그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보아하니 대꾸할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오늘 처음으로 마부의 힘을 발휘했다.

일격, 일격에 굉음이 뒤따르고 괴물 십수 마리가 죽어 나가니, 아발트가 이번 전투에서 죽인 괴물만 해도 족히 수백은 될 것이다.

과연 남대륙에서도 몇 없는 최상급 마도구다운 위력이라고 해야 할까.

“저는…….”

돌연 아발트가 입을 뗐다.

그 지친 얼굴에 결의가 차올랐다.

이내 그가 우뚝 섰다.

“저는 이 힘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사용하겠습니다.”

쿵쿵!

흉갑을 두드리며 내뱉는 신념에 거짓은 없었다.

“와아아아-!”

이번 전투의 주역인 아발트를 향해 병사와 기사들이 재차 함성을 내질렀다.

특히나 헬가의 기사들이 목청을 드높였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다 기꺼웠다.

이제야 마음을 다잡은 아발트도, 그런 그를 격려하듯 소리를 지르는 동료들도.

◈          ◈          ◈

리오 성은 발 빠르게 전장을 수습했다. 애당초 괴물들의 시체는 정원이 모조리 집어삼킨 덕에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몇 번의 회의를 거친 후 인근 영지들을 향해 전령을 보냈다.

요새 주변에 자리한 영지들은 비상 소집 명령에 응하도록 되어 있으니, 전령이 허탈하게 돌아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전령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취익! 나도 어서 타이탄으로 가고 싶소!”

휴거가 내게 다가와 채근했다.

지난번에 대화를 나눈 뒤로 줄곧 이 상태였다.

“아직은 안 된다니까.”

“어차피 가야 할 거면 서두르는 게 좋지 않겠소?”

휴거의 성마른 음성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전장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떠나지 못해서 안달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지원군이 오면 출발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휴거는 귀중한 전력이다.

지금 당장 그가 전장을 이탈하면 죽지 않을 병사가 죽고, 다치지 않을 기사가 다친다.

“지원군이 오면 가라니. 취익, 보나 마나 나중에 또 말을 바꾸겠지!”

“허, 내가 무슨 말을 바꿔?”

“지원군이 전장에 적응할 때까지 나를 잡아 둘 셈 아니오. 뻔할 뻔 자라오.”

휴거가 심통을 부렸다.

“끄응…… 근사한 왕의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약골 병사들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고. 췩!”

“가도 돼. 지원군만 도착하면 말이야.”

나는 이 오크답지 않은 오크에게 말했다.

사실 내가 말하는 지원군과 휴거가 생각하는 지원군은 크게 달랐다.

리오 성에 지원 병력을 보낼 곳이 꼭 이북의 영지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스읍-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원의 싱그러운 풀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하나 잠시간의 평화일 뿐, 머지않아 이곳엔 다시 괴물들의 악취가 풍길 것이다.

“당분간은 딴생각하지 말고 전투나 준비해. 근래 들어 습격 빈도가 잦아졌으니까.”

“쩝. 알겠소.”

역병의 성은 벌써부터 3세대 괴물을 게워 낼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른 성장세였다.

◈          ◈          ◈

“오랜만이구나.”

루드비히는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근 2년간의 장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둘째 아들, 지크 바텐베르크.

제 아들을 본 루드비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미 5년 전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들었던 지크의 기세가 한층 깊어져 있었다.

이번 장기 임무에서 커다란 성취를 보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지크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눈매와 꾹 다물린 입술.

루드비히는 새삼 지크와 리하르트가 무척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은 오랜만에 만난 소회를 담백하게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내의 기세가 은연중에 서로의 격을 넘보았다.

“더욱더 강맹해지셨습니다.”

한참 이어진 기싸움.

결국 지크는 질렸다는 표정과 함께 기운을 갈무리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행하던 일이었다.

지크에게 루드비히는 반드시 넘어서고 싶은 대상이었으니.

“가문을 이어받기엔 아직 멀었구나.”

그런 그에게 루드비히의 발언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지크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가 없는 사이 많은 일들이 있던 것 같더군요.”

제3기사단이 어느 날 단체로 바텐베르크의 문장을 떼어 냈다던가.

못난 동생들이 가문의 이름을 버렸다던가.

그중 막내 리하르트가 자신과 함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무척 놀랐다.

지크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북대륙의 방패라 불리던 바렌의 상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터.”

“리하르트와 모리츠가 기사들을 대동하고 떠났다던 그곳 말입니까.”

지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루드비히를 보며 무언가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음을 확신했다.

하기야, 바텐가의 혈통이 기사들을 이끌고 가문을 나선 것이 보통 일은 아닐 터였다.

지크의 눈빛에 흥미가 감돌았다.

