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Episode. 25 하급 신 (2)
어수선한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식량 따위의 물자를 정리하는 소리, 목청 큰 지휘관의 외침, 날붙이가 땅에 떨어지며 내는 청명한 소리 등.
다들 녹초가 된 몸으로 마지막 기력을 쥐어짰다.
거, 조금은 쉬다 하래도.
그렇게 말했더니 지휘관들은 설핏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저희는 이렇게 쉼 없이 다그쳐야 빠릿빠릿한 놈들입니다. 도련님께선 푹 쉬십쇼. 복귀하는 내내 맨 앞에서 고생하셨잖습니까. 어차피 저희도 식량만 정리하고 나머진 왕실의 병사들에게 맡길 겁니다.”
이러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결국 몇 번 손을 거들어 주다가 성수를 한 잔씩 돌렸다.
마침 목이 말랐는지 벌컥벌컥 잘도 마시는 사내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다가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상태창.”
[호르] [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2]
□ 신도 수 - 1,326 □ 신앙 - 683,637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신안] [계시]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32/50, [최하급 성기사] 30/30, [최하급 사제] 20/20 [하급 전도사] 0/5, [하급 성기사] 0/3, [하급 사제] 0/2
침상에 드러누워 상태창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런데 그 변화란 게 꼭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신도 수, 천삼백.
폴린 성으로 향하다 수없이 마주친 언데드 떼, 폴린 성에서의 마지막 전투…….
종전을 위해 용맹히 싸우다 스러져 간 사내들이 사백이 넘었다.
숫자로 떡하니 나열된 신도 수가 그 빈자리를 사무치게 하였다.
상실이라는 건 내겐 아직 익숙지 못한 것.
또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괜스레 울적해지려는 감정을 다잡았다.
마침 기분 전환하기에 딱 좋은 게 있었다.
“하급 신격이라.”
우웅.
손끝에서 피어난 빛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최하급 딱지를 벗어난 신앙은 이전보다 더 찬란했고, 더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도들의 상태도 확연히 달라졌다.
스노우폴의 주민은 전부 전도사가 되었고, 타사르를 포함한 엘프 스물은 사제가 되었다.
성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신격의 상승과 함께 벌어진 일이다.
감회가 새롭다고 할까.
넉넉하게 늘어난 특별 신도들을 보니 꼭 나만을 위한 기사단이 결성된 것 같았다.
물론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로 만들어야지.
그 이름도 찬란한 템플나이츠를.
“자, 다음은…….”
미래를 그려 보던 나는 이내 눈길을 돌렸다.
새로이 얻은 권능, ‘신안(神眼)’과 ‘계시’.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껏 내가 할 줄 아는 건 빛을 뿜어내거나 다른 이의 염원에서 신앙을 얻는 것뿐, 신으로서 그 염원을 이루어 주는 일은 하지도 못했다.
이런 날 보고 누가 신이라고 생각할는지.
때문에 새로 얻은 두 권능에 기대를 걸었다.
이제야 겨우 한 가닥이나마 신다운 능력을 얻은 게 아닐까 싶었다.
‘게임과 얼마나 다른지, 어디 확인해 볼까.’
내 기대가 김칫국이었는지, 맛난 찰떡이었는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 했다.
“신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 ◈ ◈
신안(神眼).
그것은 정말 신의 눈으로 세상을 굽어살피는 능력이었다.
리오 성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지금, 이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래, 내 눈이 하늘 높은 곳에 매달린 것 같았다.
육신과 시야의 제한이 사라졌다.
신답게 전지적 시점이라고 해야겠지.
“내 성수를 왜 네가 마셔, 이 새끼야! 그거 아껴둔 거라고!”
“거참! 한 방울 남은 걸로 쩨쩨하게 왜 이래?”
짐마차를 뒤적이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마지막 성수 한 모금을 두고 옥신각신 다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난 잠시 리오 성의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떠나 버린 동료의 무구를 쥐고 몰래 눈물 훔치는 자도 보였고,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자도 보였다.
죽음과 전투가 끊이질 않던 성에 잔잔하고 애달픈 평화가 찾아온 풍경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죽음의 땅에서 넘실대는 마기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신안은 합격. 나한테 꼭 필요했던 힘이야.’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세상.
줄기차게 튀어나오는 변수에 난감하던 참이었다.
이 능력이라면 변수를 미리 알아차리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뒤통수의 뒤통수를 후려 주마.’
알고 대비하는 자는 하늘도 막을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남대륙과 남대륙의 그놈, 앨런 마르크스.
도대체 얼마나 비틀어졌을지 모르는 변수들.
조만간 첩자라도 보내 동향을 살필 계획이었는데, 기막힌 타이밍에 성능 좋은 망원경을 얻었다.
‘어디 더 먼 곳을 봐 볼까.’
시야 아래 비친 땅이 휙휙 스쳐 지났다.
고생고생해서 가로질러 온 죽음의 땅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또 순식간에 저주받은 폴린 성의 잔해가 다가왔다.
그쯤부턴 신안의 유지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거리와 마기…… 인가.’
내 육체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고자 하는 곳의 마기가 짙을수록, 신앙의 소모가 커져만 갔다.
그 증거로 마기 물씬 풍기는 폴린 성 일대를 지나치자, 초당 800이나 소모되던 신앙이 300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만하면 신안의 능력은 대강 파악했다.
이젠 진짜 봐야 할 것을 볼 차례.
‘우선은 그놈부터.’
