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Episode. 28 바렌의 선지자들 (1)
신안으로 살펴본 세상은 마기가 어두컴컴하게 깔려 있었다.
나는 왕도를 내려다보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 너머엔 늘 불안이 일렁이고 있었다.
개중 심한 이는 이해 못할 폭력성도 보였다.
마기에 오염된 탓이었다.
그러한 현상은 하위 계층의 백성들에게 먼저 나타났다.
가혹한 현실은 인간을 벼랑 끝으로 내몰기 마련.
마음속에 그려진 선을 넘어서는 순간, 완전한 마인이 된다.
참 안타깝게도 한 번 마인이 되면 무슨 짓을 해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곧 빛이 퍼질 테니 걱정은 놓아도 되겠지.’
그렇게 내가 머무는 바렌 왕국을 살펴보곤 시점을 바꿨다.
순식간에 눈앞이 일그러지더니 이번엔 리오 성의 모습이 펼쳐졌다.
“으, 으아아!”
두려움이 가득 담긴 비명.
“거기 소리 지른 새끼 누구야! 당장 튀어나와!”
병사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의 고성.
바른말로도 평화롭다곤 할 수없는 리오 성이었다.
벌써 역병이 쏟아져 나온 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대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신앙은 널리 퍼질지어다!”
왕실이 보낸 기사와 병사들이 리오 성 앞마당을 뛰어다니며 찬송가를 불러 댔다.
아마 왕실의 귀족이나 국왕이 보았으면 뒷목을 잡았겠지.
‘잘하고 있네.’
정치엔 영 까막눈인 리오 성의 기사들은 내 조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새로 투입된 왕실 병력이 제아무리 잘났어도 결국은 샌님이다.
몸소 마기에 뒤범벅되며 싸워 본 적 없는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정말 맨몸으로 실전에 밀어 넣을 순 없으니 저렇게 담력 훈련이라도 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덕에 새로 투입된 병력은 내 이름과 신을 부르짖게 되었다.
내 입장에선 무척이나 경사였고, 바렌 입장에선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왕실은 어떻게든 왕권을 지키겠다고 국법까지 재정하려고 하는데, 여기선 여과 없이 나를 찾아 대니 말이다.
뭐, 사태가 사태이니 연합의 가주들도 어쩔 수 없었을 터.
‘이제 얼마 안 남았군.’
폴린 성 쪽에서 느껴지는 마기가 심상치 않다.
곧 역병이라는 이름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길고 긴, 쉬이 멈추지 않을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하급의 신격으론 폴린 성을 정화할 수도 없다.
군단장 칼고스의 저주는 강력하니까.
‘그렇다고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바렌은 자국의 상황을 악재에 악재가 겹쳤다고 평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지만은 않았다.
예로부터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적어도 나에게 마기와 폴린 성은 기회였다.
아, 그러고 보니 기회로 삼을 위기가 또 하나 있었다.
‘앨런 마르크스.’
다시 시점을 바꿔 보았다.
뭉텅이로 소모되는 신앙을 느끼며, 신안에 비춰진 세계를 응시했다.
“파이어 볼.”
화르륵!
성인 몸뚱어리만 한 불덩어리가 눈앞을 가렸다.
새빨간 불꽃에 검은 기운이 뒤섞인 혼탁한 마법.
앨런의 작품이었다.
“……젠장!”
불꽃을 흐뜨러트린 앨런이 발을 굴렀다.
졸지에 흑마법을 써 버린 자신이 혐오스럽다는 듯, 이를 악문 모양새였다.
‘고생한다.’
생각보다도 더 강인한 앨런의 정신력은, 두 고위 마족의 마기를 받아들이고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때란 건 대체 언제 오는 거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앨런이 중얼거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곱게 보관된 나뭇잎이었다.
계시를 통해 빛을 듬뿍 쬔 덕에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던 앨런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창백해져 갔다.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첫 계시 이후로 단 한 번도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계시는 그리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 만큼, 한 번에 확실한 효율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앨런이 좀 더 절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슬슬 그의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를 조짐이 보였다.
◈ ◈ ◈
신안을 중지하고 신도들을 찾아갔다.
앨런에겐 내일 계시를 내릴 생각이다.
제법 때가 무르익기도 했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도 상당한 고역이었으니까.
“리하르트으!”
잔뜩 성난 모리츠의 음성이 귀에 틀어박혔다.
또 왜- 하며 바라보니 그가 와락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만 축낼 거야?”
“거, 여기 도착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삼 일째야! 지금 이 순간에도 리오 성의 형제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텐데……!”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 걱정은 태산이다.
그런데 그게 모리츠뿐만은 아니었던 걸까.
“저도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저도요…… 용사님들이 밥은 잘 드시고 계시는지 우려되네요.”
어느새 다가온 아론과 메리가 내게 하소연을 해 왔다.
그 뒤로 보이는 신도들의 얼굴도 비슷했다.
“걔네들이 물가에 내버려 둔 어린애도 아니고, 왜 그래?”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 녀석들 잘 지내. 너무 걱정 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어떻게 알긴.
방금까지 보고 왔으니까 알지.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론을 뒤로하곤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듬직한 기사가 아니라 저어기 떨고 있는 바렌의 백성들이야.”
“백성들이요……?”
메리를 비롯한 스노우폴의 신도들이 눈을 빛냈다.
흡사 먹잇감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그래. 바렌에 호르교를 전도하기로 했다. 저들은 빛이 절실하거든.”
“꺄악!”
나보다 신난 건 스노우폴 신도, 그러니까 전도사들이었다.
