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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72화 (72/216)

72화. Episode. 24 종전 (3)

『끄어어어-!』

붉은 거인이 울부짖었다.

거대한 목에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은 하나의 폭력이 되어 전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겁먹고 두려워하지만은 않았다.

“으아아아-!”

마주 소리치며 언데드와 싸우는 이도 있었고,

“떠, 떨지 말지어다!”

찬송가의 구절을 되새기는 이도 있었다.

붉은 거인, 칼고스는 감히 제 앞에서 기승을 부리는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들을 한 움큼 쥐어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끌끌, 온전히 튀어나왔으면 좋은 싸움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퍽 아쉽구나.”

다 늙은 노인.

발락이 다루는 여덟 자루의 별이 칼고스의 몸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거인인 칼고스가 막기엔 지나치게 작은, 바늘과도 같은 별.

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바늘 따위가 아니었다.

촤아악-!

쩍 벌어진 상처에서 불같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상처인지, 칼고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인간 따위가……! 내가 누구인줄 알고 덤벼드느냐!』

“내 제자가 칼고스라 했던 것 같다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발락이 말을 이었다.

“다음엔 제대로 건너오거라. 괜히 오늘처럼 고생하지 말고.”

여덟 개의 별이 폭발할 것처럼 팽창하며 한데 뭉쳤다.

마나를 줄기줄기 휘감은 별은 더 이상 칼고스에게도 바늘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흡사 거인의 검.

칼고스의 상체만큼 커다란 검의 별이었다.

그것이 놈에게 쏘아졌다.

콰아아앙-!

검성과 거인의 양팔이 부딪쳤다.

웅혼하고 정순한 마나와 흉흉한 마기가 부딪쳤다.

저 밖으로 다시 밀어내려는 자와 버티는 자의 싸움이었다.

◈          ◈          ◈

“허, 허어!”

넓게 펼쳐진 평원 너머를 바라보던 마법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고상한 척 체통을 지키던 이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끄워어어-!』

저 멀리 깨어진 하늘에서 삐죽 튀어나온 붉은 점.

보기엔 점처럼 보이는데, 울부짖는 포효는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중 삼중 쳐 놓은 결계를 두드려 대는 마기는 또 어떠한가.

느긋이 차나 마시던 마법사들은 안색을 굳혔다.

“대체 뭡니까, 저건!”

“젠장…… 불똥이 튀기 전에 어서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어부지리를 노리기 전에 싹 다 죽을 것이다.

남대륙 곳곳에서 모여든 마법사들이 엉덩이를 들썩여 댔다.

당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기세였다.

“잠깐! 모두들 멈추십시오!”

넋 놓고 저쪽을 바라보던 롤랑 가주가 대뜸 소리쳤다.

어째선지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안색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이대로 연합을 해산하겠단 말입니까? 겁쟁이처럼?”

롤랑이 그리 말하자, 마법가의 가주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섰다.

“그럼 어쩌잔 겁니까. 이대로 쳐들어가는 건 메테오 앞에 뛰어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잖습니까!”

“척 보니 무가 연합이 승리할 턱이 없소. 어부지리는 얼어 죽을, 저건 용과 지렁이의 싸움이오! 우리가 괜히 끼어들어 피 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거친 언사였지만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무식하기로는 오크보다도 더하다는 기사들이, 저 끔찍한 마기를 뒤집어쓴 채 괴물과 싸워 이길 리가 없다.

스스로 말하면서 확신을 더한 가주들이 재차 입을 열었다.

“무가 연합은 전멸하고 괴물들은 북상할 것이오. 북대륙에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지만 결국 바텐베르크의 선에서 정리가 될 거요.”

“차라리 우리에겐 잘된 일이지. 놈들이 알아서 기사들을 죽여 준다는데. 이거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아니겠소?”

급기야는 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방향을 틀기까지.

잠자코 듣던 롤랑 가주는 눈을 감았다.

“당신들이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가십시오.”

“하, 롤랑 가주는 다르게 생각하나 보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떠진 눈빛엔 겁쟁이 가주들을 향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만에 하나, 무가연합을 전멸시킨 괴물들이 방향을 튼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

“빌슨 가주. 지금 그럴 리가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은 저 괴물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쿵!

롤랑이 발을 구르자, 겹겹이 펼쳐져 있던 결계가 일시에 사라졌다.

