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Episode. 31 역병의 습격 (1)
붉고 검은 죽음이 몰려온다.
줄곧 머릿속으로만 그려 내던,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병사들의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들이 꽉 부여잡은 날붙이의 끝은 연신 흔들렸고, 자세는 빈민가의 거렁뱅이처럼 위축된 채였다.
겁을 집어 먹은 건 왕실 기사단도 다르지 않았다.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날이 벼려졌던 그들에게 눈앞의 적들은 커다란 난제였다.
어딜 어떻게 공격해야 하고 어떻게 막아야 할까.
저 괴물들의 약점은 대체 무엇일까.
압도적인 공포로 굳어진 머리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왕실 기사단의 말단이 중얼거렸다.
“이봐!”
옆에 있던 기사가 굳은 얼굴로 말단에게 주의를 줬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 중얼거림은 병사들의 귀에 틀어박힌 뒤였다.
리오 성의 사기가 폭삭 내려앉았다.
급기야 심약한 병사들이 하나둘 울부짖기 시작했다.
괴물은 아직 저 멀리 있는데, 놈들이 몰고 온 공포는 한참 전에 성을 집어삼켰다.
“으, 으으……!”
창을 꼬나 쥔 한스까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질끈 감은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호르시여!”
절로 올리게 되는 기도.
저 괴물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겁에 질린 한스의 염원은 그저 염원으로만 끝났다.
놈들을 저지해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리오 성의 임무였다.
그워어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괴물들의 포효에 왕실에서 엄선된 기사들조차 몸을 구부렸다.
이건 못 막는다, 리오 성은 함락될 것이다- 따위의 절망이 좌중을 압도했다.
쿵.
그때 작은 발구름이 성벽을 진동시켰다.
“등불은 빛을 전해 주니.”
뒤를 이은 누군가의 나직한 읊조림.
그 안에 묘한 열기가 가득했다.
“그 곁에 선 우리도 등불이라.”
이름 모를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읊조림을 받아 냈다.
겁에 질려 떨던 한스는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이미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기사와 함께 서 있는 청년.
그의 주변에 도열한 기사들이 날붙이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어둠은 실낱같은 빛도 삼키지 못하고!”
처음의 읊조림은 어느새 외침이 되었고.
“결국은 제 몸이 사그라들 뿐이더라!”
그건 곧 포효가 되어 성벽 위를 두드렸다.
불에 덴 듯 치솟는 기이한 감정에 한스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으로 전투 준비를 하던 왕실의 병력 모두 어안이 벙벙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왕실 기사가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리하르트의 몸에서 피어난 빛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뒤이어 성벽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검에서 성스러운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리오 성을 지킨다!”
그들의 단단한 눈빛과 다부진 기세는 적들을 향해 있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각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아…….”
한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럽게 용기라도 샘솟은 것일까.
창을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가, 창대가 우그러질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아니,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우리가 지키자!”
그의 외침이 시발점이었다.
“저 더러운 것들을 성벽 뒤로 보내지 마! 다 죽여!”
“씨발, 못 막으면 우리 가족들도 위험하다고!”
“와 보라 그래! 내가 이 칼로 대가릴 쪼개 주겠어!’
연신 터져 나오는 악에 받친 음성들.
겁먹었던 이들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용맹한 사내들만이 이곳에 남았다.
리오 성의 사기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 ◈ ◈
흙먼지를 매달고 달려오던 괴물의 선두가 울부짖었다.
놈들은 제 눈앞에 들어온 성을 한 끼 식사거리로 여기기라도 하는 것인지, 누런 침을 질질 흘려 댔다.
그러나 그 한 끼 식사거리가 제법 뾰족한 가시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쏴라!”
지휘관의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궁병들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시위가 튕겨졌다.
쐐애애액!
하늘을 뒤덮은 화살비가 성유의 윤기에 반짝였다.
그러다가 이내, 화살이 괴물의 살가죽에 파묻혔다.
푹, 푸푹-!
살이 틀어박힌 붉고 역겨운 몸덩이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쏴, 계속 쏴!”
성유의 효과가 있음을 확인한 지휘관들이 눈을 부릅뜨곤 외쳤다.
화살은 많고, 궁병의 손가락은 튼튼했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화살비에 적들은 마치 고슴도치라도 된 것 같았다.
“취이익!”
간만에 일어난 전투의 현장에 휴거가 엉덩일 들썩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리하르트를 바라봤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깃든 갈급함은 어서 돌격하자는 의미였다.
“아직은 안 돼.”
리하르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론 전장의 판도를 살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가면 쓴 엘프들의 찬양이 성벽 뒤편에서 흘러나왔다.
그 아름다운 가락에 시위를 당기는 궁병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다 죽여!”
“우리가 지켜 줄 테니까 전부 쏴 재끼라고!”
날붙이를 쥔 병사들이 궁병을 독려하며 괴물 떼를 노려보았다.
무척이나 기세등등한 그 모습이 조금 전까지 신음하던 병사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왕실 기사단! 전원 전투 준비!”
“바렌을 위하여! 착검!”
“착검!”
왕실의 기사들도 달아오른 얼굴로 검을 쥐었다.
두려움을 벗은 그들은 연합의 기세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비로소 리오 성은 전투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다.
“허…….”
기드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바텐베르크의 전대 제3기사단장으로서 격렬한 전장을 수없이 진두지휘해 왔다.
그런 그도, 이런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겁에 질려 떨던 이들이 한순간에 돌변해, 사자같이 용맹한 군단이 되어 버리는 놀라운 광경을 말이다.
노기사의 떨리는 시선이 리하르트를 향했다.
가벼운 발구름으로 이렇게나 큰 변화를 만들어 내다니.