“바렌의 지원 요청은 없었으나, 그들이 무너지면 피해는 더욱 확산될 것이다. 준비를 끝마치는 대로 리오 성으로 향하거라.”

루드비히의 어조에는 두 아들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저 북대륙에 군림하는 가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 말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루드비히의 속마음이 손에 잡힐 듯 뻔히 보였다.

“여전히 서투르십니다. 제 못난 동생들이 그리도 못 미더우셨는지요.”

그저 바렌을 염려한 것이라면 진즉 제1기사단이나 제2기사단을 보냈을 것이다.

철혈이라는 이명 뒤의 루드비히라는 인간에 대해, 지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리츠와 리하르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는 싶고, 완전히 손 놓고 내버려 두자니 걱정은 되고.’

그래서 고민 끝에 자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리라.

지크는 제멋대로 확신을 굳혔다.

“분부하신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어딘가 묘한 얼굴의 가주를 일별한 지크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이제 막 장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마당에, 따로 크게 준비할 만한 것은 없었다.

크르륵-!

그가 자신의 애완동물 위에 탑승하려고 할 참이었다.

“이야! 그놈 와이번 아닙니까? 잘도 길들이셨습니다!”

어디선가 촐싹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제1기사단의 단장, 레오였다.

“레오 경?”

“간만에 뵙습니다. 흐흐.”

실실 웃는 레오를 보고 있자니 지크에겐 뼈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눈앞의 사내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리하르트의 사람이 되셨다던데, 그거 사실입니까?”

“제가 그분의 뒤에 섰으면 이곳에 있지는 않겠지요.”

“듣던 중 다행입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첫사랑을 빼앗긴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하!”

예전부터 쿵짝이 잘 맞던 두 사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농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레오의 시선이 와이번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와이번의 등에 메어진 짐짝이었다.

“곧바로 리오 성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레오의 물음에 지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무래도 가주께선 제 동생들이 걱정되시나 봅니다. 못난 녀석들 같으니라고.”

“으음, 걱정이라…….”

그런데 레오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러십니까?”

“리오 성에 계신 두 자제분이 걱정돼서 지크 도련님을 보내시는 것은 아닐 겁니다.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까딱 방심했다간…….”

댁까지 신을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은 레오의 입에서만 맴돌았다.

◈          ◈          ◈

와이번이 거친 포효와 함께 비상했다.

그 위에 올라탄 지크는 허공을 크게 선회하며 바텐베르크를 내려다보았다.

본궁의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깃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곧 방향을 틀어 남하를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리하르트와 모리츠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흐음.”

새까만 눈동자에 흥미가 어렸다.

제 동생들이 무엇을 위해, 어떤 신념을 품고 가문을 떠났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더불어 가신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대던 리하르트가 과연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었다.

‘발락 경으로부터 검술을 하사받았다고 했지. 막둥이 녀석이.’

레오의 병적인 호기심이 옮기라도 한 것일까.

지크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차기 후계자로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던 리하르트에게 경계심은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이미 바텐가의 이름을 버리기도 했지만, 형으로서 동생의 성취를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텐가가 약육강식의 울타리라고 한들, 지크에게 있어 올바른 경쟁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남으로 내려갔다.

그럴수록 하늘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몸을 옥죄이는 마기에 와이번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쭉 나아가라.”

지크가 기세를 펼쳐 마기로부터 와이번을 보호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지크는 저 아래에 펼쳐진 바렌 왕도를 내려다보았다.

곳곳에 펄럭이는 깃발은 웬 십자 문양을 품고 있었다.

비단 왕도뿐만이 아니었다.

리오 성으로 향하며 지나친 영지들 대부분, 난생 처음 보는 십자 문양 깃발이 솟아난 채였다.

대체 저게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와이번의 날갯짓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시야 끝에 리오 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그의 귀에, 성 쪽에서부터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르르륵!

와이번이 더욱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오랜 비행으로 기진맥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

이윽고, 리오 성의 하늘을 선회한 지크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흉측한 외양의 붉은 괴물들과 전투 중인 리오 성.

전장의 폭음보다도 더욱 크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괴물과 대적하고 있는 군단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여느 군가처럼 거칠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신비롭고 경건한 음색이었다.

그때 전장 한가운데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이 노래의 음색이 사람의 모습으로 빚어지면 저러할까 싶은, 빛을 줄기줄기 휘감은 청년.

빤히 지크를 바라보던 그 청년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무어라 입을 달싹였다.

어서 와. 형.

분명 그리 말했다.

“아무리 봐도 저놈이 모리츠는 아닌데…….”

그렇다면 저 빛나는 사내가 리하르트란 말인가.

지크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많이 변했다더니,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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