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Episode. 27 대화 (2)
이튿날.
나는 진정 내 사람이라 생각되는 녀석들을 만나러 갔다.
머릿수가 머릿수다 보니 불러들이는 것보다 내가 직접 가는 게 더 간편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제3기사단의 숙소.
널따란 정원에 역대 단장이라는 사내들의 석상이 즐비한 병영이었다.
그 석상 중엔 중년 시절의 기드도 있었다.
깔끔히 빗어 올린 머리에 창을 잡은 모습이 꽤 멋있어 보였다.
“이야, 저런 거 세우면 뿌듯하지 않아?”
나란히 걷는 기드의 팔을 툭툭 찌르며 물었다.
나도 내 석상 하나 세우는 게 꿈인데, 기드는 아니었던 걸까.
푸우- 한숨만 내쉬기 바빠 보였다.
쩝.
어제부터 이 상태다.
새로운 주군을 섬기라는, 옛정은 끊으라는 내 말이 제법 충격이었나 보다.
“아이고! 이제 오셨습…….”
제3기사단의 기사 하나가 날 반겼다.
그러다가 입을 텁 하고 다물었다.
우중충한 표정의 기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하, 기드 경께서도 오셨군요! 이리 모시겠습니다.”
머쓱한 웃음으로 무마한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걸음이 멈춘 곳은 기사들이 무를 갈고닦는 연무장이었다.
“다들 일찍 왔네?”
미리 기별을 넣었던 터라 제3기사단은 물론이고 아론과 휴거, 모리츠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중대 발표라는 사안 아래 집결한 이들.
과연 이 중에 끝까지 내 사람일 녀석은 얼마나 될는지, 이제부터 알아볼 셈이다.
“대체 뭔 소릴 하려고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야.”
“취익, 바쁜 것치곤 대단한 인간 전사의 부름에 가장 먼저 달려오지 않았소?”
“이익!”
괜히 튕겼다가 본전도 못 찾은 모리츠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대로 두면 빽 소리를 지를 게 뻔했기에 손뼉을 쳤다.
“거기 떠들지 마.”
시선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난 좌중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내들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 놈도 있었고, 존경과 신뢰를 담은 시선을 보내는 녀석도 있었다.
저것들이 조금 뒤엔 어떻게 변할까.
어떤 선택이든 존중하자 마음먹었지만, 역시 날 따라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가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디어……! 가주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천천히 말을 골랐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집을 나가라더군. 바텐베르크보다 작은 집단의 교리를 따를 생각이 없다면서.”
“……!”
“그래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언젠가 이곳의 기사들을 신도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야.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기사들이 침묵에 잠겼다. 부릅떠진 눈은 툭 치면 빠질 것만 같았다.
“나와 함께 바텐베르크의 문장을 떼어 낼 자가 있는가. 함께 온 대륙에 호르교의 교리를 펼칠 신도가 있는가.”
대답은 없었다.
“강요는 하지 않는다. 이곳에 남는다고 해서 나와 너희들과의 유대가 깨지는 것도 아니다.”
저마다의 뜻과 꿈을 갖고 바텐베르크의 문을 두드렸던 기사들이다.
나와 같이 한 몇 달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을 이곳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에 맡겼다.
충성과 신의를 무기 삼아 날 따르던 이들을 억압하고 싶지 않았다.
바텐베르크냐, 호르교냐.
지금은 결코 섞이지 못하는 두 집단이 양자택일을 권한다.
이들은 한 가지 길만 골라야 했다.
그 끝이 다시 한 갈래로 이어진다 해도.
“…….”
조용한 좌중.
사내들의 얼굴에 갈등이 맴돌았다.
그때 아론이 성큼 앞으로 나왔다.
“성기사 아론. 도련님과 함께할 겁니다.”
무릎을 꿇곤 다부지게 가슴을 두드리는 사내.
그 모습이 기사 서약을 맺었을 때와 겹쳐 보였다.
“고맙다.”
내 말에 그가 씨익 웃었다.
그러곤 내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나를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젠장! 선수 뺏겼네!”
돌연 누군가가 큰소리를 냈다.
누군가 하니 제3기사단의 잭이었다.
“2등은 내가 하련다.”
“넌 빠져. 나보다 약하잖아.”
“그래! 서열 순으로 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얼굴들에는 어느새 굳은 결단이 자리 잡아 있었다.
“저희가 아니면 누가 성자님을 보필하겠습니까?”
“어디든 따라간다 했으니 한 번 뱉은 말은 지키렵니다.”
“휘장의 후폭풍은 예상했는데 조금 충격적이긴 하군요. 뭐, 도련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나는 한차례 크게 숨을 쉬었다.
코끝이 찡해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기사들의 생각이 간결한 편이라 해도 이 자리에서 답을 줄 줄이야.
“……왜지?”
제가 속한 가문을 떠날 정도로 이 녀석들의 믿음이 깊었던가.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금방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였나.
“그야 도련님이 떠난다고 하시니까요.”
“신도 신이지만…… 역시 도련님을 혼자 보낼 순 없다고 해야 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라고 계시를 받았습니다. 어젯밤 꿈속에서요.”
내 의문은 너무도 간단한 대답으로 해결되었다.
멀뚱멀뚱 날 바라보는 사내들.
바보 같게도 신이 아니라 날 따르겠단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같은 말이어도, 기드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내 사람.
‘리하르트’가 아니라 진정 나를 따르는 명검들이었다.
“그럼, 이제 바텐베르크의 도련님이 아니니 말 놓아도 될까요?”
“시끄러워. 이젠 성자님이라 불러.”
