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Episode. 29 왕도에 번진 등불 (1)
“끄, 끄어억…….”
계시를 마치고 돌아온 나를 반긴 것은 끔찍한 격통이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모두 계시의 부작용이었다.
결국 그렇게 나는 한참을 누워 있었다.
신성력은 불안하게 요동치지, 신앙으로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지.
영혼과 육체가 삐그덕거리는 불쾌한 감각이 끊이질 않았다.
“당분간 계시는 못 쓰겠네.”
난 가만히 누워 앨런을 떠올렸다.
100만.
이번 계시로 소모한 신앙의 양이다.
그간 열심히 모은 덕에 아직 850만이 남아 있었으나 상당히 뼈아픈 손실임엔 틀림없었다.
계시를 발동하는 데에만 20만, 그 이후의 유지비용은 발동 시간과 빛의 세기 따위에 따라 눈덩이 불어나듯 커졌다.
이렇듯 많은 리스크를 지긴 했다만, 결코 후회되지는 않았다.
앨런 마르크스가 좀 까탈스러워야지.
첫 계시 후, 그놈은 자신이 신격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는 걸 몹시 굴욕으로 여겼다.
어둠에 잠겨 가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의 자존심은 곧 경쟁 심리로 이어져 반발심만 키운 꼴이다.
그래서 이번엔 제법 공을 들였다.
빛의 세기를 잔뜩 키우고, 신격을 조금 더 과감하게 드러냈다.
난 앞으로 그의 얼굴에서 자존심과 반발심을 완전히 지워 버릴 셈이다.
그러곤 그 빈자리에 신앙심을 잔뜩 불어넣고자 했다.
북대륙과 남대륙의 화합은 곧 바텐베르크와 마르크스의 화합.
지금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북쪽의 성자와 남쪽의 성자.
언젠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될 우리가, 호르교라는 연결 고리로 대륙의 화합을 이끌게 될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바렌의 귀족들이 전도를 빙자한 정신 교육을 받은 것도 오늘부로 일주일 차.
“하늘에 악이 도래했나니, 우리에겐 탄식과 절망뿐이였도다! 다만 가슴속 믿음 품은 자들은 걱정이 없음이라!”
교육의 시작은 늘 그렇듯 메리의 설교였다.
가녀린 체구와 단아한 얼굴에서 나오는 박력은 기사의 그것보다도 더욱 굳셌다.
“아, 아아! 호르시여!”
그런 위력적인 설교를 하루에 두세 시간씩 들어야만 했던 귀족들은 반사적으로 경배를 부르짖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처음의 불경하고 속물적인 태도는 첫날 이후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우리는 이겨 냈도다! 등불의 노래를 불러 어둠을 몰아냈도다!”
“이제 곧 동이 터 오른다 했을지니, 바렌의 땅에서도 여명의 빛이 반짝이리라!”
“반짝이리라!”
메리의 외침을 스노우폴의 신도들이 받아 냈다.
휘장을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치는 그 모습은, 누가 본다면 광신도 집단이라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을 터였다.
하지만 후작은 조금의 거리낌은 있을지언정, 광신도 집단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설마 이미 감화되어 버린 걸까.
“제가 미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연 요르크 백작이 소근소근 말을 건넸다.
“왜 그러나?”
“저 모습이 오히려 경건해 보입니다. 며칠 전만 해도 안 이랬는데 말이죠.”
“…….”
사실 나도 그렇다네-
……라는 말은 백작의 입에서만 맴돌았다.
참으로 많은 변화.
단 일주일만에 이렇게나 변할 줄은 자기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신의 존재 유무를 의심했었다.
리하르트의 힘을 알지만, 그 치명적인 힘 자체에 경계심을 가졌다.
열 명의 귀족이나마 전도사가 된다는 결정은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한 것이었다.
“호르시여!”
그러나 이제는 깨달았다.
이건 바렌에게 찾아온 기회란 것을.
“메리, 수고했어.”
“아닙니다!”
연설을 끝낸 메리가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 성큼 다가온 건 리하르트였다.
여지없이 그의 옆구리에 끼인 목함을 본 귀족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들이 치를 떨며 두려워하는 시간이자, 가장 간절해지는 시간.
끼이이이에엑-!
백귀가 울부짖었다.
그 안에 섞인 광기는 일반인에 불과한 귀족들이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허어억!”
그들은 오늘도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다.
“공포는 순수한 감정입니다.”
그 중심에 요검을 쥐고 선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 몹시 순수한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남녀의 구분도, 신분의 구분도 존재치 않습니다. 그저 연약한 사람일 뿐이죠.”
언뜻 냉정한 말투였지만, 몰아치는 광기 속에서 리하르트의 빛은 구세주의 그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은 여느 때와 같이 그 빛에 의지해야만 했다.
후작이 눈을 감고 손을 그러모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신을 믿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도 모른다고.
문관은 본디 의심이 많아야 한다.