마법제일가 마르크스의 막내아들이자 역대급 천재 신동, 앨런 마르크스.
놈이 과연 내가 알던 대로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낯선 칼을 벼리고 있는지 살펴야 했다.
그래서 놈을 찾아보았다.
혹시 이게 될까 싶어, 머릿속에 앨런 마르크스를 떠려 봤다.
그러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다그닥, 다그닥.
땅 위를 내달리는 고풍스러운 마차. 그 안에 앨런 마르크스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하…….’
마차에서 꽤 익숙한 마기가 풍겨나왔다.
기운을 최대한 갈무리한 듯, 일반인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했지만 내겐 똑똑히 느껴졌다.
저건 폴린 성을 장악했던 리치들의 마기가 분명했다.
“크윽……!”
서둘러 마차 안을 들여다보니 한 소년이 보였다.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앨런 마르크스였다.
그의 깊숙한 곳에서 마기가 꿈틀대는 건 어째서일까.
젠장.
안 그래도 변수가 있을 것 같더라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다행히 내 머리는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았다.
‘혹시 이놈이 마법 연합에 있었다면……?’
변수는 또 다른 변수를 낳는다고.
집에 틀어박혀 수련이나 할 앨런 마르크스가 대뜸 연합에 참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그 개뼈다귀들이 앨런에게 개수작을 부린 거야.’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역시 이게 맞는 것 같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떠올랐다.
앨런의 재능이 리치들의 시선을 끌 만큼 독보적이었나 보다.
이놈을 마인으로 만들기 위해 제 마기를 몽땅 넘겨준 걸 보면.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아주 치명적인 독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 ◈ ◈
나는 신안을 중지하곤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리치들을 날려 보낸 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하지 않았다면, 마법 연합이 습격해 올지도 몰랐던 일이다.
난 리치도, 괘씸한 마법 연합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수를 선택한 것뿐이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요지는 앨런의 몸속에 마기가 틀어박혔다는 거지.”
하마터면 엿을 먹을 뻔했다.
물론 언제까지고 모르고 있었다면 말이다.
이미 알아차린 이상 엿은 엿이 아니고, 위기는 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커다란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결론을 내렸다.
미래, 바텐베르크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앨런 마르크스.
“녀석을 꼬드겨야겠어.”
이미 죽어 바스라졌을 리치들에게 미리 사과하는 바다.
그들의 개수작은 또 나로 인해 틀어질 것이니.
◈ ◈ ◈
앨런의 머릿속으로 자꾸만 속삭임이 들려왔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 거친 음성은 폭력성을 자극했다.
마귀의 목소리처럼 인간의 정신을 쥐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닥쳐!”
와장창-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물건이 유리창을 깨부쉈다.
그는 리치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아차렸다.
하여 오합지졸 연합을 박차고 나와 본가로 돌아온 지 오늘로 닷새째.
그동안 앨런 마르크스는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어느 정도의 수확은 있었다.
대륙 곳곳에 ‘괴인’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단다.
놈들은 불길한 마기를 흩뿌리고,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를 모습을 하고 있단다.
혹자는 그들을 말 그대로 ‘괴인’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마기를 품었다 하여 ‘마인’이라 불렀다.
뭐가 되었든 중요한 건 하나였으니.
이들 모두 본래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괴물이 되기 전에 뚜렷한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앨런은 그게 꼭 자신의 상태를 일컫는 것 같았다.
“하.”
내가 그딴 괴물이 될 줄 알고-
중얼거리는 앨런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저가 미쳐 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윈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리치에게 당한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한심할 뿐.
“더 강해져야 해.”
이까짓 마기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더욱 강해져야 한다.
앨런 마르크스가 그렇게 다짐할 때였다.
『앨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앨런은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앨런이여…….』
깨어진 유리창 너머로 흘러들어온 걸까.
웬 나뭇잎이 바람결을 따라 방안에 떨어졌다.
어째선지 심장이 빠르게 뛴다.
몹시 커다랗고 굉장한 무언가를 앞에 둔 기분이 들었다.
스르륵-
찬란한 아지랑이가 나뭇잎에서 피어올랐다.
그 빛을 보고 있노라니, 오물로 가득했던 몸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
앨런이 멍하니 아지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이 빛에 닿았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너를 아흐레 동안 지켜보았다.』
『가엾게도 어둠에 잠겨 가고 있구나.』
폭력을 속삭이던 괴물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사악하지 않고 흉흉하지 않다.
빛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음성은 한없이 자애로웠으며, 몹시 경건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앨런이 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구에게도 긴장한 적 없던 앨런이건만, 저 빛 앞에서 평온을 가장하는 건 무리였다.
두렵고 경이로운 빛의 파동이 방안을 휩쓸었다.
『나는 땅과 하늘을 만들었고.』
『필요한 것을 만들었으며, 필요치 않은 것을 만들었다.』
『그런 내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하느냐.』
“……!”
빛이 거세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무릎을 꿇은 뒤였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명령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로, 마르크스의 천재가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게 자연스럽고 마땅한 행동이라 느껴졌다.
환각에 빠지면 이러할까.
약에 취하면 이러할까.
그 어떤 의심도, 경계심도 들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순한 양처럼 자세를 낮출 뿐이었다.
『너에게 계시를 내리노니.』
『첫째는 내가 머문 나뭇잎을 몸에서 떨어트리지 말 것이며.』
『둘째는 사흘을 굶고 열흘을 수양해야 할 것이고.』
『셋째는 올바른 때가 되기를 애타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