리하르트가 바텐베르크를 미련 없이 떠난 이유, 그것은 그가 이미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기드는 그 사실을 이제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포 조준!”
돌연 성주가 벼락처럼 외쳤다.
끼리릭-
포병들이 대포의 머리를 괴물들을 향해 겨눴다.
“크워어억!”
화살비를 헤치고 지척까지 다가온 괴물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쳐 댔다.
앞을 가로막은 성벽을 기어오를 심산인지 날을 세운 발톱이 번뜩였다.
“발사하라!”
쾅! 콰앙!
열댓 개의 대포가 신호에 따라 일제히 철구를 토해 냈다.
굉음과 함께 쏘아진 무쇠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다 괴물들 사이로 틀어박혔다.
콰직-! 콰지직!
더러운 살점이 뭉개지고 더러운 피가 흩뿌려졌다.
터져 나간 괴물의 위를 몸 성한 괴물들이 짓밟고 달려들었다.
기어코 놈들이 성벽에 닿아, 우악스러운 발톱을 박아 넣곤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투석!”
“돌 가져와!”
두셋씩 짝을 지은 병사들이 큼지막한 바위를 성벽 밖으로 밀어붙였다.
이내 성벽에서 뚝 떨어진 바위가 아득바득 기어오르던 괴물들을 떨궈 냈다.
쿵! 쿠웅!
신앙을 품은 돌, 성석(聖石)에 짓뭉개진 놈들에게서 치이익- 하고 고기 굽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리오 성은 괴물 수십을 떨어트렸다.
한데 적들은 아직 눈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화살로도, 대포와 투석으로도 막을 수 없는 역병의 돌격.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였다.
“키에에엑!”
성벽 위로 빼꼼히 내밀어진 괴물의 대가리에 날카로운 철검이 틀어박혔다.
잘려 나간 대가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으윽!”
역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울렁이는 속을 참은 왕실 기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 으아악!”
병사가 내지른 창은 어설펐고, 성벽을 오른 괴물의 집념은 강했다.
발을 딛고 선 성벽 위에 아군의 피와 살점이 덧칠되었다.
수십의 송곳니에 갈가리 찢겨 나간 병사의 시체가 역병에 취해 검게 물들어 갔다.
“정신 똑바로 차려!”
템플나이츠와 무가 연합의 외침이 쉴 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절묘하고 능숙한 솜씨로 괴물을 참하곤 눈을 이리저리 굴려 성자를 찾았다.
역병 품은 피가 허공을 수놓는 지옥의 한가운데, 그곳에 리하르트가 있었다.
서걱!
리하르트는 신성력이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검을 휘두르며 성벽을 휘젓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어수룩한 병사들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나갔다.
“창 하나 제대로 못 찌르나? 얼 빠져 있을 거면 여기서 내려가!”
“히, 힉! 죄송합니다!”
서슬 퍼런 구박을 받은 병사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날아든 발길질에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쿵.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괴물의 목이 떨어졌다.
“전장에선 적에게 눈을 떼지 마라.”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이렇듯 병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병사들은 너무나 어수룩했다.
피해가 늘어만 갔다.
‘이럴 줄 알고 빡세게 훈련을 시켰건만.’
병사들이 당당히 한 사람 몫을 해내기엔 그 경험치가 턱없이 부족했다.
들끓던 기세는 어디로 갔고, 성을 지키겠단 사명은 어디로 갔는가.
도리어 발목만 붙잡는 병사들 탓에 기사들만 더욱 바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쯧.”
역병 전쟁의 첫 전투.
리하르트와 연합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 끔찍한 전쟁에서 왕실의 병력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기사는 그럭저럭 쓸 만하나 병사는 실망스럽다.
그게 리하르트의 평가였다.
열심히 사기를 북돋아 주면 무얼 할까.
제 눈앞에 괴물이 다가오면 바짝 움츠러드니 싸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판단을 마친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델-!”
신앙 섞인 고함이 우레같이 터져 나왔다.
그게 신호였을까.
성채 방향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마법이라는 기적의 전조 현상.
엘프들이 마나로 그려 낸 마법진이 제각각 불꽃과 얼음을 쏟아 냈다.
콰아앙-!
그것들은 성벽 너머 모여든 괴물들에게 직격하며 전장을 뒤흔들었다.
“무슨!”
“누가 마법을……?”
갑작스런 마법에 왕실 병력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는 사이에도, 성 곳곳에서 커다란 나무가 솟아올라 녹색 빛을 흩뿌렸다.
그 충만한 생명의 빛에 지친 몸들이 활기를 되찾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왕실 기사들이 서로 눈을 맞췄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왕실 기사단의 저력을 보여 주자고.
안타깝게도 지금만큼은 헛된 결의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진작에 정해져 있었다.
“템플나이츠!”
비명과 죽음이 뒤섞인 성벽 위.
그 끄트머리에 오롯이 선 리하르트의 외침에 이백의 기사들이 저마다 답했다.
누구는 괴물의 목을 베는 것으로, 또 누구는 성스러운 빛을 단검에 싣는 것으로 답했다.
리하르트가 성주와 눈을 맞추었다.
찰나의 순간에 많은 뜻이 오갔다.
“템플나이츠 제1기사단! 집결하였습니다!”
그사이 템플나이츠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벌써 괴물 수십을 벤 것인지 역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얼른 가자고, 리하르트!”
모리츠가 흥분에 겨워 소리쳤다.
그가 쥔 한 쌍의 단검엔 신성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제 아비로부터 받은 무구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취이익! 이제 뜸은 그만 들이고!”
기다리다 못한 휴거가 채근했다.
기사들도 달아오른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크의 달뜬 감정을 공유받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느덧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고, 리하르트의 입꼬리도 호선을 그렸다.
“가자.”
그들이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