선지자로 임명받았을 때처럼 주먹을 불끈 쥐는 게,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뭐야. 그런 거였어?”
뒤늦게 모리츠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 아니, 왜 네 독단으로 결정해?”
“내가 성자니까. 너는 일개 최하급 성기사고.”
내 생각을 모리츠가 어찌 알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호르교의 신도들을 한데 모아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기로 했다.
“바렌 왕국은 알다시피 영토 절반이 마기에 뒤덮였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를 잃었고, 정치적으로도 곤란한 입장에 처했지.”
설상가상으로 왕국 이곳저곳에 마인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바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몸은 병들었고 양팔마저 떨어져 나갔는데, 상대해야 할 적은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말이야.”
그래. 이게 알맞겠지.
내 적절한 표현에 메리가 해맑게 입을 열었다.
“아아! 한마디로 사면초가란 것이군요!”
“……그래. 아무튼 바렌 왕국은 리오 성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했다는 거야.”
신도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입을 헤 벌렸다.
“역시 성자님!”
“깊은 뜻을 몰라 뵀습니다.”
“어서 거리로 나가서 전도하지요!”
나에 대한 칭송을 외치던 이들이 당장에라도 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니. 우리는 따로 추려진 귀족들에게만 전도한다.”
“예?”
“사정이 있거든.”
마침 오늘은 그 귀족들이 찾아오기로 한 날이다.
“메리랑 전도사 열 명 정도만 나랑 같이 있고. 나머지는 쉬고 있어.”
호르교의 신도들에게 그리 말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기드?”
집사의 격식 차린 정장을 벗고, 가벼운 흉갑을 걸친 백전노장.
바텐베르크를 나선 순간부터 말수가 무척 줄은 기드 마이어였다.
“……저도 같이 가도 될는지요.”
“신도 안 믿으면서 무슨 전도를 하겠다고?”
“반대입니다. 이 노기사도 성자님과 같은 뜻을 품고 싶습니다.”
기드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러고 보면 그에겐 신에 대해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겠지.
“알겠어. 그렇게 하자.”
“감사합니다.”
◈ ◈ ◈
“자, 가세.”
“…….”
트란티스 후작이 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숭고한 임무를 부여받은 걸세.”
“그렇지요.”
국왕에 의해 발탁된 이들은 금세 제 처지를 이해했다.
신이 있든 말든, 리하르트의 빛이 마기를 몰아낸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종교 같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리오 성을 통해 알게 되었다.
후작을 포함한 귀족들이 해야 할 일은, 리하르트의 빛과 종교를 전도하면서도 왕권에는 영향이 가지 않을 방도를 찾는 것.
우선 오늘은 호르교의 교리를 배움으로써 첫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어떤 세뇌를 당할지 몰라.”
후작이 쉴 새 없이 신신당부를 해 댔다.
의심 많은 성격인 그는 리하르트를 도저히 믿지 못할 자라고 평했다.
물론 리하르트가 리오 성의 영웅이란 건 확실하나, 그렇다고 해서 수상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바렌의 선지자 여러분.”
열 명의 귀족은 곧 리하르트 앞에 당도했다.
리하르트 뒤엔 웬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십자 무늬의 휘장을 치켜들고 있는 것이 척 봐도 호르교의 신도였다.
“호르교의 교리를 듣는 것에 앞서, 메리 전도사의 설교가 있겠습니다.”
전도는 별다른 인삿말 없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꿀꺽. 후작이 침을 삼켰다.
어찌 됐든 이젠 바렌을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다.
빛이 간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호르교의 전도사, 메리라고 합니다!”
메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단아한 얼굴에 잔뜩 깃든 희열은 전도 그 자체를 즐기는 자의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메리에게 향할 때였다.
사아아-
“허, 허어…….”
“맙소사!”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후광이 흘러나왔다.
빛을 낼 수 있는 건 리하르트 뿐인 줄 알았던 귀족들에겐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트란티스 후작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따듯함.
리하르트의 빛만큼은 아니지만, 메리가 내뿜는 후광 또한 마기를 몰아내는 온기를 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저 빛이 리하르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저 빛을 뿜어내는 법을 알아내야만 한다!’
방법만 알아낸다면 왕실이 직접 빛을 뿌릴 수 있을 터.
그럼 그 어느 때보다 왕실의 권위가 드높아질 것이고, 흉흉한 민심 역시 안정될 것이다.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귀족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전의를 불태웠다.
호르교의 교리를 배운다는 목적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바렌은 지금 위험한 국면에 처했습니다. 하나! 걱정 마십시오! 호르의 등불, 리하르트 성자님께서 빛을 이끌고…….”
메리가 호르교의 휘장을 쥐어 잡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오오! 호르교의 위세가 과연 대단하군요.”
“벌써부터 마음 한편이 든든해집니다. 저희에게 호르의 빛을 전해 주신다니……!”
“저 찬란한 빛만 있다면 어떤 암운도 바렌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저번과 똑같았다.
입으론 감탄과 찬사를 연발하면서, 속으론 원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래선 안 됐다.
“메리, 그만해.”
“예?”
“역시 정신 교육부터 필요할 것 같다.”
그는 한창 설교 중이던 메리를 뒤로 물렸다.
귀족들의 머릿속엔 믿음보단 어떻게 빛을 이용해 먹을지로 가득 찼으니.
들을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이들에게 설교는 잔소리 나 다름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그렇지? 내가 호구 같잖아.”
애초에 웬만큼 신앙심이 없으면 빛을 부리지도 못할 텐데.
아무래도 진짜 믿음을 심어 줘야겠다-
리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