그들이 내리는 결단 하나하나에 따라오는 책임과 의무가 적지 않았던 터라, 돌다리도 서너 번은 두들기는 버릇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게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호르시여. 당신은 실로 존재하십니까.’
한 가지 믿음을 세우려면 열 가지 증거를 찾아야 하는 그들에겐, 신은 아직 멀기만 한 존재였다.
‘차라리 종교가 아니었다면.’
저 찬란하고 경건한 빛이 그저 리하르트의 힘이고, 그가 제 힘으로 호의를 베풀고자 한 것이라면.
바렌은 좀 더 겸허히 구원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부디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이 악몽에서 한 줄기 광명을 내려 주십시오.”
공포라는 순수한 감정에 이끌려 나온 기도는 호르라는 신이 아니라, 리하르트를 향해 있었다.
빛에 이끌린 부나방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것 또한 정답이라는 듯, 몸에 기묘한 활력이 맴돌았다.
문득, 후작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믿는 자에겐 신이 있다.
저토록 다부진 얼굴을 하고 있는 메리와 신도들이 그 증거였다.
믿지 않는 자에겐 신이 없다.
자신과 왕실 귀족들이 그 증거였다.
무언가 답을 찾은 것 같다.
“……시여.”
발렌티노 드 트란티스 후작.
그 노인의 음성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점차 묘한 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이 늙은 손으로나마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지금 이 순간, 그가 얻은 또 한 번의 깨달음.
“흐려진 제 눈에 불을 밝혀 주시어.”
신은 남에게 증명되어져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포에 떠는 백성에게 빛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시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 짧은 인생엔 늘 결핍이 함께하며, 늘 더 완전한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넌 신을 믿느냐고 누군가가 다시 물어본다면 트란티스 후작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에게 신은 바렌의 평화와 번영일지니, 그것은 곧 성취될 것이라 믿겠다고.
몹시 가난한 자에게 신은 금화 한 닢과 같다.
굶주린 자에게 신은 한 끼의 식사거리와 같다.
‘세상 모든 소망이 곧 신이 아닐까.’
결핍을 느낀 인간은 충족을 위해 행동한다.
여기서 성취를 믿지 못한 자는 포기라는 죄를 지으며, 때로는 핑곗거리를 찾는다.
반면 믿는 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점점 더 원대하고 커다란 소망을 찾는다.
그렇게 완성의 길을 걷는 것이다.
사람마다 결핍이 다르고 소망이 다른데, 어찌 같은 것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신의 존재 증명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만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이것이 트란티스 후작이 얻어 낸 깨달음.
그야말로 허점투성이였고,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는 부실한 믿음이었다.
한데 이제야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학(神學)에 ‘누군가’는 기쁨을 느낀 걸까.
해답의 결핍을 앓던 후작에게 자그마한 충족감이 차올랐다.
사아아-
[발렌티노 드 트란티스 - 신도 자격 충족.]
[발렌티노 드 트란티스 -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특기 후광(E) 습득.]
눈을 감은 후작의 노쇠한 몸에 빛이 일었다.
“……덧없이 스러져 가는 우리에게 가치 있는 삶을 부여해 주시고.”
힘없는 음성엔 성스러운 기운이 섞여 들었다.
자신의 상태도 모르는 듯, 그는 간절한 기도를 이어 나갔다.
“제 미천한 깨달음을 백성에게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 ◈ ◈
“……교육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도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귀족 열 명 중 신도가 된 건 트란티스 후작뿐이었다.
하지만 그냥 신도가 아닌, 전도사가 탄생한 것이니 당장 일을 시작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믿음이란 닦지 않으면 때가 묻습니다. 막중한 임무를 지고 계신 여러분은 바렌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수양을 게을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교육을 마쳤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귀족들이 허리를 연신 굽히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은혜를 나눠 줘서 고맙다며, 그 뜻을 의심해서 너무나 미안하다며.
“제가 실컷 괴롭힌 건 벌써 잊으셨나봅니다.”
분명 나에 대한 반감이 컸기에 도리어 바렌의 전도사로 차출된 이들이었다.
한데 그간 심경의 변화가 어찌나 큰 건지 날 향한 시선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할 일이 많으실 텐데요.”
내 말에 퍼뜩 정신 차린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이 순간에도 백성들이 떨고 있다고.
나가는 와중에도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딱 한 명만큼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왕보다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검버섯 핀 노인.
트란티스 후작이었다.
“전도사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의 은혜는 바렌의 빛으로 화답하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후작은 떠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나도, 그도 서로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기억하기로 후작께서는 가장 불신론자의 기질을 보이셨습니다만. 이건 정말 예상외더군요.”
“허허…… 제가 그랬습니까? 늙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뭡니까.”
능글맞게 시치미를 떼는 후작이었다.
“성자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그가 돌연 진지한 눈빛을 띠었다.
“성자님에게 신이란 대체 무엇인지요.”
……제법 난감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