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Episode. 34 신성 국가 (2)
오크들의 왕은 이미 존재한다.
대륙에 산재한 수많은 오크 부족 중 서른 개를 통합하여 일국을 세운 괴물.
“오크 로드, 크락타. 너도 알고 있겠지.”
난 그 괴물이 군림하는 오크 왕국 ‘타이탄’을 떠올렸다.
대륙에서 제일 야만적인 전사들의 땅이자, 약육강식의 나라.
그곳엔 아주 특이한 제도가 하나 있다.
아니, 그 하나의 제도만이 타이탄의 유일한 법도이자 규칙이었다.
[가장 강한 오크가 왕으로서 군림한다.]
타이탄의 붉은 깃 아래 모여든 오크 중, 누구 하나 왕을 꿈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을 꺾고 왕좌를 찬탈하기 위해 칼을 가는 놈들이 천지였다.
그야말로 전사들의 성지임과 동시에 전사들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휴거에게 그런 전장의 지배자를 고꾸라트리라고 주문했다.
“크락타, 크락타……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언젠가 그와 자웅을 겨뤄 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지.”
휴거가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는 듯, 넘실넘실 흘러나온 기세가 내 피부를 찔러 왔다.
이럴 때 보면 역시 오크는 오크였다.
“왕과 싸워 이기면 네가 왕이 되는 것이고, 지면 죽는 거야.”
긴장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그에게 경고했다.
오크로드 크락타는 정말 괴물이다.
그 밑에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칼을 갈아 대는 오크들도 결코 얕볼 수 없다.
두 눈 시퍼렇게 뜬 바텐베르크의 압력이 없었다면, 아마 타이탄은 옛적에 북대륙을 피바다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취익! 오크들까지 호르의 신도로 만들 셈인가 보구려.”
눈치 빠른 휴거는 이미 내 속셈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탄은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너무나 탐스러웠다.
용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전사들의 나라.
그곳에 호르교가 득세하기만 한다면 내겐 천군만마를 등에 업은 것과 같을 것이다.
“언젠가 오크들의 힘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오크들은 성정이 거친 만큼 친해지기가 어렵지.”
휴거 너처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라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타이탄의 왕이 된다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
리오 성에선 인간과 엘프가 나름의 화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두 종족 간의 유대가 견고히 쌓이는 동안, 나는 오크와의 화합을 위한 발판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연결 고리는 호르교였고, 그 연결 고리를 채울 인물로는 휴거만 한 녀석이 없었다.
“췩! 이것 참, 호르께서 나를 왕의 길로 인도하시는구려. 그럼 따라야지.”
장난스레 두 손을 모은 휴거가 실실 웃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돌아오면 메리 소저도 나를 다시 봐줄지도 모르겠구려.”
“그건 왕이 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흰소리를 늘어놓는 휴거를 보고 있노라니, 언뜻 불안감이 솟았다.
“타이탄에 가자마자 왕한테 덤빌 생각은 아니겠지?”
“안 될 게 뭐 있소? 상대가 누구든 대가리가 쪼개지면 죽는 거요. 내 자비 없는 도끼 앞에 예외는 없지.”
호쾌한 대답에 이마를 짚었다.
그래.
대가리가 쪼개지면 다 죽지.
문제는 쪼개질 대가리가 상대의 것일지, 휴거의 것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 없이 덤볐다간 네가 죽어.”
휴거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왕은커녕 타이탄의 장군도 상대하기 벅차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의 휴거라면 말이다.
“네가 직접 가 보면 알 거야. 그곳에서 많은 걸 배우고, 많은 놈을 쓰러트리며 성장해라. 그 길의 끝에 왕위가 있다.”
휴거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탁월한 감각이 있다.
타이탄에서 충분한 연마를 거친다면, 이놈은 왕이 될 자질이 있었다.
이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휴거가 활짝 웃었다.
“흐, 나를 일말의 의심 없이 믿는 눈이구려.”
휴거는 내가 자기 보고 왕이 되라 한 것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일단 알아만 두라고.”
“취익, 알겠소.”
이놈이 당장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당장 타이탄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리오 성은 인력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파수꾼 노릇에 힘쓰기로 했다.
그가 떠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리오 성의 전력이 안정되고 난 후이리라.
◈ ◈ ◈
다음 날부터는 회의가 줄창 이어졌다.
수뇌부들이 열띤 얼굴로 의견을 주고받으니 공기가 금세 과열됐다.
“1세대와 2세대의 차이가 생각보다도 더욱 큽니다. 이 상태로 가다간 4세대부터는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겁니다!”
“동의하오. 머지않아 인근 영지들의 지원이 불가피한 상황이 올 것이오. 급박한 상황이 닥치기 전에 미리 전령을 보내는 편이 현명하다고 사료되오.”
아발트와 린느 가문의 가주가 주장을 펼쳤다.
“지원을 받는다 하여 만사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에 왕실 기사단장, 가스타인 백작이 맞섰다.
“이 역병 뒤에서 바렌의 정기를 다잡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오나, 인근 영지로부터 지원을 받는 건 바렌의 살을 파먹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는 리오 성이 아니라 바렌을 염려했다.
본디 전쟁이란 많은 물자와 비용, 인명 피해를 낳는 법이다.
전쟁에 투입되는 병력이 많을수록 그 부담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그 말인즉, 리오 성이 덩치를 키워 역병 괴물과 대치할수록 바렌의 기반이 휘청인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역병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옳습니다!”