제3기사단장 폴크가 낄낄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게 아주 어림없는 소리라 단칼에 거절했다.
“취이익! 우리 부족에선 여행을 떠나는 부족원을 축제로 배웅했지. 여기는 그런 거 없소?”
“리오 성에서 배 터지게 먹어 놓곤 또 연회를 찾는다고?”
“내버려 둬, 돼지잖아.”
휴거가 콧소리와 함께 연회를 부르짖었다.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층 유해졌다.
모리츠가 빼액 소리를 지르기 전까진.
“이, 이건 아니지!”
얼굴 한가득 불만을 품은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척- 치켜든 손가락은 이쪽을 가리킨 채였다.
“리하르트!”
“왜?”
모리츠는 연신 씨근덕거리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다소 충격이 큰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모리츠에게 이곳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을 테니까.
“나한테 바텐베르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으면서……!”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상황이 이런 걸 어떡하라고.”
“으으……!”
꽉 그러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꽤 난감할 것이다.
입만 열면 바텐베르크에 어울리는 사내가 되겠다느니, 존경하는 아버지와 둘째 형을 본받겠다느니.
이 집안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굴던 모리츠가 아닌가.
“강요는 안 한다니까.”
내키지 않으면 남으면 된다.
난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바텐베르크가 되기 위하여 신을 믿었더니, 이제는 신을 위해 바텐베르크를 떠나야 한단다.
황당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넌 너한테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 네 인생이야.”
그래서 미련을 품지 않았다.
모리츠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존중할 것이다.
“……젠장!”
분에 못이긴 모리츠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를 붙잡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휴거만이 몸을 움찔거렸다.
“취익, 괜찮은 거요?”
“어쩔 수 없는 거지.”
저게 거절의 뜻은 아닐 것이다.
깊은 고민 끝에 답을 내리겠지.
떠난 모리츠의 자리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일주일 뒤에 바텐베르크를 떠난다. 바렌 왕국이 우리의 거점이 될 거야.”
나는 일정을 간략히 전달했다.
바렌이라는 소리에 기사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바렌 왕국 말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리오 성이지.”
가주가 종교를 받아들이든 말든, 나는 다시 리오 성으로 향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리오 성과 바렌 왕국은 호르교의 거점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바렌 왕국에서 완전히 새 출발을 해야겠다.
머릿속에 앞날이 그려졌다.
“너희에게 바텐베르크라는 영광은 따라오지 않을 거야.”
기사들이 억센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호르의 광명은 너희와 함께할 것이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우렁차게 호르를 부르짖었다.
이런 걸 두고 도원결의라 하던가.
난 복잡한 기색의 기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대화를 조용히 듣던 그는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 같았다.
갑작스런 종교도, 변한 내 모습도 적응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툭툭.
나는 말없이 기드의 어깨를 두드리곤 자리를 벗어났다.
◈ ◈ ◈
“기어코 쫓아내기로 한 게냐.”
발락이 혀를 차며 핀잔을 건넸다.
그 앞에 앉은 루드비히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엔 건방진 얼굴의 아들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그 아이의 족쇄를 풀어 주었을 뿐이다.”
제 입으로 온 대륙에 믿음을 전파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텐베르크라는 이름은 오히려 발목을 붙잡을 터였다.
남대륙에서 이곳의 위세는 악명과도 같았으니까.
“족쇄는 풀어 줘도 날개는 달아 주지 않는구나.”
새장 안에 가둬 두지 않은 게 다행이다만-
발락이 중얼거리며 낄낄 웃었다.
“발락. 너는 리하르트를 따라갈 건가?”
“어차피 별 두 개로 할 수 있는 건 다 알려 주었다.”
나머지는 리하르트가 검성의 힘에 얼마나 숙달되느냐에 달려 있었다.
물론 발락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할 생각은 없었다.
“별 네 개가 되면 다시 만나기로 했지.”
“그렇게 제자를 찾아다니더니. 이제 와서 방치를 하는군.”
“방치가 아니라 숙성시키는 거다.”
병 안에 든 성주가 찰랑거렸다.
“너도 기대되지 않느냐? 그놈이 어디까지 갈지 말이다.”
“흥, 어중간하게 갈 거라면 시작도 안 했겠지.”
“크흐흐…… 아주 믿음이 넘치는군. 며칠 전과는 딴판이야.”
발락은 성주 한 병을 모조리 비우고 나서야 떠났다.
그렇게 혼자 남은 루드비히는 자기 앞에 놓여진 성주를 병째 들이켰다.
족쇄는 풀어 줘도 날개는 달아 주지 않는다라.
틀린 소리는 아니었으나 꼭 맞는 소리도 아니었다.
루드비히가 보고 싶은 건 오롯이 대성한 리하르트였지, 빌빌거리는 아들이 아니었다.
하물며 리하르트가 걷는 길엔 모리츠도 함께할 터였다.
루드비히는 모리츠가 리하르트를 따라나설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우를 바라보는 시선엔 커다란 존경이 담겨 있었다.
마치 주군에게 충성을 바친 충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리하르트는 대체 무슨 수로 모리츠를 구워삶은 걸까.
둘의 사이는 분명 좋지 못했을 텐데.
“후우…….”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두 아들을 떠나보내는 만큼 빈손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나마 아비 노릇을 해 볼 셈이었다.
그의 시선이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세 개의 목함으로 향했다.
철컥-
그중 두개를 열어 본 루드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지 않은 목함은 논외로 쳐야 했으나, 나머지 두 개는 선물치곤 제법 괜찮은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