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Episode. 25 하급 신 (3)
연합이 리오 성에 복귀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리하르트는 틈틈이 대륙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 감상을 말해 보자면…….
“아주 난리 났네.”
이것이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북대륙, 남대륙 할 것 없이 말이다.
전부다 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마왕의 마기와 폴린 성에서부터 뿜어진 마기가 알게 모르게 온 대륙에 퍼져 나갔다.
정신력 약한 이는 마인이 되어 미쳐 날뛰었고, 격 낮은 괴물은 마기에 잠식돼 마수가 되었다.
그것들의 숨결에서 또다시 마기가 흘러나오니 그야말로 대혼란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까짓 마기에 마인까지 나타나진 않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 따윈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지 않던가.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인간들의 틈을 마기가 파고든 것이다.
“일단 지금 문제는 마법사들이 아니야.”
그쪽도 마인과 마수에 눈 바삐 돌아가는 중이다.
더불어 야심차게 모여든 마법 연합도 호되게 당한 후였다.
당장에 허튼 짓을 할 짬은 안 날 터.
리하르트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건 앨런과 마인, 마수들의 동향이었다.
특히 그는 앨런 마르크스를 하루도 빠짐없이 주시했다.
과연 ‘마법제일가 마르크스의 역대급 천재 신동’이라는 길고 긴 수식어에 걸맞은 정신력이라고 해야 할까.
고위 마족 둘의 마기를 저 혼자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무너질 모래성이었다.
머잖아 내면의 폭력성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냉철한 이성은 붉게 달아오를 터.
분노와 살의만이 남은 끔찍한 살인귀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리하르트가 나섰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무슨 권능 한 번에 20만이나 빠져나가!”
간밤의 일을 떠올린 리하르트가 연신 투덜댔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권능 ‘계시’의 능력은 다시금 떠올려 봐도 굉장했다.
‘신안’과 연계하여 쓸 수밖에 없는 그 권능은 사물을 매개체로 삼고서 이루어지는 강림이었다.
리하르트라는 인간의 껍데기를 벗은 신격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그 콧대 높은 앨런 마르크스가 주저 없이 무릎을 꿇을 정도였으니.
덕분에 일이 수월히 잘 풀린 듯싶었다.
다만, 그 힘의 대가는 고작 몇 푼의 신앙만이 아니었다.
계시를 끝마친 뒤엔 심장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신격을 꺼내는 행위가 육체에 큰 부담을 주는 모양이었다.
다만 그런 리스크를 가졌음에도 유용하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내 딴엔 위엄 넘치게 말한답시고 노력했는데, 이상하진 않았으려나 모르겠네.”
앨런에게 내린 세 가지의 계시.
사실, 아무런 쓰잘 데 없는 요구들이었다.
계시를 내리는 데에 꼭 나뭇잎일 필요도 없었다.
삼 일을 굶고 열흘을 수양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때를 애타게 기다리라는 말은 연인 사이에나 할 법한 밀당질이었다.
그런데 맞았다.
리하르트가 원한 건 앨런과의 밀당이었다.
한 번이라도 더 자신을 생각하도록, 조금이라도 더 깊은 여운을 남기도록.
앨런을 성급히 신도로 만들었다간 성자라 칭해지는 리하르트를 보곤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놈은 기사…… 그중에서도 바텐베르크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겼으니까.
그 와중에 리하르트는 한 가지 진리를 깨우쳤다.
‘연애와 포교는 한끝 차이로구나!’
무릇 이상형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간 대차게 까이기 일쑤다.
마찬가지로 앨런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근차근 공을 들이고, 길을 들이는 것이 더 안정적이었다.
“후후…….”
히죽 웃어 보인 리하르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제법 연애 전문가란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 ◈ ◈
“와아아! 연회다-!”
사내들이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하는 말만 들어선 이제 막 연회가 시작한 것 같겠지만 그건 크나큰 오해였다.
연회는 이미 사흘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오늘도 술판이 벌어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거나하게 취한 얼굴들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그 증거였다.
“하아…….”
성주(聖酒)를 먹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는 의미로 선뜻 만들어 준 성주가 이리도 인기 있을 줄이야.
마시면 취하는 건 그냥 술이든 성주든 똑같다.
그런데 성주는 그 안에 담긴 신앙이 취기를 적당히 유지시켜 주었다.
가뜩이나 맛난 술을 딱 좋게 취한 상태로 들이부을 수 있으니, 기사들이 환장할 만도 했다.
덕분에 요 삼 일간 술에 들이부은 신앙의 양도 적지 않았다.
“마셔! 마셔어!”
“부어! 부어어!”
기사들이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 손엔 자기 얼굴만 한 고기를 들고 있었는데, 저것들이 오크인지 기사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발락은 뭐…… 아예 술통에 얼굴을 처박고 계시고.
참 정신없는 광경이었다.
“취이익! 이쯤에서 노래 한 곡 뽑아야 하지 않겠소!”
휴거가 벌떡 앞으로 나와 누렁니를 자랑하며 말했다.
이에 맛좋은 성주에 거나하게 취한 기사들이 휘파람을 불어 대며 호응해 주었다.
놈의 괴성을 들을 생각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건 나뿐인 듯했다.
곧 휴거가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오오! 췩! 나의 여신, 메리여!”
맙소사.
오오췩이라니. 나의 여신 메리라니.
당장에라도 저 흉측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대의 눈망울엔 빛이 있소~”
“와악!”
음정도, 박자도 뭣도 없는 노래에 구애의 가사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는 음공(音攻)이 되었다.