가스타인 백작이 힘주어 말했다.
왕실의 기사단장으로서는 합리적인 주장이었다.
그때 연합의 수뇌부가 입을 열었다.
“무리하여 역병의 성을 무너트리는 것 또한 큰 피해를 야기할 것이오. 마법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쳐들어올 테고, 그치들이 입은 모든 피해를 우리에게 돌릴 테지!”
그야말로 도돌이표.
재차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회의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병력을 증원하는 것이 좋겠군요.”
사실, 아직은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다.
리오 성 이북의 영지들에는 호르교의 영향이 닿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답 없는 입씨름만 계속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성자님!”
가스타인 백작과 왕실 측 지휘관의 얼굴이 굳었다.
부디 이곳뿐이 아닌, 바렌이 당면한 상황을 헤아려 달라고 말했다.
“이미 충분히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바렌 곳곳에 호르교가 퍼져 나가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실 터.”
신안으로 보았던 트란티스 후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후작을 비롯한 왕실의 인사들이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상기했다.
“왕실은 호르교를 통해 위태로운 자국의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믿고, 이 역병을 막아 내기만 하면 됩니다.”
왕실을 믿어라.
가스타인 백작과 휘하의 지휘관들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기세를 한풀 꺾었다.
우리는 조금의 휴식을 취한 뒤 회의를 이어 나갔다.
지원 요청을 하기로 정해진 마당에, 더 이상의 의견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회의가 이어지는 와중,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 그 한 구석이 무척 시커멓다.
역병 괴물들이 들이닥칠 징조였다.
‘참 질리지도 않고 쳐들어온다.’
◈ ◈ ◈
앨런은 남쪽의 성자가 된 이후로 몹시 바쁘게 움직였다.
마르가르텐과 함께 마르크스의 본가로 향한 뒤, 가문에서 내로라하는 정예 마법사 200명을 꾸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가문의 자랑인 마갑병(魔鉀兵)도 500기를 이끌고 나섰다.
우르르-
장대한 행렬이 쭉 이어졌다.
마법사들의 로브에 새겨진 문장이 빛을 반사했다.
“마법 연합의 상황은?”
“각 왕국과 가문에서 몰려온 마법사만 총 8,000명. 연합의 주둔지 또한 요새화가 끝난 상태이오나, 괴물들의 저주가 결계를 갉아먹고 있다고 합니다.”
앨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보고를 올리던 마법사는 말을 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저주는 전염병과 흡사합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검게 썩어 들어간다고 합니다.”
“……역병인가.”
앨런은 일전에 들었던 거룩한 음성을 떠올렸다.
『마르크스의 정예를 꾸려, 역병이 창궐한 평야로 가거라.』
『붉은 병균들이 남쪽 땅을 침범치 못하도록 하여라.』
『그로 말미암아 나의 이름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리라.』
그저 떠올렸을 뿐일진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 번만이라도 더 계시를 받고 싶었고, 그 빛을 영접하고 싶었다.
앨런에게 이런 감정은 정말 낯선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미쳤나 보군.”
앨런이 얼굴을 쓸며,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런 와중에도 귓가엔 신의 음성이 간질거렸다.
『너에게 남쪽의 성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노라.』
남쪽의 성자.
이미 수백 번은 더 속으로 되뇌었던 칭호.
짝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앨런은 그날 이후로 신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는 스스로가 못마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으로부터 성자란 칭호를 부여받은 것이 참기 힘들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북쪽의 성자는 이미 호르교의 세를 왕성하게 펼쳤다더군.”
그때, 옆에서 웬 소년의 음성이 들렸다.
세계수, 마르가르텐의 정신체였다.
“벌써 왕국 하나가 호르교를 완전히 받아들였다던데.”
그 은근한 목소리에 앨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입 닥쳐.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냐.”
서슬 퍼런 기세에 마차 안의 공기가 떨렸다.
그럼에도 마르가르텐은 연신 앨런의 속을 긁어 댔다.
“호르께선 북쪽의 성자가 무척 어여쁘시겠지. 그리도 유능하니 말이야.”
으드득-
앨런이 이를 갈았다.
북쪽의 성자라는 칭호는 어느샌가 그의 역린이 되어 있었다.
아니, 이쯤 되면 연적(戀敵)이나 다름없었다.
“겨우 왕국 하나 갖고 무슨!”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소리치는 앨런을 보며 마르가르텐, 마르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버지. 이것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
아델가르텐의 뿌리를 통해 전해 받은 호르의 명령.
앨런 마르크스를 끊임없이 자극하라는 그 명령에, 마르는 착실히 따랐다.
하지만 영 꺼림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더 많은 신도를 포섭할 수 있다. 북쪽의 성자? 가당치도 않다! 내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성자다……!”
저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예로부터 악명이 자자하던, 마르크스 가문 특유의 미친 소유욕.
그 악랄한 성정이 제대로 도지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신이란 존재를 향해서.
채워질 수 없는 욕구가 집착을 불러왔다.
‘……내가 중간에서 잘 조율해야겠군. 당분간 이 이상 골려 주면 안 되겠어.’
자칫 잘못했다간 완전히 비뚤어져 버리는 수가 있었다.
북쪽의 성자와 남쪽의 성자.
리하르트가 바라는 것은 대립이 아닌 경쟁이었으니.
마르가 다시 한번 한숨을 삼켜 냈다.
어째 무척 어려운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