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Episode. 23 악몽의 끝을 향하여 (3)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연합은 준비를 단단히 마쳤다.
“드디어 마지막 전장으로 가는구나.”
“빌어먹을 놈들. 대체 어떤 상판을 하고 있는지 봐야겠어.”
기사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거의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들을 괴롭힌 장본인이었으니, 이가 갈릴 만도 했다.
“호르시여!”
개중 몇몇은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부디 이 싸움에 함께 해 달라고.
물론 나는 그 기도를 들어 줄 생각이다.
“물자는 넉넉하게 챙겼어?”
“예. 짐마차 서른 대가 전부 꽉 찼습니다.”
레오가 내 옆에서 우직하게 답했다.
그 태도가 처음과는 너무도 딴판이어서 웃음이 났다.
‘얼마 전에서야 알았지만, 이 녀석들이 신앙심을 품을수록 나한테 충성심을 느낀다는 말이지.’
어째서일까.
내가 신이면서 ‘리하르트’이기 때문인 걸까.
아무튼 정말 놀라운 일이다.
기사에게 충성심이란 건 아주 중요한 거라, 나에게 터럭만큼이라도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 어떤 기연보다도 값진 결과를 낳을 터다.
물론 레오는 신앙심이 그리 깊지는 않다.
신도는 되었지만, 끽해 봐야 기도 한 번에 4~50이나 들어올까.
“도련님! 이 아론에게 딱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가만히 웃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아론이 달려와선 간절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갑자기 무슨 약조?”
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걸까.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에서 제가 활약을 한다면…… 저에게도 성기사 자격을 내려 주십시오. 도련님의 직속 기사인 제가 성기사가 아니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걸 어찌 말해야 하나.
“그래. 호르께서 너를 살펴보실 거다. 그러니 열심히 해 봐.”
다행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아론이 결연한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옆에 있던 레오가 딴지를 걸기 전까지는.
“863번째 신도에겐 무리이지 않을까 싶네만. 하하!”
아픈 곳을 제대로 찌르는 비수 같은 말이었다.
아론은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신도가 되려고 했던 거지, 딱히 큰 신앙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레오도 마찬가지.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신도가 되겠노라 말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내였으니까.
“1691번째 신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어쭈? 이래봬도 나는 연합의 사령관이라네. 말이 경솔한 감이 없잖아 있군.”
어느새 신경전을 벌이는 둘을 뒤로하곤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덩그러니 서 있는 짐마차가 반이요, 마갑(馬甲)을 둘러멘 전투마가 나머지 반이었다.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넓었던 리오 성이 좁아진 기분이다.
“이제 슬슬 출발해 볼까.”
지루한 연설 같은 건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지난 일주일간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을 사내들에게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 ◈ ◈
대규모 군단이 이동을 시작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성가대를 태운 마차 안에선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그들의 음성은 더욱더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성수를 물처럼 마시고 있기 때문이었다.
“믿을지니!”
“이제는!”
“동이 터 오르리라!”
기사들이 진군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엉망진창인 음정에 제법 좋은 기운이 섞여 들었다.
“흐음.”
나르에 올라타 선두를 달리던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굳센 사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각오, 자신감, 전의.
전투에 있어서 온갖 긍정적인 감정을 담은 표정들.
과연 저게 얼마나 갈까.
물론 사기가 높으면 좋다.
하지만 저 앞에 펼쳐진 지옥의 마기가 내 감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아마 진군조차 쉽지 않을 테지.
해이해진 긴장감을 조이기엔 그만큼 좋은 환경이 없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촤아악-!
겁 없이 달려들던 시체 무리는 단숨에 갈려 나갔다.
통제를 벗어난 언데드는 어차피 우리에게 몰려들게 되어 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나방과 같은 격이다.
그렇게 마을을 수차례 건너자, 곧 숲이 앞을 가로막았다.
또 다른 말로는 경계선.
모리츠의 증언대로 저 너머부터는 격이 다른 마기가 느껴졌다.
“가자.”
◈ ◈ ◈
죽은 숲을 건넜다.
곧이어 죽은 강을 건넜다.
“…….”
세상 힘차게 나아가던 연합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경계선 밖의 마기는 뭐랄까.
그래, 모리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랬다.
안쪽의 마기가 마나라면, 바깥쪽의 마기는 오러다.
참 알맞은 비유였다.
너무나도 찰떡같아서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내심 의심했던 기사들 몇몇은 모리츠에게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런 곳을 혼자서, 더불어 적진 한복판을 정찰하고 돌아오다니.
“히, 히익!”
정작 모리츠도 익숙해질 수없는 공포에 몸을 떨어 댔지만.
“도련님. 이쯤에서…….”
“아니.”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레오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물리적인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끌끌. 독한 놈일세.”
“스승님은 괜찮으십니까?”
너털웃음을 짓는 우리의 든든한 변수.
발락에게 그리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오우거의 방귀를 맡아 보았느냐? 그거나 이거나 별 차이를 못 느끼겠구나.”
