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Episode. 26 금의환향 (3)
“조부님!”
아론이 감격에 겨워 외쳤다.
하지만 닿지 못할 외침이었다.
“도련니임!”
그 대상인 기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아, 엇갈린 운명이여.
나를 신경 쓰는 건 알겠는데, 자기 손자의 충격받은 얼굴도 봐 주었으면 좋겠다.
“대체 저게 뭐랍니까!”
그가 방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휘장을 가리켰다.
가주 앞에서 자랑스레 치켜들었던 호르교의 깃이었다.
기드, 이 노인네는 다짜고짜 나를 방으로 끌고 와선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한창 망나니 짓거릴 할 때에도 허허로이 넘어가 주더니 웬일이람.
“왜 이렇게 난리야. 그보다 후유증은 완전히 사라졌나 봐?”
난 은글슬쩍 화제를 넘기며 기드의 몸을 살폈다.
간만에 보게 된 기드는 참으로 많이 변했다.
아니, 이제야 내가 그의 기세를 느낄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마스터급…… 그것도 중상격이다.’
제3기사단의 전(前) 단장이라더니 그 경지가 상당했다. 저 정도면 웬만한 무가의 가주보다도 강해 보였다.
현 기사단장인 폴크도 마스터급에 도달하진 못했는데.
“담금질의 영향인 것인지…… 후유증이 낫다 못해 전성기 이상의 육체를 얻었습니다.”
어쩐지.
난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담금질로 육체를 몰아붙인 뒤 세계수의 열매로 치료.
그야말로 기연이나 다름없다. 경지가 일취월장할 만도 했다.
어쩌면 뭔가 깨달음을 앞두고 있을지도.
“그보다!”
기드가 인상을 굳혔다.
잘 넘긴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드디어 철이 드셨나 싶었건만……!”
“할아버님. 일단 조금만 진정을…….”
흥분한 노인을 손자가 막아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불똥이 그쪽으로 튀어 버렸다.
“아론! 너는 도련님을 말리지 않고 무얼 했느냐. 내 너를 믿고 맡긴 것이 실수였단 말이냐.”
“…….”
“폴크, 잭! 너희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아론과 제3기사단장 폴크, 잭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 때문에 꾸중을 듣는 모습을 보자니 영 껄끄러웠다.
“진정해. 진정.”
“하아…… 지금 진정이 되게 생겼습니까.”
무엇이 그리도 큰일이라고.
호르교의 휘장을 치켜든 게 이렇게까지 난리가 날 일이란 말인가.
종교로 시작해서 종교로 역사를 이어 가던 세계인데, 이제는 종교의 자유는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니 참 슬픈 노릇이다.
“가주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어떤 벌을 내리실지 감히 짐작되지도 않습니다.”
기드의 말에 대꾸한 건 잠자코 있던 휴거였다.
“취익, 그 양반 표정 한번 살벌하더군. 당장 검을 뽑을 기세였소.”
육감 좋은 오크가 그리 말할 정도면 과장이 아닐 것이다.
“하하! 하마터면 복귀하자마자 죽을 뻔했네.”
“웃음이 나오십니까아!”
“기드, 너 회춘하긴 했나 봐. 활기 넘치는 게 참 보기 좋아.”
“도련님!”
학을 떼는 기드를 보며 재차 웃었다.
아론도 제 할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에 다행이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방 안의 인원을 살폈다.
기드, 아론, 휴거, 폴크, 잭…….
참 많이도 모여들었구나.
왜 내 방에서 이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벌컥-
“리, 리하르트…… 우리 정말 괜찮은 거냐?”
모리츠가 찾아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사정없이 떨리는 동공이, 자신이 그리도 벗어나고 싶어 하던 옛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휴.”
마기도 제법 극복한 놈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 ◈ ◈
바텐베르크엔 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기사들도, 시종과 하인도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금의환향을 하는 줄 알았던 리하르트 바텐베르크가 거하게 사고를 쳤으니까.
후계자 후보로서 은연중에 지크 바텐베르크의 대적수로 꼽히던 만큼 충격이 더욱 컸다.
그가 치켜든 휘장을 보고 다들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이건 예전의 망나니 시절과 같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가주 앞에서 바텐베르크 외의 깃을 치켜드는 건, 일국의 왕 앞에서 다른 나라의 깃을 치켜드는 것과도 같다.
하물며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왕자가 말이다.
그러한 사고에 밝게 반짝이던 신앙의 힘도 가려졌다.
수많은 뒷이야기가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입에서 입으로.
주거니 받거니 반복되던 이야기는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나갔다.
[십자 휘장이 상징하는 집단은 바텐베르크의 검 앞에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리하르트와 모리츠의 후계자 자격은 물 건너갔다.]
[두 혈통이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는 수다스런 시종과 하인들의 입방아에나 오르내릴 헛소문이었으나, 이내 우직한 기사들도 귀를 쫑긋 세울 만큼 자극적으로 변모했다.
“대체 바렌 왕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그 휘장은 또 무엇이고.”
듣다 못한 기사 하나는 직접 찾아가 묻기도 했다.
하나 마땅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뜻을 따를 뿐이오.”
제3기사단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였고.
“꽤 즐거웠는데 아쉽소. 그저 언젠가 기회가 오길 바라고 있소.”
제1기사단은 영문 모를 소리만 해 대기만 했다.