동시에 훅 덮쳐 오는 처절한 마기에 마법사들이 대경실색했다.

“지금 무슨 짓을!”

“끄, 끄르륵!”

집결해 있던 마법사 중 심약한 몇은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이토록 사특한 기운을 내뿜는 괴물들입니다. 그래요, 어부지리는 확실히 무리겠지만, 저희 마법 연합이 모인 게 헛수고는 아니란 겁니다.”

적들의 혹시 모를 남하에 대처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자는 얘기였다.

그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 준 건 앨런 마르크스였다.

“동감하는 바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물을 앞에 두고 해산할 순 없는 법이죠. 자칫하면 우리 쪽 민간인들이 희생될 겁니다.”

어린 천재의 영향력은 이중 최고였다.

롤랑의 주장에도 당장 떠나고 싶어 하던 가주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앨런 도련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되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을 뿐.”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롤랑을 향해 앨런은 차갑게 대꾸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엔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빛이 일렁였다.

‘그렇게나 마기가 좋아진 거냐, 질리언 롤랑.’

폴린 성 방면으로 집요하게 시선을 두는 그를 보며, 앨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하를 막기 위해 이곳에 있자고?

명분은 좋으나 그 밑에 깔린 저의는 완전히 개인적인 사심이었다.

롤랑은 마기에 완전히 중독된 것뿐이었으니까.

‘이자를 주의 깊게 살펴야겠군.’

어린 천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워진 결계를 다시금 펼쳤다.

◈          ◈          ◈

“말이 없네?”

나는 리치들을 바라보며 검을 쥐어 들었다.

놈들은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났나 봅니다.”

옆에서 레오가 피식 웃으며 검집을 두드렸다.

그러자 보스 공략조에 참가한 기사들이 낄낄 웃으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개뼈다귀 새끼들!”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대?”

“뒤졌으면 곱게 사그라질 것이지, 뭘 하겠다고 저 꼴이 돼서 움직이나 몰라.”

“마법사가 마법사 한 거지 뭐. 음침하기 짝이 없어가지곤. 아, 우리 연합의 엘프들은 빼고.”

기사들이 품위를 벗어던진 채 손가락 욕까지 해 보였다.

참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나와 레오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기 좋았다.

심지어는 흐뭇하기도 했다.

“그래. 기사라면 패기가 있어야지!”

겁먹고 떨어 대는 것보다야 좋았으니까.

새삼 그들이 많이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분노로 몸을 떨어 대는 리치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보였다.

노인과 거인의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밑에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저들 중에서 두렵지 않은 이가 있을까.

이토록 끔찍한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창칼을 쥐고, 적 앞에 몸을 내던졌다.

처절히, 용맹히 싸우는 그들을 보며 검을 다잡을 때였다.

“가장 기사다운 건 우리 막내 도련님 아니십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레오인가 싶어 고개를 바로 하니, 웬 젊은 청년이 씩 웃고 있었다.

제1기사단의 막내.

이름이 뭐였더라.

“애드런이라고 합니다요.”

“너도 빈민 출신이냐? 말투가 아주 자유로워.”

낄낄대는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온몸에 상처가 그득한 걸보니, 제1군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득바득 이쪽으로 넘어온 게 참으로 기특했다.

“우리 막내가 막내 도련님께 작업을 거는군.”

“애드런, 너랑 같은 막내가 아니야. 끕이 다르다고 끕이!”

기사들이 시시콜콜 잡담에 끼어들었다.

이 전쟁의 주동자를 앞두고 있다기엔 너무도 여유롭고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감히 우리에게 시간을 주다니.”

“멍청한 인간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무리하게 균열을 여느라 지쳤던 리치들이 마기를 일으켰다.

동시에 허공에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제야 움직이네.”

“하,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나를 비롯한 기사들은 미소 지으며 검을 잡았다.

몸은 달아올랐는데 싸우질 않으니 참는 게 고역이었다.

[디스펠]

리치들이 그려낸 마법진이 가장자리부터 지워졌다.

[그래비티]

줄곧 저 하늘 높이 떠올라 있던 놈들이 꽝-,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뿐이랴.

[스트렝스]

[헤이스트]

[큐어]

…….

[세계수의 가호]

오색찬란한 빛이 전장을 내달렸다.

