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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02화 (102/216)

102화. Episode. 33 들불처럼 번져 나가 (2)

타사르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고, 싱그러운 기운이 심장을 간질였다.

마치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맞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은 정원이었으니까.

“…….”

하지만 타사르를 비롯한 엘프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정원 속에 있건만, 어째선지 그들의 얼굴에서는 짙은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정말 이것이 맞는 일일까.

인간들을 믿어도 되는 걸까.

아델가르텐과 리하르트 앞에선 숨긴, 우려와 염려였다.

그래 봤자 뒤늦은 후회일 따름이었다.

타사르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녹색 마법진만이 처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옥체가 이 땅에 솟아났으니 아델가르텐이 정신체로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

지치고 지쳐 잔뜩 갈라진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께선 저희와 다른 종족 간의 화합을 바라시는 건지요.”

그 애달픈 목소리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에 초대받지 못한 난봉꾼들의 괴성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타사르와 엘프들은 가면을 착용하고, 그 위로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어찌 됐든 이제부터 이 땅은 정원이요, 위대한 어머니께서 거처하시는 성역이다.

“우리는 지키는 파수꾼이요, 가꾸는 정원사로다.”

못 미더운 인간들에게만 정원의 수호를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고된 작업으로 몸은 휴식을 외쳤지만,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성채 밖의 공기는 한창 과열된 채였다.

엘프들은 리오 성의 전 병력이 붙어 아우성거리고 있는 성벽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쏴라! 단 한 놈도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라!”

“성수를 쏟아!”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지휘관과 기사들, 그 명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

그 용맹하고 장대한 기세가 성벽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지금의 인간들은 정원을 지키는 파수꾼이었고, 성역을 침범한 적들을 처단하는 단두대였다.

그것이 바로 리오 성의 인간들이 짊어진 절반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슈슈슈슉-!

맹렬한 기세로 퍼부은 화살의 장막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진다.

사나운 빗줄기를 얻어맞은 역병 괴물들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비틀어 댔다.

성벽에 발톱을 박아 넣으려던 놈에겐 성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러자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고통 섞인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겁먹지 마! 우리가 이 성을 지킨다!”

“싹 다 죽여 버려!”

그리도 겁 많던 병사들마저, 제가 장군이라도 된 양 서로를 독려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그들의 용맹함은 높고, 견고했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프들은 말을 아꼈다. 저 인간들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나, 이를 애써 무시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간을 비롯한 타 종족들을 상대하며 쌓아 올린, 엘프들만의 업과 염일진대, 그것이 이제는 인간들에게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프들은 복잡한 심경을 억누른 채 성벽 위로 산개했다.

“호위를 붙여 주겠소!”

타사르와 엘프들을 발견한 지휘관 하나가 저 멀리서 소리쳤다.

그에 타사르는 성벽 너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파수꾼에게 어찌 파수꾼이 필요하겠는가.”

그 자그마한 독백은 전장의 소음에 묻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호위를 붙여 주려던 지휘관은 곧, 저들에게 호위는 필요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콰과광.

일시에 터져 나온 폭음이 전장을 뒤흔든다. 평소보다 배는 빠르고 강력한 마법들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많은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바로 엘프였으니.

그들은 지키는 파수꾼이고, 가꾸는 정원사다. 이 정원에서만큼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성역을 어지럽힌 자. 단죄를 피할 수 없으리라.”

평화를 사랑한다던 엘프들의 마법은 평화를 깨트린 난봉꾼들에겐 천벌과도 같았다.

뜨거운 불꽃이 땅을 휩쓸고, 벼락이 내리쳤다. 그 궤적에 걸린 괴물들 수십, 수백이 죽어 나갔다.

그리고 이 땅의 정원을 지키는 건 엘프뿐만이 아니었다.

“개문(開門)하라!”

불현듯 터져 나온 오르드 성주의 외침.

끼리릭.

무겁고 거대한 성문이 올라가기 시작하고.

모인 기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달뜬 몸을 들썩였다.

일부는 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드잡이질까지 할 정도였다.

“어허, 여긴 내 자리지. 어딜 넘봐!”

돌격대의 최선두를 차지하고 선 리하르트가 그러했고, 그를 흘겨보는 아발트가 그러했다.

곧 리오 성의 남문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쿠에엑-!”

괴성을 질러 대던 괴물들이 활짝 열린 성문을 향해 짓쳐 든다.

그 우악스러운 돌진에 기가 꺾일 법도 하건만, 놈들을 마주 보고 선 돌격대는 가만히 날붙이를 꼬나 쥘 뿐이었다.

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몸에 감도는 힘과 활력이 너무 풍요로웠고, 들불처럼 번져 나간 기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기사들이 뜨거운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키는 파수꾼이다.”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집중한 기사들의 귀에는 그 무엇보다 선명히 들렸다.

불굴의 의지가 담긴 그 목소리에 기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성문을 막 통과하려는 적들을 향해 돌격대가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걸음은 어느새 돌격이 되었고, 난봉꾼들을 몰아내는 질풍이 되었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괴물들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나갔다.

그 불결한 사체를 지르밟은 기사들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괴물이 성문으로 돌입했지만, 기사들을 넘지 못한 채 시체가 되고 말았다.

“돌격! 돌격하라!”

몸과 마음에 가속도가 붙은 기사들이 성문을 뛰쳐나와 적색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

쿵.

성문이 한 박자 늦게 닫혔다.

“키, 키에엑!”

압도적인 화력이 퍼부어지던 전장에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사들까지 투입되자, 붉은 난봉꾼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

성벽 위에서 마법을 쏟아붓던 타사르의 눈이 전장을 휘젓는 리하르트를 좇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까지.

