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Episode. 30 칼고스의 역병 (1)
“시, 시이발…….”
왕실에서 파견된 병사 한스가 성벽에 몸을 기댔다.
절로 내뱉어진 욕이 그의 통탄스러운 감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리오 성에 파견된 지 대략 세 달쯤 되었을까.
한스는 아직도 마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연합의 닦달에 떠밀려 성 앞마당을 뒹굴며 호르를 부르짖었으나, 무서운 건 여전히 무서운 것이었다.
지친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한편에 웬 새까만 안개가 보였다.
그 검은 안개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리오 성을 침범하려 들고 있었다.
지난 삼 개월간 볼 만큼 보았던 광경. 당연하지 않은 게 당연한 것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눈이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며, 한스는 제 눈을 벅벅 비볐다.
“그대로네.”
“병신아, 네 눈깔 비빈다고 저게 달라지겠냐?”
동료 제임스가 다가와 한스의 옆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입이 거친 것은 제임스도 똑같은지, 시벌- 하는 걸쭉한 욕설이 들려왔다.
한스가 피식 웃었다.
웃겨서 웃은 건 아니었다.
이제는 한낱 병사인 그들도 알았다.
곧 그 망할 놈의 역병이란 게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그래. 내 눈 비벼서 달라질 건 없지.”
“징징이 새끼가 웬일로 덤덤하냐?”
한스가 얌전히 수긍을 하자 되려 제임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근데 우리 따위가 여기 있다고 뭐 바뀌겠어?”
“에휴, 그럼 그렇지.”
“빌어먹을! 대체 왜……!”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한스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으니 말이다.
기사도 픽픽 죽어 나가는 성에서, 병사인 자신들이 무얼 할 수 있겠냐-
귓가에 자동 재생되는 한탄에 제임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병사들도 다 똑같은 심정이야. 그렇다고 너처럼 우는 소리는 안 해.”
“하! 안 한다고? 매일 밤 질질 짜는 놈들이 한 수레야! 너도 얼마 전에……!”
“그건 네가 허구한 날 분위기 흐려서 그렇고!’
병사들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그 주범을 꼽으라면 단연코 한스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없었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리오 성의 병력은 도합 3,300명.
그 중에 병사가 2,000명이다.
기사가 천삼백인데 병사가 이천이라니, 참으로 이상한 분포였다.
사실 이건 왕국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우선은 최소한의 병력을 리오 성으로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병사들 입장에선 골리앗들 사이에 낀 다윗처럼 크나큰 압박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우릴 고기 방패로 삼으려는 게 분명해.”
“시끄러워! 개자식이 불길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동료의 핀잔에 한스가 입을 다물곤, 리오 성채의 꼭대기에 내걸린 깃발을 바라보았다.
깃발은 총 일곱 개였다.
무가 연합을 이룬 다섯 가문과 바렌 왕국의 깃, 그리고 십자 문양의 깃발까지.
한스의 시선을 잡아끈 건 십자 문양의 깃발이었다.
리오 성을 지켜 낸 호르교의 휘장이라 했던가.
“야, 제임스.”
“왜.”
“너도 신을 믿냐?”
“지금 우리 상황에선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
병사의 일과는 참으로 팍팍했다.
오전엔 성의 증축 작업을 하고, 오후엔 성 밖으로 쫓겨나 마기로 뒤범벅된 땅 위를 내달려야 했다.
온몸이 썩어 들어갈 것만 같은 감각은 어찌나 끔찍하던지.
훈련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저 빛이 없었으면 우린 진작에 미쳤어.”
제임스가 턱짓으로 호르교의 깃을 가리켰다.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빛무리가 반짝거렸다.
비단 그 휘장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내걸린 깃발들이 내뿜는 빛이 리오 성을 마기로부터 지켜 주고 있었다.
그게 호르의 가호란다.
대체 호르가 뭔지, 연합의 사내들은 왕실의 기사나 병사나 가릴 것 없이 호르를 믿길 종용했다.
심지어 웬 노래까지 가르쳤으니 말 다한 셈이다.
덕분에 왕실에서 온 지원군은 억지로나마 호르를 부르짖게 되었다.
극한의 공포에 치달았을 때 막상 기댈 건 호른지 나발인지밖에 없었다며, 병사 중 누군가가 한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스에겐 아니었다.
“난 저걸론 부족하다고…….”
아무리 빛을 바라봐도, 아무리 호르를 부르짖어도 그의 불안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리오 성으로 파견되는 길에 마주쳤던 리하르트.
거창한 영웅담만 무성한 그 사람만이 자신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젠장, 그때 만났던 게 설마 철수 중이었다니, 신이 있다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어.”
◈ ◈ ◈
그렇게 리오 성에선 힘겨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던 마기는 이젠 훈련도 못할 정도로 기승을 부려 댔다.
리오 성주, 오르드 백작은 이를 역병 창궐의 징조라고 선언했다.
결국 병사들은 마기에 채 익숙해지지도 못한 상태로 훈련을 중단하고, 성의 증축에 힘을 썼다.
뿌우, 뿌우우-
그러다가 이변이 일어났다.
아니, 한스에겐 기적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맞을 터다.
“이, 이 기운은……!”
오르드 백작의 놀란 음성이 성벽 위를 울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하하…….”
