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Episode. 27 대화 (3)
“취익…….”
휴거는 심심했다.
활동성 많은 오크에게 한곳에 틀어박혀 있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내 근육이 다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오.”
“그런 게 걱정되면 훈련이나 하지 그래.”
잭이 심드렁하게 현답을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휴거의 마음을 달래 줄 묘안은 아니었다.
“훈련은 실전을 통해 쌓는 것이오.”
“그럼 대련이나 한 번 할까?”
“췩, 대단한 인간 전사 정도만이 나와 자웅을 겨룰 수 있지. 잭은 영 아니올시다.”
신랄한 거절에 잭의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저 오크답지 않은 오크의 머리통에 꿀밤이라도 한 대 놓아 주고 싶었다.
“산책이나 좀 하고 오겠소, 췩.”
하지만 휴거는 이미 저 멀리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제3기사단 숙소에 가만히 있으라고 리하르트가 몇 번이고 당부했건만, 드디어 그 얄팍한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흐흐.”
석상이 늘어선 정원 한복판에서 휴거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돼지코에 빨려 들어가는 건 마기 섞인 텁텁한 공기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휴거에겐 더없이 맑게만 느껴졌다.
사내 수백의 땀내보단 마기 하나가 백배는 났구려-
한차례 중얼거린 그가 두 손바닥을 맞댔다.
“호르 양반. 메리 소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고개를 치켜들어 바라본 하늘에선 신의 답따윈 보이지 않았다.
신은 항상 이렇다.
외쪽사랑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알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 한번 무거운 양반이구려.”
퉤. 손바닥에 침을 뱉은 휴거가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 따라 걸으면 메리라는 꽃이 나타날 거란 믿음을 갖고선.
◈ ◈ ◈
“취이이익! 동지는 꽃이 아니오! 아니란 말이오!”
“야, 왜 이래!?”
꽃을 기대하던 휴거의 앞에 나타난 건 모리츠라는 오크였다.
분명 바람결을 따라왔는데.
휴거가 배신당한 듯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왜 동지가 여기 있느냐는 말이오……!”
“지가 중검궁(中劍宮)에 와 놓고 뭔 헛소리야?”
“췩, 그럼 방에나 틀어박혀 있지 뭘 하러 돌아다니고 있소!”
“산책하고 있다, 왜!”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란 말을 어기고 돌아다닌 건 다름 아닌 휴거다.
모리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더욱 황당했다.
“이런 멍청한 돼지 자식이!”
“동족 혐오는 그만두시구려, 췩!”
부르르-
모리츠의 주먹이 떨렸다.
그의 속을 제대로 긁은 휴거는 콧잔등을 문질렀다.
“자자. 일단 앉아 보시오.”
어쨌거나 모리츠는 말동무로서 제법 나쁘지 않은 상대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으니 이 기회에 허심탄회한 대화나 나누어야겠다 생각했다.
‘어쩌면 신이 일부러 인도한 걸지도 모르겠구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넓은 땅에서 모리츠를 딱 마주쳤겠는가.
탁탁.
휴거가 옆자리를 두드리는 통에 흙먼지가 일었다.
“쯧.”
마침 모리츠도 말동무가 필요했기에 군소리 없이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자니 휴거의 머릿속에 두세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많이도 변했구려.”
“뭐가.”
“그땐 대단한 인간 전사가 없으면 벌벌 떨었잖소. 췩!”
붉고 두툼한 손가락이 정면의 깃을 가리켰다.
모리츠도 그제야 휴거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흐흐, 난 성벽 위에 주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 줄 알았소.”
리하르트가 영물을 길들이러 떠났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며칠 동안 모리츠는 성벽 위에서 살았다.
빛나는 연합군의 깃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끄러워!”
지우고 싶은 기억이 들춰진 모리츠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에 휴거가 껄껄 웃었다.
“쓰읍!”
눈을 부라린 모습마저도 휴거에겐 어린 오크의 투정처럼 보였다.
결국 모리츠는 한참을 더 웃음거리가 되어야 했다.
참다 못한 모리츠가 자리를 뜰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동지.”
