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Episode. 29 왕도에 번진 등불 (3)
난 신안을 통해 왕도를 보았다.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는 바렌의 성가대와, 그 뒤를 홀린 듯 따라가는 백성들.
[횃불의 열기에 들짐승 물러나고]
[횃불의 온기에 너희 추위 물러나리라]
웅장한 노랫말이 왕도의 거리를 울렸다.
세기말의 그것처럼 음울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변모한다.
우울과 불안으로 가득 찼던 얼굴들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미의 손을 꽉 잡은 어린아이가 활짝 미소 지었다.
보기 좋았다.
그래서 나는 자그마한 선물을 주기로 했다.
고오오-
어둠을 걷어 내고 빛을 비췄다.
신안이 비추는 땅에 축복을 내렸다.
그래봤자 오십만.
왕도 전체를 감싸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의 힘.
하지만 이미 옮겨 붙은 불씨를 키우기엔 딱 적당했다.
“기적이다!”
“호, 호르……!”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광채에 백성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두 손을 그러모았던 국왕도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신안을 해제했다.
“성자님!”
그러자마자 잔뜩 상기된 신도들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저것 좀 보세요!”
“호르께서 기적을 내리셨습니다!”
나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며 따스한 빛을 쬤다.
볼을 간질이는 따스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차디찬 겨울 같았던 왕도가 어느새 따사로운 봄날처럼 화사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바렌의 믿음이 호르 님을 불러오셨나 봅니다!”
백성들의 희망에 확신을 주고자 벌인 일인데, 어찌 된 건지 호르교의 신도들도 감격에 겨워 소리를 질러 댔다.
전도사니, 템플나이츠니 구분할 것 없이 말이다.
“왜 이렇게 시골 촌놈들 같이 굴어? 너희가 저런 거 한두 번 봐?”
내 말에 아론이 얼떨떨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호르의 기적은 처음 본단다.
그럼 지금껏 저들이 보았던 빛은 다 뭐란 말인가.
어이가 없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야! 내가 그동안 한 게 얼만데!”
리오 성의 악몽을 막아 내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건 내가 내뿜은 호르의 빛이었다.
바텐베르크의 마기를 몰아낸 것도 호르의 빛이었으며, 그 외에 위험이 찾아왔을 때 빛을 밝혀 막아 낸 건 항상 그 빛이었다.
그 덕에 신도가 된 녀석들이 이제야 처음으로 기적을 보았다니.
그렇게 도끼눈을 떴던 나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
어째선지 신도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던 것이다.
듣지 못할 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우리가 밟고 선 공터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마다 눈짓을 교환하는 게 꼭 나만 따돌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뭐야, 내가 내뿜는 빛이 호르의 기적이 아니면 뭔데?”
“아, 아아…… 그렇지요!”
그제야 신도들이 실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요. 뭐랄까, 지금까지는 그냥 성자님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막 신의 기적이다-! 라는 것보단 성자님이 행하셨다! 라는 느낌이었죠.”
음…….
왜들 이러나 싶었는데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지금이 대낮임을 알리는 태양, 그 주변에 신앙의 빛이 오로라처럼 커튼을 쳤다.
확실히 내가 신도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빛을 밝힐 때면 늘 이 두 손을 통해 이루어 냈으니.
‘이런 것도 자주 해야겠네.’
신도들의 열렬한 반응을 보니, 이것도 상당히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신의 기적이라 함은 무릇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걸 연상시키지 않는가.
“그렇지. 이건 바렌의 호르가 만들어 낸 기적이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망론을 내세웠다.
내 품에 와락 안겨 든 아델이 귓가에 속삭였다.
“왜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선. 아빠는 그냥 아빠지, 소망 같은 게 아니잖아.”
“씁. 이상하다니, 난 마음에 드는데.”
“저, 성자님?”
줄곧 하늘을 올려다보던 메리가 내게 다가왔다.
말간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들은 어째서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을까요?”
“왕실을 말하는 거야?”
“네.”
의구심을 갖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저희들이 나섰다면…….”
이쪽으로 다가온 전도사들이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사실 전도사들이 나설 것도 없다. 내가 거리 한복판에서 신앙을 쓰며 호르를 믿으라고 한 마디만 외쳤어도 신자가 우후죽순으로 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여러 사람들이 수고스러움을 감내해야 했던 이유라.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자기네 나라잖아.”
그거면 답으로서 충분하지.
“우린 바렌을 거점 삼은 것이지, 아예 터를 잡고 눌러 살려는 게 아니야. 저들은 제 힘으로 서는 법을 배워야 돼.”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그럭저럭 상쾌했다.
“호르교는 등불이다.”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모두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손가락을 들어 왕도를 가리켰다.
“그리고, 바렌은 이제 횃불이 될 거야.”
어두운 동굴 벽면에 걸린 홰.
이미 한 차례 불이 붙은 바 있지만, 그 불은 차디찬 삭풍이 꺼트려 버렸다.
우리는 바렌이라는 홰가 다시금 타오르도록, 자그마한 불씨를 옮겨 준 것뿐이다.
그 불씨가 어떤 식으로 번져 나갈지는 홰의 재질에 달렸다.
“우리와 같되 다른, 바렌만의 불꽃이 타오를 거야.”
벌써 꽤 특색 있는 교리가 탄생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등불을 통해 타오를 또 다른 홰들은 어떤 불꽃을 피울까.
