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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90화 (90/216)

90화. Episode. 29 왕도에 번진 등불 (2)

신이 무엇이냐고.

귀족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받았던 질문이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무엇이냐는 물음은 처음이었다.

“…….”

마기를 떨쳐 낸 후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라 답해야 할까.

마음 같아선 ‘내게 신은 없습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곧 신이니, 또 다른 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는 후작께선 신을 어찌 생각하셨습니까?”

트란티스 후작이 줄곧 신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 그가 신도를 넘어 전도사가 되었다는 건, 무언가 진취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제가 생각한 신은…….”

후작이 턱을 쓸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빛이 살짝 잠겨 들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신이, 호르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게 대체 뭔 소린지.

나는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을 담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성자님과 호르교의 신도들을 보고 느꼈습니다.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데 어째서 우리와 다를까.”

신도들의 시선이 후작에게 쏠렸다.

“신이라는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구원을 받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검의 광기 속에서 저희는 극명하게 구분되어졌지요. 믿음 없는 자는 두려워했고, 믿음 있는 자들은 버텨 내고 있었습니다. 성자님께서도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믿음이 핵심이라고.”

“그렇죠.”

“저도 그 말씀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름진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 자그마한 동작에서 느껴지는 넉넉함은 모든 근심 걱정을 이겨 낸 자의 것이었다.

“신은 있어서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믿어서 있는 것이지요.”

펜잡이들은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주의 깊게 듣던 신도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쉬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도 대충은 알아들은 척을 해야 했다.

명색이 성자이지 않은가.

“역시 학문적 소양이 높으신 분은 다른가 보군요. 후작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르는 믿음으로써 존재하십니다.”

“오, 오오! 성자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맞장구에 후작이 어린애처럼 흥분했다.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 인정받았다는 사실보다는, 말동무가 있음에 기꺼워하는 것 같았다.

“성자님. 저는 결핍에서 태어난 소망, 혹은 충족이 호르라고 믿습니다. 호르를 믿는 자는 끝까지 밀어붙여 성취할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고난 앞에 포기를 선택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반짝이는 눈을 한 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후작은 생각보다 철학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을 세웠다.

주위를 힐긋 둘러봤다.

후작의 말에, 신도들은 진리를 깨달은 학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찬물을 냅다 들이부을 순 없었다.

“그, 렇지요. 호르는 사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거지요.”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이것이 진정 호르교의 교리였군요!”

진정한 교리는 무슨.

난 그런 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어떻게 하면 신을 믿을지 고민하다 결정한 교리가 ‘믿음이 구원을 불러온다’였을 뿐이었다.

“성자님! 저와 담론을 위한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번 열린 후작의 입은 쉬이 닫히지 않았다.

소망이 호르라는 걸 인식하고, 그것이 성취될 것이라 믿으며 끊임없이 행동하라.

그게 곧 신앙심이다-

이렇듯 후작이 침 튀기며 설파한 이론을 정의하자면 소망론이라 명명해야 할 터였다.

‘이걸 어쩐다.’

그건 틀린 믿음이라 고쳐 주어야 할까, 그냥 내버려 둬야 할까.

내가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소망론이 호르교의 교리로 인정될 것이다.

주변에 있는 전도사들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그럴 거라는 확신이 섰다.

그런데 그것도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르는 사실 난데, 정작 나는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다.

닥쳐 오는 문제와 점점 무거워지는 책임감에 비해, 내가 가진 힘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더욱 트란티스 후작의 이론에 끌렸다.

소망론은 각자에게 책임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발전을 꾀하는 진취적인 이론이었다.

소망의 성취 여부에 신의 책임은 없다.

모든 건 행위자의 믿음과 노력에 달렸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틀린 믿음이란 걸 알지만, 굳이 입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나름의 도피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          ◈

바렌의 귀족들.

전도사의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전도의 불씨를 당기기 시작했다.

미리 추려 놓았던 인원 백 명을 모아 호르의 교리를 설파하고, 또 그 중에서 열 명의 사람을 추려 완장을 씌웠다.

사아아-

트란티스 후작의 빛을 본 이들은 상당히 쉽게 호르교를 받아들였다.

의심 많던 아홉 귀족들도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다며, 헛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발목을 붙잡던 의구심이 트란티스 후작을 통해 해결된 것이다.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곧 호르이시렷다.”

“그런 거라면…….”

특히나 소망론은 종교의 거부감을 크게 줄여 주었다.

외부의 것을 들여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을 인식하라는 것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네가 가진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믿고 행동하며, 더 바른 삶을 꿈꿔라-

바렌은 지금 병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희망찬 동기를 촉진하는 구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제는 호르의 불씨가 옮겨 붙었으니, 절박한 자에겐 오직 믿음만이 유일한 재산이 되었다.

“우리의 호르는 무엇인가!”

“백성들에게 신을 알리는 것입니다!”

백 명의 예비 신도들이 힘차게 외쳤다.

“이 빛을 보라!”

트란티스 후작이 그들의 앞에 나서서 후광을 밝혔다.