느지막히 웃음을 그친 휴거가 모리츠를 불렀다.
“왜 자꾸.”
“후회 없는 선택을 하시오.”
“…….”
조금 전까지의 짓궂은 모습은 전부 연기였다는 듯, 휴거는 몹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옛일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소. 과거의 뜻을 따르며 살고 과거의 감정에 반응하며 살지.”
반면 오크는 현재를 산다.
과거를 일일이 기억하며 살기엔 뇌의 용량이 부족한 편이었다.
때문에 버릴 건 버리고, 배울 건 배웠다.
오크 특유의 육감은 그 과정을 거쳐 한층 예리해진다.
그런 예리한 육감으로 살펴본 모리츠는.
“난 동지가 매일매일을 살았으면 좋겠소. 오크답게.”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언제나 바텐베르크, 바텐베르크…….
정작 본인은 몰랐다.
저가 인생의 전부인 양 외치던 바텐베르크는, 부족한 자신을 다그치기 위해 자기 스스로 세운 뜻이란 걸.
“이제 동지는 부족하지 않소. 이 근사한 집안에 어울리는 어엿한 사내가 되었소. 취익.”
“…….”
“그럼 그다음 뜻을 정해야지. 어찌 부족했을 적에 세운 뜻을 그대로 따른단 말이오?”
툭.
거칠고 투박한 손이 모리츠의 머리통에 얹어졌다.
어릴 적의 휴거도 부족의 어른에게 이런 식으로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그럴 때면 늘 새로운 깨우침을 얻곤 했다.
‘동지도 마찬가지이길 바라오.’
다행히 이번엔 기도가 통했던 걸까.
입을 꾹 다문 모리츠의 표정이 제법 볼만하게 바뀌었다.
“……오크답게라니. 난 인간이라고.”
“흐. 그대는 정말 내 친척일지도 모르오. 날 똑 닮았어.”
“제발 헛소리 좀!”
◈ ◈ ◈
모리츠와 일별한 휴거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킁킁.
기분 좋게 길을 거니는데 어디선가 향기로운 꽃내음이 물씬 풍겼다.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 흠모하는 여인이 떠오르는 향이었다.
좋다. 이런 향을 내는 꽃이라면 필시 아름다울 것이다.
잔뜩 꺾어 그녀에게 가져다주자.
일련의 생각을 마친 휴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췩, 분명 이쪽…….”
향의 근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돌린 휴거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노란 꽃이 무성히 피어 있는 정원.
그 한편에 비치된 의자에 몇 번인가 본 적 있던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하.”
휴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바람결을 따라갔더니 동지를 만나고, 꽃내음을 따라갔더니 대단한 인간 전사의 집사를 만난다.
게다가 저 노인은 간간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무언가 사연 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드래곤을 함께 토벌한 자이니 못 본 척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호르 양반. 오늘의 큐피드는 나란 말이오? 좋소. 언젠간 나에게도 큐피드를 보내 줄 거라 믿소.’
약속의 의미로 새끼손가락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을 터였다.
적어도 신이라면 말이다.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 휴거가 기드에게 다가갔다.
“췩! 안녕하시오!”
“당신은…….”
기드가 휴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크의 얼굴이 대뜸 들이밀어진다면 누구든 놀라리라.
“리하르트 도련님의 전우분이셨지요. 워낙에 정황이 없어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벌떡 일어선 기드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을 보필하는 집사, 기드 마이어라고 합니다.”
“휴거라고 하오. 췩, 그대 창 솜씨가 정말 일품이더구려.”
“예?”
“드래곤을 토벌할 때 나도 있었다오.”
“아…….”
기드가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기억 저편에 붉은 오크 하나가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자자, 어서 앉으시오! 나는 격 같은 거 안 차리는 게 더 편하다오.”
의자에 앉은 휴거가 옆자리를 팡팡 내리쳤다.
그 작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기드도 얼결에 자리에 착석했다.
“하하…… 글로리아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소검궁까지 찾아오시고.”
“글로리아? 나는 오직 메리 소저만을 사랑한다오.”
난데없는 짝사랑 고백에 기드는 땀을 흘렸다.
정말 특이한 성격이었다.
