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Episode. 32 정원을 가꾸는 (2)
승전 후 삼 일이 지났고 세 번의 회의가 있었다.
오늘도 종일 이어진 회의에 진이 다 빠져 버렸다.
맨날 똑같은 문제, 똑같은 논쟁, 그리고 똑같은 결말.
이놈의 회의란 이렇다 할 진척도 없으면서 시간만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끄어.”
지루함에 지친 몸을 막 일으키려 할 때, 오르드 성주가 나를 붙잡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태도에 뗐던 엉덩이를 도로 붙였다.
“왜 그러십니까?”
한데 그는 피곤한 사람을 붙잡아 놓고선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유야 뻔하다.
아닌 척 밍기적거리며 귀를 쫑긋 세운 지휘관들이 문제겠지.
“거 주책 맞게.”
“커흠!”
그 지휘관이란 것들은 나와 성주에게 면박을 받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났다.
곧 회의실에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이제 말해 보라는 뜻을 담아 성주를 응시했다.
“왕도 주변 영지로 호르교가 퍼지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런데 그 질문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난데없이 그게 왜 궁금하실까.
정말 순전히 호르교의 전도 경과가 궁금한 건 아닐 터.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알고 있었습니까?”
호르를 믿고 기도하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호르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
성주는 그것을 눈치챈 것이리라.
과연 내 생각이 맞았는지 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의 전투로 확신했습니다. 한창 언데드와 드잡이질 할 때와는 사뭇 다르더군요.”
리오 성 전역을 뒤덮을 만큼 커다란 빛.
그건 연합에게 숱한 고비를 안겨 주었던 언데드의 악몽 때에도 보여 주지 못한 저력이었다.
확실히 조금만 의구심을 가져도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명확했으니까.
“맞습니다. 왕도에 호르교가 퍼진 덕에 그분의 힘이 강해졌죠.”
나는 순순히 긍정을 표했다.
“왕도에선 전도사들을 추려 각지에 파견할 예정이더군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나는 내친김에 신안으로 살폈던 왕도의 상황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성주의 안색이 무척 밝아졌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그럼 갑니다.”
성주를 뒤로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곧장 방으로 향해 소파에 드러눕고 나니, 온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잠이라도 청하고 싶었지만, 늘어진 몸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온 대륙에 흉터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는 마왕의 마기.
그 흉흉한 것에 모두가 움츠린 지금, 대륙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이곳은 격동하고 있었다.
바렌은 교국(敎國)으로 서서히 변모하는 중이었고, 역병의 성은 흉성을 부풀리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연합의 패퇴라…….”
리치들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마법연합.
그들은 발테르 평야 중부에 위치했던 집결지를 남부로 물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폴린 성의 이상 사태를 조기에 관측한 마법사들이 급하게 세를 불리며 이리저리 방비를 굳혔다.
놈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언데드 전쟁 당시엔 손 놓고 구경만 하던 그치들이 이번엔 온갖 성의를 다해 경각심을 세웠다.
그러나 결국, 난생 처음 보는 역병 괴물들에게 패배.
괴물을 전부 죽이기는 하였으나, 역병 자체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전투의 경과를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신안에 비춰진 결과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뭐, 그 정도면 꽤 선방한 거지.”
상시 주둔하던 이천의 마법사 중 절반이 살아남았다.
그 절반 중 삼백은 살색이 검게 변하여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
바꿔 말하면, 나머지 칠백 명은 역병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대승을 거두고서도 죄 새까맣게 물들지 않았던가.
이는 기사보다 마법사들이 역병에 대처하기 수월하다는 의미였다.
툭, 툭-
소파 옆에 비치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앨런까지 그쪽에 합류하면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앨런은 곧 남쪽 엘프들의 정원, 마르가르텐에 도착한다.
그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곧장 마법연합으로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리오 성과 역병 성, 그리고 마법 연합의 구도가 상세히 그려졌다.
그러다 곧,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남대륙이 아님을 상기했다.
당장 내가 있는 이 땅이 제일 문제였다.
아닌 게 아니라, 기사와 병사들은 그 스스로 역병에 대비할 수단이 전무했다.
마법사처럼 결계를 펼칠 수도 없고, 신통방통한 마도구를 다루지도 않는다.
지혜롭기보다는 용맹하며, 준비하는 자라기보단 견뎌 내는 자라는 말이 더욱 어울리는 이들이다.
정말 검과 같다고 해야겠지.
모양이 변하지도 않으며, 쓰임이 변하지도 않는, 그저 무언가를 베어 낼 줄만 아는 검.
그렇기 때문에 아예 환경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리오 성의 검들에게 역병이라는 녹이 엉겨 붙지 않도록.
마치 칼날을 벼리는 대장간처럼,
◈ ◈ ◈
한가로이 성벽 위를 노닐며 병사들을 관찰했다.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놈도 있었고, 이리저리 물자를 옮겨 대는 놈도 있었다.
첫 전투가 일어난 것이 불과 며칠 전.
그때와 비교하자면 성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어 있었다.
