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Episode. 24 종전 (4)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는데,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질 판이었다.
마법사들은 서둘러 방비를 하기 시작했다.
무식한 기사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진리의 탐구자, 마법사가 아니던가.
“결계는?”
“정확히 열다섯 번이나 겹쳐서 펼쳐 놓았습니다. 더 이상의 중첩은 마나 소비가 큽니다.”
앨런은 보고를 올리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고작 열댓 번 겹친 결계가 얼마나 단단하다고 저리 자신만만하게 보고하는 건지.
독하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함정 마법과 경계 마법, 그리고 마도구 삼백여 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곤 시종을 물렸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이 모여든 평원은 꽤 그럴듯한 요새로 변모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저 흉험한 기운을 흩뿌리는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잠깐이라도 막아설 수는 있을까.
“이상해.”
그래. 이상하다.
앨런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금방 전멸하리라 생각한 기사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크워어억-!』
울려 퍼지는 괴물의 포효는 분노와 흉흉함을 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언뜻 고통스러워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씩 울리는 폭음은 머릿속에 절로 격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무언가 느껴지면 좋기라도 하겠건만, 주의를 집중해 보아도 온통 마기만 느껴질 뿐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였다.
앨런의 날카로운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고개를 들어 결계 너머를 바라보니, 웬 맹수 하나가 있었다.
“사자?”
새하얀, 몹시 영험해 보이는 백사자.
눈 덮인 산등성이 속 옹달샘 같은 파란 눈동자에 앨런의 시선이 고정됐다.
잡아서 길들일까.
마르크스 특유의 진득한 소유욕과 정복욕이 한껏 달아올랐다.
탐스러운 하얀 자태에 앨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자 사자도 웃었다.
“……?”
다시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사자가 큼지막한 송곳니를 내 보이며 웃고 있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닌,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동시에 그의 기감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잡혔다.
반사적으로 올려다 본 하늘에선, 별 두 개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 ◈
콰아아앙-!
별 하나가 먼저 떨어졌다.
누군가가 자랑스러워하던 결계가 쩍쩍 갈라졌다.
콰아앙-!
두 번째 별이 뒤이어 떨어졌다.
금 간 결계가 버티지 못하고 결국 와장창 깨져 버렸다.
“으, 으아악!”
“습격이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불에 덴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런 와중에도 함정 마법은 착실히 발동해, 별을 향해 쏘아졌다.
폭음이 연신 울렸다.
정작 마법사들은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공기를 짓누르는 마기가 두렵고, 또 두려울 뿐이었다.
“크아아악!”
“빌어먹을 인간 자식이!”
겹겹이 쳐 놓은 함정 마법의 한가운데에서, 광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별을 타고 이곳에 떨어진 리치들이었다.
쿠웅-!
그들이 공명하며 뿜어내는 마기가 사방팔방을 휩쓸었다.
“빌어먹으을!”
대체 무엇이 그리도 분한 걸까.
미친 듯 마기를 흩뿌리는 존재의 분노를 마주하게 된 마법 연합은 까닭을 알 겨를이 없었다.
◈ ◈ ◈
“끄허억!”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주인 모를 팔뚝에선 붉은 핏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어찌 이리도 악랄한……!”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롤랑 가주는 의문이 떠올랐다.
‘저것이 악랄하다고?’
붉게 타오르는 안광.
살점하나 없는 풍화된 뼈.
그 본연의 모습 위에 덧칠된 검고 검은 어둠!
아름답지 아니한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 낸 롤랑이 리치들을 바라보았다.
“비통하다! 이렇게 비통할 수가 없도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어지는구나! 그 씹어 죽일 인간 때문에!”
그들이 뱉어 내는 원색적인 분노는 마법이 되어 땅을 울렸다.
마나를 아끼지 않고 쏘아 내는 마법은 그 어떤 흉기보다도 매서웠다.
마법연합의 인간들이 한 뭉텅이로 휩쓸려 나갔다.
전력 차는 연합이 압도적인데, 대처가 너무도 미흡했다.
결계 안에서 지내던 이들에게 갑작스레 쏟아진 마기는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손발이 굳고, 입은 얼어붙었다.
껍데기에 불과한 육신이 그러할진대 수식을 그려 낼 머리는 오죽할까.
“정신 차려, 멍청한 자식들아!”
그나마 이따금, 앨런 마르크스가 마나를 한껏 담아 외칠 때마다 반짝 정신을 차릴 뿐이었다.
으득-
어린 천재가 연합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한심하다. 정말 한심하다.
진리의 탐구자라며, 명망 높은 마법가의 일원이라며 어깨에 힘을 주던 이들이 지금은 납작 엎드린 채 몸을 떨어 대었다.
고작 뼈다귀 둘 때문에 말이다.
심지어는 다 죽어 가는 놈들이었는데.
“마법사들이여. 일어나서 적들을 섬멸하라!”
“마나가 부족해! 이봐, 포션을 좀 가져와!”
“롤랑 가주! 어찌 구경만 하고 있소!”
가주들이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폭음에 섞여 대체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조차도 앨런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금 연합이 부리는 작태는 딱 오합지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앨런이 앞으로 나섰다.
작은 체구 위로 짙고 짙은 마력이 치솟았다.
일순간이지만 마기마저도 밀어 낼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었다.
“꺼져.”
“애, 앨런 도련님.”
넋 놓고 서 있던 롤랑 가주를 밀쳐 냈다.
평소 꾸며 내던 예의 바른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롯이 리치들 앞에선 앨런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마나 특성은 보여선 안 돼.’
