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Episode. 30 칼고스의 역병 (3)
리오 성은 다가오는 전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성이 한 눈에 보이는 성벽 위에 걸터앉아 내 상태를 점검했다.
“상태창.”
[호르] [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2]
□ 신도 수 - 4,512 □ 신앙 - 22,502,754
□ 권능 - [신도 임명] [기도 받기] [신안] [계시]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42/50 [최하급 성기사] 30/30 [최하급 사제] 20/20
[하급 전도사] 0/5 [하급 성기사] 0/3 [하급 사제] 0/2
이천이백만 신앙.
얼마 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숫자가 적혀 있는 상태창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사업에 성공한 수완가처럼 느껴졌다.
그럼 이 상태창은 통장이라 해야 하려나.
“나쁘지 않네.”
바렌 왕도의 인구가 대략 삼만 명이라 했던가.
그들이 올리는 간절한 기도는 내게 차곡차곡 쌓여, 이천만이라는 커다란 숫자를 기록했다.
그중에서 신도가 되는 이도 제법 생겨났다.
물론 그건 리오 성의 사내들도 마찬가지라, 새로 투입된 병력 중 몇몇이 신도가 된 참이었다.
“신안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요즘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신안의 효율성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하나하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신도로 만들 수 있었다.
만약 이 능력이 없었다면 신도가 될 이를 찾는 것도 큰 고역이었을 것이다.
전도사와 같은 직위는 자격만 갖추면 자동으로 부여되는 터라, 트란티스 후작을 제외한 나머지 귀족도 전도사가 되는 경사도 일어났다.
그렇게 오늘 날 하루마다 들어오는 신앙은 대략 일백만 전후.
역병과의 전쟁을 위해 이곳저곳에 수백만 신앙을 사용했건만, 아직도 많은 양이 남아 있었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신앙을 얻을 수 있겠지.
왕도의 믿음이 확실하게 굳은 뒤엔 타 영지로 전해질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호르가 우리 안에 있고, 성자가 너희 곁에 있도다!”
익숙한 음성들이 귓가를 때렸다.
고개를 돌려 성 쪽을 바라보니, 템플나이츠의 기사들이 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전투를 앞둔 병력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며, 아론이 건의한 행사였다.
그렇게 리오 성의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이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악취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생각보다 떨리지 않네.”
“너무 떨려서 못 느끼는 거 같은데, 지금 너 다리 엄청 떨고 있거든?”
무거운 긴장감이 성을 짓누른다.
역병이란 괴물의 습격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코앞으로 다가온 불안감에 제대로 잠도 못 드는 이들이 늘어만 갔다.
“쯧.”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병사들을 보고 있자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직 싸워 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이들의 얼굴이라니.
병사라고 해서 그들이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저마다 맡은 역할만 훌륭히 해 준다면 삼천의 기사 부럽지 않은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 터였다.
“일단은 내버려 두시지요. 원래 첫 격전이란 게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두렵기 마련이잖습니까.”
“쟤들이 어디 실전을 치러 보았겠습니까. 시설 좋은 연무장에서 훈련이나 했지.”
그런 나를 본 연합의 기사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꼭 산전수전 다 겪은 대선배처럼 거들먹거리는 태도라 나도 웃음이 터졌다.
“이상하네. 몇 달 전엔 너희도 똑같았던 것 같은데. 레오 경이 흰머리가 다 났다더라. 쫄보들 데리고 전쟁을 치러야 했다고.”
“아악!”
“아, 성자님!”
내 말에 기사들이 얼굴을 붉혔다.
이만하면 완전히 베테랑 아니냐며 오히려 뻔뻔스레 나오기도 했다.
“그래. 이제는 베테랑이긴 하지.”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연합의 기사와 왕실의 병력은 굳이 갑옷에 새긴 문장을 보지 않아도 구분이 될 정도로 차이가 심했다.
언데드와의 전쟁을 치렀던 사내들은 기세부터가 다부지고 억셌다.
곧 시작될 전투에 대한 긴장감은 있을지언정 두렵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었으니, 정말 베테랑의 그것처럼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너희도 방심은 금물이야.”
난 베테랑들에게 경고해 주었다.
역병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라고.
“군단장 칼고스, 그놈을 봤으니까 알 텐데.”
반신만 달랑 균열을 빠져나온 우스꽝스런 모양새였으나, 놈이 내뿜던 위압감은 그렇지 않았다.
발락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니 적어도 바렌 왕국은 그 날 최후의 역사를 써 내려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리하르트’가 되어 몇 번이고 느낀 점이 있다면, 방심이야말로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설마 싶으면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고, 괜찮겠지 싶으면 절대 괜찮지가 않다.
흔히 보았던 대사, ‘죽었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는 남이 방심하는 것만 보아도 내 심장이 다 옥죄여져 올 정도였으니.
“우리가 상대해야 할 괴물은 그때 그 빨갱이 새끼가 내린 저주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리치나 언데드 따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내 경고를 듣고 나서야 베테랑들이 얼굴을 빳빳하게 굳혔다.
그렇다고 두려워하진 않는 모습이었다.
딱 좋은, 적당한 긴장감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바렌 왕실이 이 모습을 보아야 할 텐데.
꽤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취이익! 악취가 다가오고 있구려!”
언제 내 옆에 온 건지 휴거가 성벽 너머를 바라보며 코를 벌름거렸다.
붉고 거친 오크의 살가죽 위로 꿈틀거리는 핏줄이 그의 달뜬 심정을 대변했다.
“췩, 대단한 인간 전사!”
그가 나를 불렀다.
그러곤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젠 하다 하다 역병과도 싸워 보는구려. 이건 오크 역사상 처음일 것이오! 어디에 도끼질을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 자식, 설마.