음울했던 공기도 온데간데없고, 병사들의 면면에 짙게 깔려 있던 두려움 또한 보이지 않았다.
신을 향한 믿음이 저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천만의 신앙을 들이부은 효과는 과연 뛰어났다.
성의 병력 중 신도가 아닌 이가 없으니,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호, 호-르!”
“호르.”
경계를 서던 병사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대충 손을 휘저어 주며 성벽 위를 걸었다.
마주치는 병사들마다 밝게 인사를 해 왔다.
말단 병사부터 시작하여 연합의 수뇌부와 성주에 이르기까지, 호르의 기적에 기대를 걸지 않는 이가 없다.
그들은 그저 괴물을 상대할 궁리만 할 뿐, 역병 자체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딱 내가 바라던 바였다.
어차피 역병을 두려워한다 해도,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괜히 날만 무뎌질 뿐이지.
나는 고개를 돌려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역병을 불태우는 동시에 성 전역에 스며든 기적의 빛.
숱한 전투로 불모지가 되고 말았던 리오 성의 땅은, 천만의 신앙을 듬뿍 품어 비옥한 토지로 변모했다.
이 정도 텃밭이라면 정원사들이 정원을 가꾸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잠시 성을 둘러보다 이내 성벽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곧장 성채에 마련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영락하여 오십밖에 남지 않은 엘프들의 수장, 타사르가 예를 표했다.
그의 뒤편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엘프들이 보였다.
넓은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그들은 쉴 새 없이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어찌나 많은 마법진을 그려 냈는지, 특유의 풀내음이 진동을 했다.
“곧 틀이 완성될 겁니다.”
그려내는 족족 땅으로 꺼지는 마법진을 보고 있는데, 타사르가 옆에서 보고를 올렸다.
그의 음성엔 그 어떤 염려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제 감정을 숨긴 건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모든 건 위대한 어머니의 뜻이지요.”
내 생각을 짐작한 걸까.
타사르는 물어보지도 않은 답을 내놓았다.
“저희는 어머니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설령 너희들이 목숨보다 귀히 여기던 것이 상한다 해도 말인가.”
“당신께서 함께하실진대 그럴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델을 향할 때나 보이던 신뢰 가득한 시선.
인간 리하르트가 아닌 신 호르를 보는 눈이었다.
그것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다만 그 속내를 티내진 않았다.
“역병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저 경고의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서두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접은 타사르가 잰걸음을 옮겼다.
그를 뒤로하며 주변을 휘감은 마나의 유동을 느꼈다.
엘프들이 준비하고 있는 결계는 하나가 아니다.
가히 수백에 달하는 복잡한 수식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있었다.
혹여 그 정교한 구조가 어그러질까, 조심스레 움직여 방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아빠!”
녹빛 마법진이 그려진 방의 중심.
그 위에 아델이 있었다.
그 꼴이 마치 수술대 위에 누운 꼬맹이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표정이 왜 그래?”
내 얼굴을 본 그녀가 꺄륵 웃었다.
쯧, 차라리 이런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있지나 말지.
“정말 괜찮겠냐.”
“괜찮아. 그냥 이사 준비하는 건데 뭘.”
이사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역병을 이웃으로 둬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니, 이사도 아니다. 근사한 별장 하나 짓는 거야! 절반만 이쪽으로 오는 거니까.”
마법진 위에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주제에 천진난만한 모습은 여전했다.
나는 마법진 바로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비보다 피가 더 많이 내리는 곳이 여기야.”
계획은 순항 중에 있으나, 마음이 꼭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곳은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이니까.
병사들이 뜨거운 기름을 옮기다 엎을 수도 있고, 자칫하다 나무 어딘가에 불이 붙을 수도 있다.
정신없이 뛰어 대는 기사들의 군화에 치이는 일도 비일비재할 터다.
“괜찮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어리기만 한 여자애가 아니다.
세계수라는 드높은 격이었으며, 그런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의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세계의 근간을 어지러트리는 저 역병의 성을 경계하기 위하여.
악몽의 범람을 틀어막고 있는 바렌을 위하여.
아델은 제 본체의 절반을 이곳으로 옮기겠다 말했다.
내가 바텐베르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녀 또한 커다란 결심을 해 온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신앙으로나마 이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주는 일뿐이었다.
이 다음부턴 정원사인 엘프의 몫이었으니.
“너무 걱정 마. 저 아이들이 괜히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럴 리가.”
아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프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정원사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이 가꾸는 정원에 더러운 흙발을 들이민 자들은 파멸을 맞이했다.
적들에겐 끔찍한 던전이요, 아군에겐 축복을 내리는 요새였으니, 정원은 그 자체로 엘프들의 전승이나 다름없다.
결단코 쉽게 망가질 만큼 연약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리오 성은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거야!”
세계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자신감 넘치는 어조에 나 또한 피식 웃었다.
하기야.
누가 감히 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까.
요 손톱만 한 성에 신도 있고, 세계수도 있는데.
심지어는 한 종족의 전승과도 같은 정원까지 가꿔질 예정임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