“이것이 호르의 기적이다……!”

늙은 몸에서 뿜어지는 박력은, 일장연설을 하던 메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바렌은 커다란 결핍에 처해 있다. 이것은 위기가 아닌 기회일지니, 우린 하나의 소망으로 호르를 섬길 수 있음이라!”

와아아-!

리하르트의 교육이 끝나고 한 주가 더 흐른 날.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마치게 되었다.

◈          ◈          ◈

휘잉-

왕도엔 삭막한 바람이 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백성들의 얼굴은 우중충했고, 눈빛은 탁기를 띠었다.

그것은 세상이 마냥 밝은 줄로만 알던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맹국 프로트 왕국에선 벌써 방어선을 구축했더라.’

‘이미 타국은 바렌을 없는 나라라 생각하고 있더라.’

들려오는 것이라곤 마기만큼이나 어두운 입소문 뿐.

몇몇은 리하르트의 왕도 방문을 두고 바텐베르크가 바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며 희망을 가졌지만,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 지금은 이내 실망감으로 변모했다.

망나니라더니, 몰락해 가는 왕국을 구경하러 온 것뿐이라고.

“이 나라도 이제 끝이야.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해!”

“젠장!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겠어! 다들 마인이니 뭐니, 문을 걸어 잠궜다고!”

바렌 왕국.

북대륙의 방패였던, 하나 이제는 절반이 뜯겨 나가고 잔뜩 낡아 버린 고철덩어리.

그들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자국의 운명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에 대한 절망만이 들끓었다.

그때였다.

왕성의 성문이 벌컥- 열렸다.

그 사이로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백성들은 불안에 찌든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둡고 흐린 날에]

[호르께서 등불 부려 열기 나눠 주시고]

귓가에 웬 노랫말이 들려오며 개방된 성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십자 문양이 그려진 깃을 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얼굴을 한 이들.

거기엔 귀족도 있었고, 병사도 있었으며, 일개 시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하얀 망토를 두른 것으로 신분의 차이를 가려 냈다.

[우리에게 이르시되]

[추위 떠는 백성 위해 횃불 되거라 하시더라]

한 명의 전도사와 아홉의 신도, 백 명의 신자들로 이루어진 성가대가 노래를 불렀다.

읊조림과 비슷한 노랫말은 성스러운 기운을 품고 널리 퍼져 나갔다.

“아, 아아…….”

백성들이 탄성을 흘렸다.

지치고 지친 이에겐 천금보다도 소중한 따스함이었다.

[환란이 도래하였으니]

[이 횃불 통해 깨달아라]

[네 안에 깃드신 호르는 무어라 말하시더냐]

[너는 너를 위해 증명하여라]

[호르는 너를 위해 증명되어질 테니]

[우리의 소망은 무엇이더냐]

찬란한 노래를 읊던 성가대가 곧 발걸음을 옮겼다.

따스한 횃불에 델세라 화들짝 놀라며 길을 터 주었던 백성들이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주르륵-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바렌의 평화에 횃불 비추고]

[바렌의 번영에 온기 전할지니]

[곧 싹을 틔우리라]

찬송가의 걸음걸음을 따라가는 이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조금이라도 더 빛을 쬐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          ◈          ◈

“…….”

국왕은 왕성에서 왕도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후광을 밝힌 트란티스 후작을 앞세운 성가대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들은 왕도를 한 바퀴 순회할 것이다.

그렇게나마 자신들의 온기를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후…….”

성가대는 저만치 멀어졌건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여운은 그대로였다.

국왕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간절한 염원이 담긴 노랫말이 들려온다.

쿵쿵 뛰는 심장어림이 앞으로의 우려 때문인지, 기대감 때문에 이러는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오랜만에 보게 된 백성들의 웃음이 몹시도 아름다웠다는 것.

“호르라고…….”

리하르트를 망종이라, 호르교를 한낱 선동이라 외쳤던 트란티스 후작.

그랬던 그가 지금은 성가대의 맨 앞에 서서 노쇠한 목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국왕은 허허롭게 웃었다.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달리한 반대파 귀족들.

누가 그들더러 줏대 없다며 욕을 할까.

적어도 바렌에 그럴 이는 없었다.

그는 귀족들의 총명함을 믿었고, 총명한 그들은 호르교를 이로운 것이라 판단했다.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그 덕에 국왕은 호르교에 대한 확신이 섰다.

“내 안에도 호르가 있다고 했던가.”

국왕이 두 손을 모았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찬송가를 따라, 속으로 되뇌었다.

[호르께서 기적을 내리니]

[너희가 풍요로이 빛을 쬐고]

[거기 안전하게 웃음 지으리라]

그 순간.

마기에 꺼멓게 가려졌던 하늘이 개었다.

어두운 장막이 걷혀지고 수많은 빛줄기가 드러났다.

왕도에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허…….”

모두가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적이다…….”

“호르의 기적!”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새파란 하늘일까.

쏟아지는 빛줄기보다도, 백성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이 더욱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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