인간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빛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건 우리 쪽 엘프들도 마찬가지였거든.”

그들은 강대한 마법사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버퍼였다.

더군다나 그 곁엔 세계수가 함께하지 않던가.

성채가 무너졌을 때부터 준비해 온 마법인 만큼, 그 효과가 전장을 뒤덮었다.

[설왕 세트 효과 ? 발동.]

[특기 초집중 ? 발동.]

[두 자루의 검성 - 발동.]

◈          ◈          ◈

애써 발동한 마법이 웬 창에 찔려 흩어졌다.

곧이어 짓쳐드는 공격에 배리어를 몇 겹이나 펼쳤건만, 한 사내의 남색 검광이 타오르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크아악!”

크롬벨이 재차 마법을 부렸다.

순식간에 좌표를 설정해 복잡한 수식을 그려 블링크를 발동했다.

기사 무리의 뒤편에 나타난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곧, 대경실색하며 흙바닥을 굴렀다.

콰앙-!

그가 있던 자리에 별과 인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크롬벨은 없던 심장의 고동마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버러지 같은 것이!”

말은 버러지라고 했으나, 눈앞의 밝게 빛나는 인간은 위험했다.

이 거슬리는 기운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만.

“그때 데스나이트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가야 했거늘.”

“설마 스노우폴에 시체들을 보낸 게 너였냐?”

지난 일을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히죽 웃는 인간의 기세가 사납게 요동쳤다.

콰앙, 콰앙-!

덮쳐드는 그에게 마법을 연달아 쏘아 보냈다.

빨갛게 이글거리는 불꽃.

저주를 품은 삭풍.

평범한 이라면 폐인이 될 만큼 끔찍한 환각까지.

그런데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불꽃은 저가 휘감은 냉기로 버텨냈다.

새까만 삭풍은 검풍으로 맞섰고, 환각은 입안을 짓씹어 대는 걸로 깨부쉈다.

그따위 대처로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

“무슨!”

도대체 어떻게 저리 싸울 수 있는가.

저자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협공은 나머지 리치 하나마저도 수세에 몰아넣었다.

그 거침없는 모습은 마치 마기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만 같았다.

보통은 손발이 굳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전의가 타오르지도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자신들이 내뿜는 게 보통 마기였던가.

그 지옥 같은 마계에서 당당히 이름을 부여받은 고위 마족의 마기인데.

“블링크!”

덤벼드는 리하르트를 피해 크롬벨이 재차 이동했다.

좌표는 하나 남은 동료의 곁이었다.

“……생각보다 강하다.”

여기저기 금 간 리치가 턱을 부딪치며 크롬벨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

“하나 쉽게 죽어 주진 않을 것이다.”

고오오오-

불길한 공명이 시작되었다.

같은 마나 파장을 갖고 있는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두 리치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너에게 저주를 내리노라.”

“나 역시 너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룬 문자를 그렸다.

죽음과 동시에 끔찍한 폭발이 이는, 소모성 시체에게나 쓸 법한 저주.

하나 그들 정도의 흑마법사라면 단순한 만큼 강대한 저주가 될 수 있었다.

“……물러서라!”

그 불길함에 기사들이 훌쩍 물러났다.

잔뜩 지쳐 꺼져 가던 흉험한 마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공명인가.”

기사들 사이로 걸어 나온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건 저주의 룬이겠고. 자폭인가?”

콰과곽-

두 자루의 별이 빛을 뿜었다.

무슨 저주인지 알면서도 베어 버리겠다는 의지였다.

두 리치의 입이 달그락거렸다.

“느껴라. 이 공명을! 이것이 우리의 진짜 힘이다!”

“마계의 마족을 얕보지 마라. 진정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

넘실대는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흑마법사들의 마지막 일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리하르트가 웃었다.

콰직-

두 별이 새까맣게 물든 빗장뼈 사이를 각각 파고들었다.

하나 리치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몸.

마지막 일격을 완성하고 죽든, 지금 죽어 폭발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눈앞의 인간들을 길동무로 삼으면 족했다.

“너희는 이걸 피해야 했어.”

난데없이 리하르트가 흰소리를 늘어트렸다.

그에 크롬벨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별 두 자루가 쏜살같이 날았다.

리치들을 매단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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