“흐흐, 나도 막막하긴 하지만 역병 놈도 마찬가지일 거요. 난 잔병치레 따윈 해 본 적도 없는 건강한 오크이니! 췩!”
성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먹을 휙휙 휘두르는 모양새가 몹시도 멍청해 보였다.
아니, 이놈은 정말 멍청했다.
한숨을 참으며 친절히 설명을 해 주려 할 때였다.
“역병이라 해서 진짜 역병 그 자체일 리가 없잖아, 이 멍청아!”
누군가가 내가 할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어떤 이쁜인가 하니 모리츠였다.
퉤.
성벽 밖으로 침을 뱉었다.
“하하, 아무튼 정찰대가 평원 부근에 자리 잡았습니다. 무언가 낌새가 느껴지면 돌아오라 했으니 성자님께선 쉬고 계시지요.”
“쉴 수가 있어야 말이지.”
기사의 말에 대꾸하며 벽에 몸을 기댔다.
부랴부랴 증축을 완성하겠다고 망치질 소리가 끊이질 않고, 템플나이츠가 외치는 호르 찬양이 매 시간마다 들려온다.
그뿐이랴.
내가 지시하긴 했다만, 워낙에 빡센 훈련에 치이는 사내들의 곡소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쓰읍…….”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날 쉴 수 없게 건드려 대는 건, 휴거의 말대로 가까워지는 악취였다.
◈ ◈ ◈
어제보다 오늘이 더 검었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검을 것이다.
이제는 그 현상이 익숙해질 때였다.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리오 성을 뒤흔들었다.
늦은 밤에도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던 병력이 몸을 굳혔다.
성의 공기가 요동을 쳤다.
“무슨 일인가!”
계단도 안 타고 단번에 성벽 위로 훌쩍 뛰어오른 오르드 백작이 물었다.
그의 뒤로 성의 주요 인사와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벽 위에서 살다시피 한 내가 대신 답해 주었다.
그 말에 수뇌부들이 성벽에 바짝 달라붙었다.
삐이이이이-!
저 멀리 점만 한 무언가가 하늘 위로 솟구치며 시끄럽게 울었다.
효시(嚆矢)였다.
뿌우, 뿌우우우-!
리오 성이 뿔 나팔을 불어 그 울음에 답했다.
나는 신성력을 일으켰다.
너무 멀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효시를 쏘아 올린 건 정찰대였다.
평원 곳곳에 진을 쳤다던 그들이 달랑 몸만 말에 태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신앙을 듬뿍 담아 준 휘장도 챙기지 못한 모습이었다.
정찰의 임무를 받았던 기사의 다급한 표정과, 정찰병들의 겁에 질린 몸부림.
무언가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듯했다.
흩어져 있던 다섯 개 부대가 이쪽으로 오며 한데 뭉쳤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란 걸 확신한 듯, 더욱 뻣뻣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찼다.
“성문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나는 오르드 백작에게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 명령이 떨어졌다.
끼익, 끼이익-
커다란 소음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일 분이 한 시간 같은 기다림이 지나고, 곧 정찰대가 성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오고, 오고 있습니다! 붉은 괴물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는 중입니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미처 다 파악하진 못했으나…… 최, 최소 이천 두!”
“놈들의 접근 속도가 엄청납니다!”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잊은 듯, 정찰대가 급박하게 보고를 올렸다.
쿵.
한 박자 늦게 성문이 닫혔다.
정찰대의 보고를 들으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괴물들이 지척까지 와 있다는 건 이미 신안으로 살핀 덕에 알고 있었다.
입이 근질거렸다.
정찰대가 본 괴물은 선발대일 뿐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나서 조금 더 빨리 다가온 게 이천 두일 뿐, 역병의 성이 게워 낸 병균은 그게 다가 아니다.
나는 좌중을 힐끔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작 이천에 사색이 된 이들이 태반이다.
여기서 그건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하는 건 사기를 뭉텅이로 깎는 짓밖에 안 됐다.
“저기 보이는군.”
강화된 시야의 끄트머리에 붉은 것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저, 전투 배치!”
“전 병력, 제자리에 위치하라!”
지휘관들의 고함이 뒤늦게 울려 퍼졌다.
요동치는 공기와 요동치는 병력들 사이, 기드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뭐를?”
그가 머뭇거리는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갑자기 왜 이럴까 하다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걱정되는 거겠지.
전투 중에 몸이 상하지는 않을까.
새 군주를 섬기듯 하라 했어도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알긴 하는 걸까.
“리오 성은 땅따먹기로 지킨 게 아니야.”
고되고 끔찍하기론 언데드 전쟁 때가 더 심했다.
그때의 난 최하급 신격이었고, 신앙마저도 넘쳐 나지가 않았다.
믿지 않는 놈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사정이 좋은가.
신격도 상승했고, 신자와 신도도 눈덩이 불어나듯 늘었다.
또 제법 좋은 무구들도 얻었다.
이렇게나 든든할 수가 없었다.
“기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 줄게.”
내가 바텐베르크를 별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쿵.
발을 굴렀다.
“등불은 빛을 전해 주니.”
“그 곁에 선 우리도 등불이라.”
나와 함께 성을 지켰던 기사들이 날붙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어둠은 실낱같은 빛도 삼키지 못하고!”
그들이 내뱉는 가락에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결국은 제 몸이 사그라들 뿐이더라!”
내 몸에서 빛이 번쩍 치솟았다.
서른의 성기사들에게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괴물들이 몰고 오던 마기가 흠칫 놀라 성을 침범하지 못했다.
난 고개를 돌려 기드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이만하면 답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