오크는 다 저럴까.
“글로리아는 이 노란 꽃의 이름입니다.”
“아! 이거야 원, 무식해서 미안하오.”
슥-
휴거의 팔이 꽃을 향했다.
“꺾으면 안 됩니다만…….”
“췩, 그런 거였소?”
머쓱함을 담은 긁적임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아쉽게도 메리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는 건 무산된 것 같았다.
“글로리아의 꽃말은 영광의 찬가이지요.”
“호오! 그것참 대단한 인간 전사와 어울리는구려.”
“대단한 인간 전사……?”
어리둥절한 기드의 표정을 본 휴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리하르트 말이오.”
“아.”
기드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사무쳤다.
“그분을 대단한 인간 전사라 부르는 겁니까?”
“췩, 그렇소. 그는 대단하니까.”
“……궁금하군요.”
정말. 정말로 궁금했다.
리하르트가 대체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길래.
어떻게 했기에 이리도 큰 신뢰를 내비치는 걸까.
“무엇이 궁금하단 거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말해 드리겠소.”
“…….”
기드는 리하르트가 낯설었다.
그의 변모한 모습을 자랑스레 여겼으나 이제는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변해도 너무 변했으니까.
아예 다른 사람 같으니까.
“휴거 님께선 신을 믿으십니까?”
그 중심엔 리하르트가 부르짖는 신이 있었다.
기드가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신의 존재 여부를 묻는 거라면, 당연히 있다고 믿소. 췩!”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신을 섬기는 거냐고 묻겠습니다.”
“일단은 섬기기는 하지.”
일단은…… 이라니.
모호한 답이었다.
“췩, 그런데 신은 멀기만 한 존재라오.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말하더군.”
“제3기사단이 말입니까?”
“그렇소.”
휴거는 제3기사단의 숙소에서 지내는 만큼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 빠지지 않는 게 신과 리하르트였다.
“기도를 해도 답 한 번 주지 않고, 내 눈앞에 나타난 적도 없지. 사실 신은 없다- 라고 대단한 인간 전사가 말해도 새삼 충격받지는 않을 거라오.”
“그럼 다들 어째서 리하르트 도련님을 따르는 겁니까?”
기드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휴거는 몰라도 제3기사단까지 그리 생각한다면, 바텐베르크를 떠난다는 그들의 결정이 납득되지 않았다.
“신의 힘이랍시고 일어난 모든 일이 실은 대단한 인간 전사가 행한 것 같으니까. 췩!”
그 의문의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예?”
“그거 아시오? 우리 보고 신의 모습을 떠올리라 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대단한 인간 전사를 머릿속에 그려 낼 것이오. 왜인진 몰라도 그냥 그렇소.”
리하르트에게 무엇을 보았길래.
철부지 도련님이 무엇을 보여 주었길래.
“신의 힘이라고 하셨습니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기드는 알고 싶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리하르트와, 다른 이들이 바라보는 리하르트가 얼마나 다른지.
리하르트가 원하던 ‘새로운 주군을 대하는 태도’는 대체 어떤 것인지.
“더 말해 줄 것도 없겠구려.”
척.
휴거의 붉고 두툼한 손가락이 저 멀리 한군데를 가리켰다.
꽃이 만개한 정원 너머에 보이는 본궁을.
그리고 그 높디높은 건물의 지붕 위엔…….
“도, 도련님?”
바텐베르크의 깃을 잡고 서 있는 리하르트가 있었다.
저긴 왜 올라간 걸까.
어안이 벙벙한 기드가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본궁 쪽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하르트가 쥔 깃에서 빛이 폭사한 것도 그 직후였다.
“흐흐…… 멋있지 않소?”
기드는 답하지 못했다.
부릅뜬 눈으론 리하르트의 빛을 바라보았고, 귀로는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저마다 제 할 일을 하던 가신들이 고개를 쳐들곤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빛 닿는 곳, 찬송가가 닿는 곳은 마기가 훌쩍 물러났다.
바텐베르크에 오랜만의 상쾌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 아아…….”
저분이구나.
다른 이들이 그토록 따르는 ‘리하르트’가.
기드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