덕분에 소문은 점점 격하게 치달았다.
리하르트와 모리츠에게 제3기사단이 줄을 섰다.
제1기사단은 그들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충심을 지켰다.
십자는 역모의 집단이다.
곧 온 집안에 칼부림이 날 것이다……
“염병.”
리하르트가 귀를 후볐다.
하도 수군덕거리는 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시도 때도 없이 귀가 가려웠다.
그저 다른 집단의 휘장이란 것만 보고도 이런데, 그 집단이 종교 집단이란 걸 알면 얼마나 더 난리를 칠까.
그가 툭, 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복귀한 지 5일째 되는 오늘, 분위기는 나아질 생각을 않고 오히려 긴장감만 짙어져 갔다.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다 귀찮다.
온종일 따라다니는 시선도 거슬리고, 이렇게 잔소리가 심했나 싶은 기드의 핀잔도 듣기 싫다.
어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데 가주의 호출은 여태 들려오지 않았다.
“도련님.”
그런 그에게 레오가 찾아왔다.
“혹 저희한테 서운하지는 않으신지.”
“…….”
리하르트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다, 씩 웃으며 말했다.
“아주 서운하니까 이쪽에 붙어. 너도 휘장 한번 치켜들자.”
“그건 좀…….”
“에이, 뭐야.”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거절당했음에도 리하르트가 웃을 수 있는 건, 지금의 선택이 미래의 선택과는 별개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좀 어때.”
“뭐…… 저도 보고 드릴 때 이후론 뵙지 못했습니다. 역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
“화만 나면 다행이게. 들리는 소문으론 칼부림까지 날 거라던데.”
레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이 검보다 입을 더 잘 다루더군요.”
“오랜만의 망나니짓에 신난 모양이야.”
“…….”
돌연 그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더 좋은 수는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도련님은 너무 극단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꼭 거기서 휘장을 치켜들어야 했느냐고, 레오는 그렇게 물었다.
그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격한 게 뭐가 문제야?”
“예?”
“그간 레오 경과 수없이 얘기를 나누었지. 과연 가주가 종교를 쉬이 받아들일까에 관해서.”
“그렇지요.”
“그래서 답이 뭐였지?”
“……가주께서는 결코 종교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입니다.”
그것 봐.
리하르트가 말갛게 그를 응시했다.
“나도 종교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설득해서 될 문제면 진작에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주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신을 믿지 않는 세계에서 군림하는 자는 곧 죽어도 신을 믿지 않는다.
리하르트는 그것을 레오를 통해 깨달았고, 발락을 보며 확신했다.
가주가 신을 부정하는데, 그 아랫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기사처럼 고지식하고 우직한 자들이 주군의 신념과 반하는 짓을 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의 답은 리하르트의 눈앞에 있었다.
레오와 제1기사단.
그들은 리오 성을 떠남과 동시에 신을 잊었다.
의도적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처음부터 약조했던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한 번 발을 담갔던 자들조차 이러한데 남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때문에 과격한 방법을 선택했다.
모두의 앞에서 휘장을 치켜든 것은 선전 포고와 같은 행위.
이 싸움에서 리하르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종교의 자유였다.
당신이 신을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으니, 가신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달라.
오직 그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서로의 이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면, 바텐베르크를 박차고 나가야겠지.
“…….”
한데 왜.
레오는 답답하다는 눈을 하고 있는 걸까.
리하르트로선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 ◈ ◈
레오가 나가고 얼마 뒤, 기드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주의 호출이었다.
“도련님.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십시오. 실수로 다른 깃을 집어 들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애걸복걸하는 기드를 뒤로하고 가주에게 향했다.
어떻게든 내가 후계자 후보 자격을 유지하길 바라는 눈치인데…….
거참, 미안하게 되었다.
집무실에서 나올 땐 나는 더 이상 바텐베르크가 아닐지도 모른다.
혈통 좋게 태어나 맘껏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될 확률이 아주 높지. 그 꼬장꼬장한 양반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었다.
난 이미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쳤으니.
이곳의 모든 건 애초에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을뿐더러, 이제 와 잃는다 하더라도 아쉽지 않을 정도의 세력과 힘을 키웠다.
바텐베르크의 울타리 안에서 눈치나 보는 것보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빛을 전파하는 게 내겐 더욱 가치 있는 일이었다.
“가주를 뵙습니다.”
나는 전투태세를 단단히 갖춘 채 가주를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호통을 치려나.
어쩌면 살기를 날릴 수도 있다.
모두 지레짐작이었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도 없다.
곤두선 신경이 온통 가주에게 쏠렸다.
“왔느냐.”
그런데 가주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리오 성에서 큰 활약을 했다지.”
무표정 속에 감춰진 건…….
체념 혹은 기대.
둘 중 무엇인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두 자루의 별을 다룬다는 것도 들었다. 장하구나.”
“…….”
이건 예상외의 반응인데.
난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게, 가주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경계심을 풀거라. 이 아비가 네 적이더냐.”
“방금까진 적이라 생각했습니다.”
“후.”
그가 웃었다.
그다지 유쾌해 보이진 않는 웃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부르지 않았느냐.”
김이 푸스스 빠져 버렸다.
나는 적국에 당도한 사신(使臣)처럼 온몸에 긴장을 꽉 조이고 있었데, 정작 가주는 나를 아들로서 대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