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93화 (93/216)

93화. Episode. 30 칼고스의 역병 (2)

리하르트의 존재는 리오 성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 주었다.

눈에 띄게 밝아진 연합의 기사들부터 시작해, 아직 그의 진면모를 보지 못한 왕실 병력까지도 큰 안도감을 내비쳤다.

가문에서 나왔다는 전대미문의 발언을 내뱉기는 했다지만, 그 핏줄을 이어받은 고귀한 혈통은 무릇 칼 쥔 사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음…….”

리하르트도 이를 알고 있었다.

리오 성에 도착한지 오늘로 사흘, 그동안 그가 가는 곳마다 존경 어린 시선들이 줄줄이 쫓아왔다.

리하르트는 그게 퍽 거슬렸다.

“내가 여기서 좀 눈에 띄긴 하겠지만.”

짙어진 어둠 속 등불이라고 어떤 병사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리하르트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존경이 괴물의 이빨을 막아 주는 건 아니지.”

이에 아발트가 리하르트의 말을 받았다.

“단단히 굴리겠습니다.”

“걸레가 되도록 굴려.”

연합의 신뢰를 받는 리하르트의 영향력은 무척이나 강했다.

기승을 부리는 마기에 중단되었던 훈련을 곧바로 다시 시작할 정도로 말이다.

“어, 어어…….”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엘리트라던 기사, 병사 할 것 없이 왕실의 샌님들 모두 성 밖으로 내쫓겼다.

이게 갑자기 뭔 일인가 싶은 차에, 그들 앞에 연합의 기사가 나타났다.

“뛰어! 악!”

헬가의 지휘관, 아발트.

그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소리를 질렀다.

그 살벌한 기세가 흡사 마인 같았던 터라, 내쫓긴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훈련에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자아아앙!”

땅을 박차는 걸음 걸음에 마기가 한 뭉텅이로 달라붙는다.

‘성벽 뒤에서는 누구나 용감해진다’는 격언의 반면교사처럼, 성의 보호에서 벗어난 사내들은 공포에 빠졌다.

자존심 강한 왕실 기사들도 딱딱 부딪쳐 대는 턱을 멈출 순 없었다.

악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괴롭히는 게 아니란 건 모두들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태로 곧 다가올 전투에 임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자명했다.

창을 쥔 자는 제대로 뻗지도 못할 것이고, 검을 쥔 자는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겠지.

하지만…….

“빌어먹을!”

당장에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사내들에겐 내일의 일까지 생각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훈련이 중단되었던 며칠간 더욱 새까매져 버린 마기가 몸에 엉겨 붙어 왔다.

이쯤 되면 숨만 쉬어도 폐가 썩을 것 같았다.

자연스레 원망의 화살이 리하르트를 향했다.

이 모든 게 그의 지시란 건 뻔했으니까.

자기는 빛으로 온몸을 꽁꽁 싸맸으면서 자신들에게만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며, 마기에 내몰린 사내들이 마음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존경의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질렸다는 기색만 남은 채로.

“왜들 그래, 이게 다 우리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잖아.”

단 한 명, 한스만 빼고.

그는 폐급 병사라는 오명에 어울리지 않게, 훅훅 규칙적인 호흡을 유지하며 뜀박질을 이어 나갔다.

◈          ◈          ◈

“음, 잘 굴리네.”

나는 성벽 위에서 훈련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찬송가를 부르며 실컷 땅에 구르게 하기도 하고, 저 멀리 보이는 언덕까지 뜀박질을 시키기도 하고.

특히나 뒤처지는 놈에겐 고함과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두려워하거나 힘들어 하는 이에겐 더욱 엄하게.

잘 견디는 이에겐 은근한 칭찬을.

그야말로 강자존의 훈련 방식이었다.

아발트가 교관 일에 소질이 있다고 하더니만, 과연 그게 허언이 아니다 싶었다.

“오! 저놈, 병사 아니야? 왜 저리 잘 뛰어?”

그때 내 눈에 보인 건 새까만 훈련복을 입은 기사들 틈바구니에 섞인 어수룩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훈련복은 병사의 것이었다.

역시나 병사답게 금방 한계에 달해 숨을 헉헉대고는 있었지만, 얼굴에 깃든 마기의 두려움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한스군요. 보직은 창병입니다. 데려올까요?”

“아냐, 됐어.”

내 옆에 서 있던 연합의 말단 기사가 그의 정보를 줄줄 읊었다.

들어보니, 내가 오기 전까진 완전 폐급이었단다.

매일 밤 우는소리로 동료들의 사기를 깎아 먹는 게 주특기라고.

“그래서 그의 처우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차였습니다만.”

“쟤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일단 지켜보자고.”

나는 한스란 병사를 눈여겨보기로 했다.

그가 마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흥미가 갔다.

“저, 도련님.”

“성자야.”

으음-

한스의 정보를 읊어 주었던 말단 기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 답답한 모습에 왜 그러냐 물어보았다.

“정말 바텐베르크를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니까? 우린 이제 템플나이츠라고.”

조만간 이 빈 가슴에 무늬도 새겨 넣을 거라고 흉갑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그럼에도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서 있었다.

뭐가 그리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혹시…… 저희 때문은 아니신지요.”

“뭐?”

그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내게 시선이 모였다.

주변의 기사들이 아닌 척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가 신경 쓰이셔서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쫑긋. 쫑긋.

기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다른 이들의 귀가 움찔거렸다.

“참 나.”

우리가 가문을 나선 이유는 호르교 때문이라 분명하게 말했을 텐데.

“으음…….”

꼭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모양새라, 무어라 딱 잘라 말하기에도 애매해졌다.