“아, 예.”
비유하고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나아갈 때였다.
히히힝-!
결국 혈통 좋은 명마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아무리 찬송가를 불러 주어도, 마갑에 성유를 덧칠해 주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잘 버텨 준거지.”
마기가 이렇게나 기승을 부리는데, 한낱 말에게 열정을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었다.
나는 재차 연합을 훑어보았다.
기사들 하나하나가 굳은 얼굴을 해 보였다.
다행이랄 점은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굳센 각오가 눈가에서 활활 타올랐다.
내가 딱 바라던 상태였다.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똑똑히 느껴야 했다.
파아앗-!
조용히 후광을 펼쳤다.
죄 칠흑처럼 어두운 주변이 한순간에 밝혀졌다.
나를 향한 기사들의 시선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자.”
이 정도의 빛이라면 말도 다시 움직일 터.
우리는 진군을 이어 나갔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우리를 해하지 못할지어다!”
“오늘이 역사가 될지어다!”
찬송가 ‘이르시길’이 행진가가 되어 터져 나왔다.
괴물이든 뭐든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악다구니를 쓰는 목청이었다.
“오오오! 호르 가라사대!”
“신앙은 널리 퍼질지어다!”
우렁찬 행진가 속, 연합은 수많은 마을과 영지를 지나쳤다.
◈ ◈ ◈
“다 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날 며칠을 행진하던 연합이 일시에 멈춰 섰다.
제1요새, 폴린 성의 모습이 코앞에 있었다.
그 모양새는 도저히 성이라 보긴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 일반인이 봤다면 토악질부터 할 모습이었다.
“하아…… 내가 어떻게 혼자 쳐들어갔는지 새삼 의문스럽다.”
모리츠가 아련한 눈으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하, 하하! 모리츠 도련님은 정말 사나이셨군요. 저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그거 인정이지. 너라면 숲을 건너다 오줌 세 방울 정돈 지렸을 거야.”
적진을 눈앞에 둔 기사들이 잡담을 주고받았다.
나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저들 나름대로의 텐션 조절이었으니까.
“취이익, 대단한 인간 전사! 언제 쳐들어갈 거요? 이거 몸이 달아올라서 못 참겠다오!”
이중에서 가장 신난 건 휴거였다.
오크의 신경 줄이 무쇠 줄이라더니, 특히 이놈은 아다만티움 줄로 되어 있는 듯했다.
“쳐들어가는 건 우리가 아니야.”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굳이 적진에 쳐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성의는 표한 거지.
“아델.”
“응!”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신앙을 거의 쏟아붓듯 밀어 넣어 주었다.
신앙을 양껏 받아들인 아델이 발을 굴렀다.
쿵!
커다란 나무줄기 네 가닥이 땅을 뚫고 치솟았다.
그것이 구불구불 꼬여, 흙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그 모양새가 꼭 성벽처럼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고오오-
더불어 나무줄기에서 연녹빛이 흘러나왔다.
아델의 ‘생명’과 신앙의 조합이었다.
“자리를 잡아라!”
“저쪽이 쳐들어오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들자!”
미리 계획을 전해 들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수성에 이골이 난 그들이었으니,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이다.
[등불은 빛을 전해 주니-]
[그 곁에 선 우리도 등불이라.]
[어둠은 실낯 같은 빛도 삼키지 못하고-]
[결국 제 몸이 사그라들 뿐이더라.]
마차에서 내린 성가대와 엘프가 뿌리 뒤편에 저만치 떨어져 노래를 불렀다.
“너희 곁에 무엇이 있느냐!”
“등불 있도다!”
“너희 앞에 무엇이 있느냐!”
“어둠 있도다!”
쿵, 쿵!
기사들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곧 사그라들 어둠이더라!”
“와아아아!”
언제 겁에 질렸냐는 듯 몹시 웅혼한 포효를 들으며, 나는 애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라고 꼭 머리가 좋은 건 아닌가 봐.”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리치 녀석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을 해 놓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큰일 하신다고 결계라도 몇 겹 쳐 놓았겠지.
“후회할 텐데.”
이쪽을 너무나 얕보았다.
또, 자신들의 계획을 너무나 과대평가했다.
어쩌면 마왕의 닦달에 허겁지겁 떠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게 뭐란 말인가.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외쳤다.
“공격하라-!”
직후, 성유 바른 화살이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 뒤를 따라 엘프들의 마법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콰과과광!
순식간에 폭격을 맞은 폴린 성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가라앉을 새도 없이, 또다시 폭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적들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과연 마수들의 얄팍한 인내심이 얼마나 갈까.
“참, 타이밍도 완벽하군.”
나는 희뿌연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성의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마기가 저 정도나 모였으면 정말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원래 모든 일은 끝맺음이 중요한 법.
즉, 리치 녀석들은 습격을 알아차려도 옴짝달싹할 수없는 상황이란 거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졌다간, 그동안 공들인 의식이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