나는 귓구멍에 손가락을 꽂아 넣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거의 노래에 왁자지껄 웃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런데 정작 노래의 주인공인 메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나라도 정말 싫을 것이다.
저 미친놈.
연애 전문가로서 장담컨대, 휴거는 메리와 이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도련님.”
혀를 차고 있을 때 옆에서 레오가 말을 걸어왔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정말 바텐베르크를…….”
“왜, 벌써 아쉬워?”
은근하게 되묻자 레오가 시선을 피했다.
그에 낄낄거렸더니 애꿎은 고기만 우적대기 바빠 보였다.
“아버지 반응에 따라 다른 거지, 뭐. 그보다 레오 경.”
“예?”
“뭐가 되었든, 다음부턴 쉽지 않을 거야. 레오 경한테도 말이야.”
“…….”
레오는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언데드와의 전투가 수십 번 반복되는 와중에도 말이다.
양떼 속 늑대처럼, 생명의 위기 같은 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언데드에게 고전하기엔 레오는 대륙에 몇 없는 강자였으니까.
물론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해서, 그가 설렁설렁 싸운 건 아니다.
다만 꼭 연합이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의 몫은 다른 이들 모르게 남겨 두었을 뿐이다.
마치 연합을 훈련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정확히 말하면 나와 연합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버지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진 모르겠지만, 앞으론 괜히 훈련관 노릇 하려거든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레오는 답이 없었다.
의미 모를 눈으로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나도 가만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쯤 했으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 ◈ ◈
바렌티스 국왕이 리오 성을 방문한 건 연회가 끝나고 다시 이틀이 지난 뒤였다.
국왕의 눈에 리오 성의 웅장한 모습이 들어왔다.
성벽에 내걸린 채 펄럭이는 수많은 깃발.
그 위에 다부진 얼굴을 하고 경례를 올리는 성의 수호자들.
혹여나 무너질까 밤잠을 설쳤던 리오 성은 이렇듯 굳건히 국왕을 맞이했다.
“아아!”
성을 눈앞에 둔 국왕은 체통을 지키기 어려울 만큼 진심으로 감격했다.
자국에 도래했던 암운에 잔뜩 피폐해진 몸으로나마, 기사들의 어깨를 몇 번이고 두드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꼭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북대륙의 진정한 황족이라 불리는 바텐베르크 가문의 네 번째 혈통.
한창 피와 죽음이 기승을 부릴 때.
그가 이곳으로 향하겠다며 왕도의 문을 두드렸단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바텐베르크의 신분을 생각하면 호화로운 대접을 맞이해야 하건만, 그 시점엔 이미 리하르트가 왕도를 거쳐 리오 성으로 떠난 후였다.
과연 그가 리오 성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바텐베르크라 하더라도 리하르트에겐 별개의 평가가 더해졌다.
바텐베르크의 수치라는 별명은 북대륙에서 참으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 그 평가는 완전히 틀렸다.
종전의 승전보와 함께 줄줄이 딸려 온 소식에 국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분께서 빛을 이끌고 오셨다.’
‘신의 계시를 받고 적의 사특한 계획을 완전히 무마시키셨다.’
‘끝없는 악몽도 성자 앞에선 한낱 개꿈이었다.’
국왕은 그 이야기들을 쉽게 믿지 못했다.
신이라니. 성자라니.
그저 위대한 신분의 위상을 추켜세우기 위한 미사여구일 것이라 여겼다.
한데 그 생각마저도 틀린 듯했다.
“바렌티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간단한 격식을 갖춘 채 인사를 건네는 청년.
아니, 소년이지만 청년 같은 모습을 한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그를 본 국왕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갈고닦은 무(武)라곤 검술 몇 자락이 전부지만, 보는 눈만큼은 기사 못지않다 자부하는 국왕이었다.
리하르트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최소 최상급 이상.
어쩌면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이 분위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용맹한 기사들이 입을 모아 성자라 칭송하더라니.
가만히 있음에도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은 피폐해진 국왕의 마음을 넉넉히 달래 주고 있었다.
“바렌 왕국을 대표해 바텐베르크의 혈통에 경의를 표하오. 참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체통을 지켜야 함이 이리도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때 리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렌티스 국왕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나는 가만히 국왕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늙은 왕의 모습이 보였다.
어질고 현명하기로 정평이 난 지도자였지만 역시나 마기를 이겨 낼 ‘격’은 없어 보였다.
물론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도 못하는 걸 그에게 바라진 않았다.
왕은 그저 통치하는 자니까.
“도련님?”
국왕과 수뇌부를 앉혀 두고 말을 고르고 있노라니, 레오가 내게 눈치를 주었다.
불러 모았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기색이었다.
음.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겠지.
나는 늙은 왕을 향해 말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특히 국왕의 얼굴은 이보다 더 딱딱해질 수가 없을 정도로 굳어 버렸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이곳에 있는 수뇌부들은 알 겁니다.”
다른 기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붉은 거인이 입에 담았던 저주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저희도 폴린 성에서 기이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하나같이 덤덤한 말투.
그들은 이미 앞날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종전이라며 기뻐하는 기사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도련님께선 그 괴물의 정체를 알고 계신 겁니까?”
“그래.”
아발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군단장이다.”
“……어디 사는 누구의 군단장이랍니까.”
툭, 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 이름만큼은 나도 꺼내기가 꺼려진다.
“마계의 왕.”
하지만 언젠간 알아야만 할 터.
“다른 이름은 세상 모든 역병의 근원, 스켈레라투스.”
“……!”
공기가 무겁게 짓눌렸다.
고작 이름 하나 말했을 뿐인데, 좌중이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