“나 참! 오실 거면 기별이라도 주시지!”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성의 북문으로 몰려들었던 사내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대체 누가 오는 겁니까?”
참다못한 왕실 기사 하나가 물었다.
“영웅이 오고 계시는 중이오.”
“영웅……? 혹시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이 성스러운 기운은 그분의 것이오!”
흡-
일부러 귀를 기울였던 한스가 숨을 들이켰다.
지금 누가 온다고?
그 이름을 듣자마자, 마기의 썩은내만 가득하던 이곳에 달콤한 향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이른바 빛의 향기라고 해야 할까.
한스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였다.
어느새 리하르트 일행이 북문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이야, 신수들 훤해 보이십니다?”
선두에 선 리하르트가 장난기 다분한 말을 건넸다.
연합과 마찬가지로 반가움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뭐 하십니까! 얼른 문 여시죠!”
“지원군이 온다는 말은 없었던 터라, 철저한 검문 없이는 못 들어오십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냥 돌아가렵니다. 잘 지내십쇼!”
리하르트와 오르드 백작의 농에 성벽에 늘어선 사내들이 킬킬거렸다.
“우선 들어오시죠.”
곧 성문이 열리고 리하르트의 일행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스는 늦을세라 다급한 발걸음으로 성벽의 계단을 내려갔다.
껑충껑충 두세 계단씩 뛰어내린 덕에 지근거리에서 리하르트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바텐베르크가…….”
“예? 그게 대체…….”
오르드 백작을 포함한 성의 수뇌부와 리하르트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스는 제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아름다워…….”
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떠하며, 허스키한 음성에 섞여 나오는 성스러움은 또 어떠한가.
성자라더니, 그게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단 것을 한스는 다시금 깨달았다.
이 깃발에 한 줌, 저 깃발에 한 줌, 그런 식의 감질 맛 나는 빛 쪼가리가 아닌 진짜 빛의 근원지.
리하르트는 빛, 그 자체였다.
한스가 두 손을 번쩍 들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돌아오셨어! 나를 버리신 게 아니었던 거야!”
“야, 진정해. 저분은 너 몰라.”
제임스가 당장에라도 리하르트에게 달려갈듯 몸을 들썩이는 한스를 말렸다.
그런 그조차도 리하르트를 향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둠 속 등불.
리오 성을 찾아온 리하르트는 딱 그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호랑이같이 사납던 연합의 기사들도 리하르트를 향할 때만큼은 신뢰가 가득했으니, 병사들의 눈엔 그야말로 영웅처럼 보였다.
“역시 돌아오니까 좋군요.”
“허, 이 퀴퀴한 성이 어디가 좋단 말입니까?”
“성주가 할 소리는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모인 자리, 리하르트가 이제 막 백작과 이야기를 마쳤을 때였다.
“왁!”
연합의 기사들이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에 한껏 만개한 미소가 그들이 얼마나 반가워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둥, 잘 지냈냐는 둥,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을 쏟아 내니 하나하나 대답하기도 벅찰 정도였다.
떠나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리하르트와 바텐베르크의 기사들, 연합의 사내들에게 그들은 단순히 든든한 지원군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성자님! 다시 오실 거면 가기 전에 미리 말씀을 해 주시던가요! 떠나실 땐 아무런 말도 안 하셨으면서!”
아발트가 잘생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성을 냈다.
다분히 투정 섞인 어투에 움찔거리는 눈살을 보아하니 애써 화를 내는 척하고 있는 듯했다.
“웩, 기쁘면 그냥 기쁘다 말해. 어디서 앙탈이야?”
리하르트가 짐짓 구역질하는 시늉을 내며 아발트를 놀렸다.
고작 몇 달을 같이 싸웠고 고작 몇 달을 떨어져 있었건만, 다시 돌아온 게 왜 이리 좋은 건지 리하르트의 음성도 퍽 들떠 있었다.
어디 리오 성이 얼마나 변했는지 직접 보자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한 병사였다.
“쟤는 또 뭐야.”
“……힉!”
단순히 빛에 정신이 팔렸다기엔 그 눈빛이 뜨거워도 너무 뜨겁다.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친 한스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가슴을 부여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갸웃한 리하르트가 주변을 훑었다.
성의 병력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 병사들이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쯧쯔…….”
그들이 왜 이런 눈빛을 보내는지는 리하르트도 안다.
하나 곧 있으면 창칼 쥐고 나가서 싸워야 할 이들이 이렇게나 의존적인 눈빛을 보내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애들 훈련 안 시킵니까?”
이렇게 귀한 병력 놀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뜻에 성주가 난색을 표했다.
“마기가 몹시 흉흉해진 탓에 훈련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까짓 거 좀 무서운 게 낫지. 역병한테 물려 죽는 것보다야.”
틈틈이 신안으로 지켜보았던 덕에, 리하르트는 병사들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가 굳은 왕실 기사들은 제법 마기에 익숙해질 수 있었지만 병사들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언데드 전쟁 당시의 성자가 어땠느니, 호르가 어떻느니.
연합의 기사들이 믿음을 심어 주려 했으나, 당사자가 눈앞에 없는 찬양은 겁 많은 이들에겐 헛소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가 이곳에 없었을 때엔 말이다.
“이젠 제가 있잖습니까. 마인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실컷 굴려 버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