저들이 내뿜는 기세에 성벽 위까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참 우스웠다.

그토록 거북스러워하던 인간들인데, 어찌하여 그들이 내뿜는 기세에 자신까지 달구어지는가.

타사르는 고개를 돌려 다른 동족들을 살폈다. 가면을 써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움찔거리는 손끝이 그 심정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          ◈          ◈

붉은 파도 사이를 기사들이 헤집었다.

칼로 베고, 창으로 꿰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역병의 진창을 헤엄치는 것과 같았지만, 육신이 검게 물든 이는 없었다.

정원의 가호.

세계수의 축복을 받는 이들의 몸에 역병 따위가 흉수를 뻗칠 자리는 남지 않았다.

서걱!

돌격대의 예봉이 된 리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하얗고 날카로운 백귀의 검신에 더러운 핏물이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그 피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백귀가 울음소리를 내었다.

평소 같았으면 불길하고 흉하다 하여 신앙으로 억눌렀을 테지만, 오늘은 도리어 그 울음소리를 부추겼다.

흉흉한 붉은빛의 광기가 검을 타고 넘실넘실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내 그 요사스런 기운이 커다랗게 솟구쳤다.

“죽여! 다 죽여!”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괴물들을 베어 내는 돌격대의 눈빛에 광망이 일었다. 거칠게 휘둘러지는 날붙이가 무척이나 사나웠다.

저 선두에서부터 일어난 광기가 돌격대의 후미까지 전부 집어삼킨 것이다.

전장에서 이성을 잃는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하나 이곳은 정원.

그 지독한 광기마저 용맹으로 치환될 뿐이니, 기사들은 미쳤으되 신념을 잃지 않았고, 사명을 잃지 않았다.

그저 더욱더 사력을 다해 정원을 지키고자 하였다.

“등불은 빛을 전해 주니!”

“그 곁에 선 우리도 등불이라!”

돌격대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그 웅혼한 포효는 성벽 위까지 닿아, 사내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어둠은 실낱같은 빛도 삼키지 못하고!”

“결국, 제 몸이 사그라들 뿐이더라!”

돌격대의 포효를 이어받은 병사와 기사들도 질 수 없다는 듯 힘껏 합창했다.

그 노래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어, 전장의 소음을 모두 뒤덮을 정도였다.

“와아아-!”

성유를 듬뿍 머금은 화살이 끝없이 쏟아진다. 대포의 포구가 쉬지 않고 불을 뿜고, 병사들의 창질에 힘이 실린다.

노랫말을 내뱉을수록 격앙되어 가는 기세는 마치 엘프들의 전승과 다를 게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전의가 불타오르며, 입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힘이 차올랐다.

“역시 놀라워.”

“이건…….”

그리고 그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쿵쿵.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에서 마나가 미친 듯 솟구쳤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정원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호르를 믿는 신도였다.

엘프들은 인간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두 종족 사이를 잇는 연결 고리.

그것이 유대감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엘프들에겐 껄끄럽고 또 껄끄러웠다.

하지만 우선은 정원을 침입한 난봉꾼들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복잡한 속내를 억누르며, 마법진을 그려 냈다.

◈          ◈          ◈

길었던 전투가 끝이 났다.

리오 성 앞을 가득 메운 붉은 시체들.

하나 성벽 위에는 그 어떤 시체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리오 성의 대승이었다.

후욱후욱.

거친 숨을 몰아쉰 사내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높은 하늘엔 성 전체를 아우르는 마법진이 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성채를 바라보았다.

웅장한 성채를 휘감고 오른 나무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신령스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새삼 승리의 포효를 지르며 유난을 떠는 이는 없다.

세계수를 응시하던 이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타사르를 비롯한 엘프들은 후드를 좀 더 깊이 끄집어 내렸다.

자신들을 향한 무수히 무수한 시선이 감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으음…….”

“아…….”

그렇게나 뜨거웠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리오 성에 어색한 기류만이 맴돌았다.

어색함과 정적을 깨고 오르드 성주가 입을 열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겠소. 그러기엔 그대들이 가진 원한과 역사가 너무나 짙고 참혹할 테지.”

오르드 성주는 저를 바라보는 엘프들과 눈을 마주쳤다. 애써 평온함을 가장한 눈빛들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엘프의 역사.

인간들로부터 저들이 얼마나 많은 침략과 수탈에 몸살을 앓았는지, 성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이 어떤 심정인지 또한 모를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리하르트에게 정원의 이주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땐 어찌나 믿기 힘들던지.

쓰디쓴 입맛에 침을 삼킨 성주가 말을 이었다.

“호르를 우러러 맹세하겠소. 우리는 이 정원을 반드시 지킬 것이며, 그대들과의 신의를 지킬 것이오.”

고맙다느니, 인간들을 대표해 사죄한다느니.

그런 것은 전부 필요 없다. 얄팍한 몇 마디 말로 어찌해 보기엔 저들의 상처가 너무 깊다.

그저 맹세하겠노라.

성주는 그리 말했다. 그것이 저들에게 가장 신뢰를 줄 수 있는 말이라고 믿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짧고 굵은 한마디만이 필요했다.

리오 성의 인간도, 엘프도.

챙!

연합의 기사들이 날붙이를 치켜들었다.

단단하게 피어난 기세가 마치 신념을 표하는 것 같았다.

“…….”

엘프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면 너머 흔들리던 눈빛이 성벽 밖을 향했다. 저 멀리서 돌격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호르께 맹세한다는 그 말. 잊지 말게나.”

터벅터벅 걸어오는 리하르트를 보며, 타사르는 그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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