그건 아직 시기상조다.
다짐을 되새긴 소년이 마법진을 엮어 냈다.
붉은 마법진이 지팡이 앞에 셋.
푸른 마법진이 그 옆에 다섯.
노란 마법진이 그 반대편에 다섯.
십수 개의 마법이 일순간에 발현되었다.
콰과과광-!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그사이로 소년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렸다.
“뭐 하고 있어! 당장 폭격해!”
짜증 섞인 그 말에 퍼뜩 정신 차린 가주들이 마법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당황했다고 한들,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들의 실력이 결코 미천하지는 않았다.
쾅! 콰쾅!
두 망자에게 고통이 절절히 울려 퍼졌다.
뼈가 마디마디 부서져 흩날렸다.
죽음에서 벗어났던 이들이 다시금 순리에 다가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리치, 크롬벨은 사그라지는 제 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린 인간 하나가 와락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어린 인간이 쉽사리 보기 힘든 천재란 것을.
더불어 그 속에 품은 악의와 폭력성이 더할 나위 없는 폭군의 것이란 사실도.
왠지 씹어 처먹어도 모자랄 인간 하나가 떠올랐다.
“……마지막 발악은 이것으로 해야겠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로다.”
끝이 다가옴과 함께 짙어지던 저주의 룬 문자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체한 건 증폭의 룬이었다.
한 줌 남은 마력을 증폭시켜 블링크를 힘겹게 발동해 냈다.
폭격 한가운데 있던 리치들이 앨런의 눈앞에 나타났다.
“큭……!”
앨런이 흠칫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마법진 수어 개를 그려 낸 건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천재적인 재능에 비해 전투 경험은 그리 많지 않은 애송이였다.
텁-
어린 인간의 양 손목을 리치가 잡아챘다.
크롬벨은 자그마한 머리통에 대고 모든 마기를 쏟아부었다.
모든 게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에게 자격을 부여하마.”
“폭군이 되어라. 온 세상에 어둠을 떨쳐라.”
그것을 끝으로, 두 리치는 한 줌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 ◈ ◈
시체가 움직이는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오히려 멀쩡한 시체가 움직이지 않는 게 더 낯설 지경이었다.
죽었으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시체는 오직 목 달아난 시체뿐이다.
그리고 폴린 성 앞에는 전부 그러한 것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오늘 죽였던 마수들을 한 번 더 죽였고, 함께 했던 동료의 목을 제 손으로 베어 냈다.
새삼 슬프지도 않았다. 그런 말랑한 감정을 느끼기엔, 기사들의 각오는 몹시 단단했다.
“끝이 났군.”
“남은 건…….”
그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쪽도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네놈을 기억하겠다! 내 기필코! 너의 걍퍅한 팔로 이를 쑤실 것이며, 그 흉측한 머리통은 지옥의 강 밑바닥에 처넣을 것이다-!』
구멍 난 하늘, 붉은 거인이 악독한 말을 쏟아부었다.
붉은 살가죽 위에 붉은 피를 덧칠해 더욱 흉흉한 모습을 한 채였다.
『나는 위대한 역병군주의 군단장, 칼고스! 이 땅에 역병의 저주를 내리겠노라!』
촤아악-
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릿한 혈향이 물씬 풍기는 가운데, 칼고스의 몸이 균열 너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커다란 별과의 힘겨루기 끝에 붉은 거체가 뒤로 밀리는 것뿐이었다.
“흥, 썩 꺼지거라.”
줄곧 여유롭던 발락이 혀를 차며 말했다.
곧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는 별에 칼고스의 상체가 완전히 밀려났다.
『다음엔 반드시 죽…….』
끝의 끝까지 퍼부어지던 저주가 뚝 끊겼다.
균열이 그제야 닫힌 것이다.
“…….”
응당 들려야 할 환호성따윈 없었다.
검을 늘어트린 기사들이 이번엔 전장의 한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리하르트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시체 밭에서, 시체 같은 몰골을 한 도련님. 그는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리하르트를 따라 남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법사들이 모인 땅에서 익숙한 마기가 절절히 느껴졌다.
그러다가 뚝- 눈 녹듯이 증발해 버렸다.
“…….”
조금 전만 해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이곳에 있는 것처럼 시끄럽더니, 지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리하르트도, 기사도 누구 하나 소리를 내는 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아! 뭐라 말 좀 해 보시오, 취익!”
한 오크가 닦달했다.
그러자 언제 입 다물고 있었냐는 듯, 기사들이 리하르트를 채근했다.
“어떻게, 끝난 겁니까? 예?”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십시오, 성자니임!”
“아우! 사람 불안하게 왜 말이 없으셔!”
숙연하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사내들이 리하르트의 입만 쳐다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켜 댔다.
마치 리하르트가 이 전쟁의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그가 끝났노라 말하지 않으면,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고오오-
돌연 리하르트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내뿜어졌다.
평소와는 다른 빛이었다.
더 찬란하고, 더 상서로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
쿵쾅- 쿵쾅-
빛을 쐰 기사들의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고가 떨어졌다.
“전쟁이 끝났다.”
[깊고 거대한 악몽을 진압하였습니다.]
[업적 달성 3/3]
[신격이 상승합니다.]
[일부 권능이 해금됩니다.]
[신도의 직위가 해금됩니다.]
…….
리하르트가 손을 휘저어 시스템 창을 치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기사들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뭘 멍 때려? 끝났다고, 멍청이들아! 소리 질러!”
“와…… 와아아아-!”
그제야 남정네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