여러 불꽃이 모일수록 호르교는 더욱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것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아아! 전도사들이여! 바렌의 호르를 위해 기도해 주자!”
한차례 코를 훌쩍인 메리가 전도사들 앞에서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는 감격에 겨운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바렌의 호르에 우리의 호르를 더해 주자!”
“오오, 호르시여!”
뜬금없는 기도의 시간이 흘렀다.
우습게도 템플나이츠까지 진지한 태도로 기도를 올렸다.
“취익…….”
그때 내 눈에 빨간 오크가 들어왔다.
어딘가 결연한 콧소리를 낸 그가 성큼성큼 굵은 다리를 움직여, 메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메리 소저, 내 안의 호르가 소저에게 고백하라 외치고 있소.”
투박한 오크의 손이 그녀 앞에 경건히 내밀어졌다.
“이 손을 잡으면 나와 정식으로 교제하는 거요.”
“휴거 신도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은 바렌을 위한 기도 중입니다.”
참 애석하다.
하필이면 기도 중일 때 고백할 건 또 뭐람.
“으휴…….”
멍청한 오크의 작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다음 날.
해가 뜨고 지는 건 여전한데 그 아래에 펼쳐진 풍경은 제법 달라져 있었다.
꺄르륵-!
거리를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서로서로 인사를 건네는 상인들과,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던 참새들의 지저귐까지.
모든 게 환란 이전의 날로 돌아온 듯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호-르!”
“호-르!”
사람들의 인삿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거 참, 아직 어색하기는 한데 마음에 드는구먼.”
“껄껄! 그러게 말일세.”
왕도 순회를 한 바퀴 끝낸 성가대는 왕성의 성문 앞으로 돌아와, 백성들에게 호르교의 교리를 설파했다.
기적을 바라마지 않던 사람들은 그날, 진심 어린 구원을 받아들였다.
외부의 것이 아닌 제 마음속의 신을 통한 구원을 말이다.
호-르라는 인삿말은 트란티스 후작이 낸 의견으로, 네 마음속에 거주하시는 신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삭풍이 멈추고 봄바람이 불어온다.
하루 만에 성큼 다가온 계절의 변화가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뭄도 버텨 내는 법입니다.”
리하르트는 국왕을 찾았다.
“앞으로 급격하게 늘어날 호르교의 신도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 필요할 겁니다.”
“알고 있소. 이미 트란티스 후작을 필두로 귀족들이 회의를 거치고 있소.”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렌 왕실이라면 괜찮은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믿는 건 바렌 왕실뿐이 아니었다.
“저희 전도사들이 힘을 보태 드리고 싶어 하더군요.”
본디 전도사가 있어야 할 곳은 딱 이런 곳이다.
믿음 한 줌 없거나, 이제 막 믿음이 태동하는 땅.
마침 소망론에 깊이 감명받은 신도들이 이곳에 남는 걸 희망했다.
리하르트의 말에 국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대 덕분에 바렌은 다시 일어설 힘을 갖게 되었소.”
“그건 전부 바렌의 힘이지요.”
“리하르트 공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힘이지. 정말 무한한 감사를 표하오.”
어떻게든 갚겠다고, 언제가 되든 반드시 갚겠다고.
국왕이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어느덧 국왕은 암운에 시름하던 노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어제의 개천(開天)을 보고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그런 불가사의한 기적을 두 눈으로 보고도 호르교를 의심한다는 건 눈뜬 장님과도 같았다.
“왕도의 믿음이 진정되면 다른 영지에도 믿음을 전파할 것이오.”
“좋은 생각이십니다.”
바렌은 변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변화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호르교로 이득을 볼 것이고, 때로는 호르교로 손해를 볼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백성들이 희망을 원하고 있다는 것.
국왕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다.
“저희는 곧 리오 성으로 떠날 겁니다.”
한창 바렌의 부흥을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들려온 리하르트의 말에 국왕이 눈을 크게 떴다.
리하르트는 자신이 신안으로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무너진 폴린 성의 잔해를 먹어치우고 우뚝 솟아난 역병의 성.
그것은 붉디붉은 살점이 엉키고 설킨, 참으로 끔찍한 외양이었다.
이제 ‘모체’는 완성되었다.
머지않아 역병거인 칼고스의 사념을 이어받은 괴물들이 창궐할 것이다.
“……리오 성을 부탁하오.”
“국왕 전하께선 부디 호르교의 교리를 널리 퍼트려 주십시오. 호르가 곧 바렌의 희망입니다.”
“그건 내게 맡겨 주시오.”
국왕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 속에 호르가 담겨 있다는 듯, 든든한 얼굴이었다.
◈ ◈ ◈
리하르트와 일행들은 이틀 뒤 소리 소문 없이 떠났다.
왕도에 불씨를 전해 준 것치고는 몹시 조용히.
“흐흐…….”
달리는 말 위에서 모리츠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거북함을 느끼게 하는 손길은 자기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쟤 왜 저래?”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가 헛구역질을 하며 주변의 기사에게 물어보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루드비히에게 받은 선물을 사용할 때가 왔다며 기뻐하는 중이란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모리츠가 더듬는 것이 허리가 아니라 한 쌍의 단검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성자님도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무시무시한 요검이랑 웬 장신구 말입니다.”
리하르트에게 답변을 해 주던 기사가 물었다.
“흠…….”
백귀(百鬼)와 팔찌 하나를 떠올린 리하르트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기대되네.”
한껏 기대감 품은 그의 얼굴은 모리츠와 다를 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