심지어는 다른 기사들도 무언가 기대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

“네 마음대로 생각해.”

뭐, 이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제멋대로 눈물을 글썽이는 기사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성벽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성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많이 변했듯, 리오 성의 모습도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어느 정도 증축이 완성되어가는 성이 그러했고, 낯선 얼굴들이 바글바글한 것이 그러했다.

여기를 떠나고 대충 삼 개월쯤 되었던가.

신안으로 틈틈이 살펴보았어도 역시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게 신선한 느낌을 안겨다 주었다.

템플나이츠도 변한 리오 성을 보며 적잖게 놀랐다.

물론, 연합도 우리를 보고 더 놀랐지만 말이다.

호르교의 교리라던가, 왕도의 상황이라던가.

“호-르!”

“호-르.”

이상한 부분엔 또 적응이 빠른 기사의 인사를 받아 주며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곧바로 신안을 사용했다.

내 상황이 변했고 리오 성도 변했다지만,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건 단연코 폴린 성이라 할 수 있었다.

꾸득, 꾸드득-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도 악취가 나는 것 같은 역병의 성이 보였다.

붉은 살점이 엉켜 하늘 높이 치솟은 모양새는 언뜻 보기엔 거인의 팔 같기도 했다.

나는 왕도를 떠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폴린 성을 살폈다.

모체가 완성된 후,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를 역병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쩐지 오늘따라 불길한 직감이 찌르르 울더라니.

그 이유가 마침내 나타났다.

꽈득-

성이 몸을 비틀었다.

터질듯 부풀어 오른 살점을 뚫고 무언가가 대가리를 내밀었다.

역병거인 칼고스의 사념을 이어받은 자식이자 보균자(保菌者).

드디어 그 지독스런 괴물들의 창궐이 시작된 것이다.

“크에에엑!”

붉디붉은 몸에 각기 다른 외형의 괴물들이 서로를 보며 아귀처럼 입을 딱딱거린다.

텅 빈 자아에 남은 건 역병을 전염시키겠다는 본능뿐.

‘원래는 터지지 말았어야 할 사건.’

본래 군단장은 북대륙과 남대륙의 전쟁이 격화될 때쯤에서야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지금은 군단장 중 일각인 칼고스의 저주가 열매를 맺은 상태였다.

역병은 언데드보다도 질긴 녀석들이니만큼, 이 전쟁이 또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끔찍한 괴물들의 진군을 보다가 이내 신안을 해제했다.

◈          ◈          ◈

눈에 띈 기사 한 명을 붙잡고 소집 요청을 보냈다.

회의실에 먼저 가 자리를 잡으니 이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역병이 시작됐습니다.”

“……!”

내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호출을 받고 모여든 수뇌부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놈들을 상대하는 데 주의해야 할 점은 언데드와 비슷합니다. 다만 더 끔찍할 뿐이죠.”

그들에게 내가 아는 최대한의 정보를 풀었다.

병균에 감염되지 않게 방비를 해야 한다는 것부터, 이 재앙이 쉬이 끝나지 않을 거란 것까지.

“정찰대 다섯 개 부대를 운용해 괴물의 습격을 대비하겠습니다.”

“저번 종전에서 사용한 성유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전 병력에게 정비를 명하도록 하지요.”

“성의 증축은 이제 일주일이면 마무리됩니다.”

항상 지지부진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포탄과 투석은 전투 경과를 지켜보며 투입해야 하오. 수가 그리 넉넉하진 않소.”

“적들이 얼마나 몰려올지 모르니, 언제든 지원 요청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유능한 지휘관들이 앞다투어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뒷전으로 물러나 그들의 회의를 구경했다.

이전엔 바텐베르크 전권 대리인이었다지만, 지금은 한 종교의 수장일 뿐이니 회의를 주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성자님. 전쟁 물자에 빛을 보급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다만 이들이 내게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컸다.

언데드이던 역병이던, 빛이 유일한 대항마란 것을 연합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난 그 요청에 따라 필요한 곳에 빛을 나눠 주겠다 약조했다.

“그럼 훈련은 어찌하지요?”

“성자께서 계시니 일단은 일정을 유지하지.”

이제는 성주가 된 오르드 백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폴린 성과 리오 성의 거리는 꽤 멀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마기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리 어리바리한 겁쟁이들이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자님께서 오시자마자 전투라니. 은근 사건 사고를 몰고다니십니다.”

“어쭈.”

얼추 회의가 끝나갈 때, 아발트가 실실 웃으며 농을 건넸다.

“내가 타이밍 맞춰서 온 거거든. 니들이 벌벌 떠는 꼴 보기 싫어서 말이야.”

“저흰 하나도 안 떨었지 말입니다. 샌님들이 문제죠. 특히 병사들은 죽으러 온 것처럼 죽을상을 하고 다닙니다.”

샌님들이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내가 지켜본 바론 그 녀석들은 아직 거친 맛이 없었다.

입으론 호르를 부르짖지만 마음속엔 절망과 공포가 더 컸다.

“전투를 한번이라도 겪고 나면 달라지겠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어둠이 혀를 날름거리며 성을 침범하려 들고 있었다.

머지않아 끔찍한 병의 보균자들이 저 어둠을 헤치고 달려들 것이다.

그 더러운 몸을 타고 흐르는 피, 우악스러운 이빨과 손톱, 몰아쉬는 숨결.

놈들을 이루는 모든 것이 전염을 위한 수단이다.

가장 무서운 건 감염자의 발생.

보균자를 떠난 병균이 마음껏 기승을 부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다.

“저흰 이번에도 막아 낼 겁니다.”

그래. 막아야지.

그깟 역병 따위가 내 소중한 신도와 신자들을 겁박하게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