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Episode. 23 악몽의 끝을 향하여 (2)
리오 성에 또다시 언데드 무리가 쳐들어왔다.
구슬의 통제를 벗어난 시체들이 성스러운 기운에 이끌린 것이다.
개중엔 기사였던 자도 대거 눈에 띄었다.
물론 지금의 연합에겐 그리 위험한 놈들은 아니었다.
“방심하지 말고 처리해.”
나는 당장에라도 돌격할 듯 콧김을 내뿜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기도 수천 마리가 모이면 천둥소리가 난다고,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추웅! 저들에게 안식을 찾아 주고 오겠습니다!”
“자, 성문을 열어라!”
쿠구궁-
철판을 덧댄 거대한 성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사이로 대열을 갖춘 기사들이 진군했다.
이제는 화살도 아깝다고 칼로 처리하겠다는 용맹함을 보이며.
“좋아, 좋아! 드디어 내 성검을 휘둘러 보겠구나!”
“잠깐.”
나는 대열에 합류하려는 모리츠를 붙잡았다.
전날 받은 성검을 품에 꽉 끌어안은 모습이 참 우스웠다.
어제까지는 불공평하다며 툴툴거리기 바쁘지 않았던가.
“아, 왜! 나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그 성검 사용법은 알고 있냐?”
내 말에 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용법 같은 것도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줘 봐.”
그의 품에서 검을 빼앗곤 휙휙 휘둘러 보았다. 별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음, 역시 최하급 성검으론 크게 눈에 띄는 능력은 없는 건가.
이 수준의 성유물이 품고 있을 능력은 단 하나였다.
“자, 검에 마나를 실어 봐.”
다시 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모리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말에 따랐다.
그러곤 화들짝 놀라며 제 몸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몸에 힘이 넘쳐……! 이것이 신의 축복인가!”
최하급 성검이 지닌 능력은 다름 아닌 버프.
신앙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나에겐 별것 아니지만, 이놈에겐 큰 도움이 될 터다.
그를 증명하듯 모리츠가 은은한 빛이 타오르는 성검을 쥐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냅다 전장으로 달려갈 기세라 나는 다시 한번 붙잡았다.
“아, 또 왜!”
“이게 사용법 알려 줬더니 어디서 성질을 내?”
확 씨.
눈을 부라리자 그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지. 너는 성기사가 됐다고.”
성기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특기, 신성력 변환.
내 생각대로라면 마나를 신성력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렷다.
관건은 그 비율.
마나와 신성력이 몇 대 몇으로 변환되는 건지 알아야 했다.
혹시 신성력을 써 본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모리츠가 입을 열었다.
“딱 한 번이지만 폴린 성에서 네 마나와 똑같은 마나를 사용했었어. 그게 성기사의 힘이란 말이야? 맙소사!”
“그래. 비율은 어느 정도나 돼?”
“대충 마나 2에 신성력 1정도. 그 언저리쯤 될 거야.”
썩 좋은 효율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질이 다른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신성력이라면 더더욱.
수많은 성기사가 신성력을 내뿜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장관이겠군.
“알았어. 가 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리츠가 쌩 하고 달려 나갔다.
신성력 이야기까지 듣자 더욱 흥분한 모양새였다.
“리오 성의 영웅이 납셨다! 이 몸의 성검을, 신성력을 두려워하라!”
“취이익! 동지, 참으로 멋진 검을 얻었소!”
바보 하나가 추가됐을 뿐인데, 여느 날보다 전장이 배는 시끄러웠다.
기가 살아도 너무 산 느낌이었다.
저러다 언제 한번 큰코다치지.
“아빠.”
성벽 위에서 가만히 전장을 내려다 볼 때였다.
아델이 다가와서 내 팔을 끌어안았다.
웬일인지 표정엔 의문이 가득했다.
“저게 진짜 성검이야? 그런 것치곤 너무 비루한데.”
“최하급 성검이니까 어쩔 수 없지.”
“저 정도면 이제 막 자격을 얻은 성녀가 축복을 내린 수준이야.”
“그거 참 정확한 표현이네.”
아델의 본의 아닌 팩폭에 입맛이 쓰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내 신격은 곧 성장할 테니까.
고위 마족 리치들을 제물 삼아서.
그럼 또다시 많은 게 변할 것이다.
“와아아!”
갑작스레 울려 퍼진 환호성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전장을 바라보니 어느덧 전투가 끝나 있었다.
참 긴장감 없는 싸움이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아.”
나는 땀에 젖은 기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연합은 쉽게 말해, 살 맛이 나는 상황이었다.
신앙이 등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
신도가 노래도 불러 주고, 줄곧 괴롭혔던 언데드도 이젠 우습다.
모든 게 순조로이 풀려 가니 알게 모르게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다.
하나 그래선 안 됐다.
아직 진짜 적들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방심이 웬 말인가.
“짐 바리바리 싸들고 마기 속을 헤쳐 나가면 정신 차릴 거야.”
옆에서 아델이 옳은 소리를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가득 찬 리오 성은 저 바깥에 비하면 지상 낙원이다.
이곳을 벗어나 매운 맛을 볼 때가 된 것이다.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해야겠어.”
때마침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내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준비를 서두르겠다고 입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역시 사령관 자리는 아무나 꿰차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난 성을 쭉 훑어보았다.
이제는 모두 내 신도가 된, 천칠백의 기사들이 보였다.
더불어 엘프와 성가대까지.
요즈음 날마다 들어오는 신앙은 대략 십사만여.
그리고 현재 내 영혼에 담긴 양은 백삼십만 정도다.
여기저기에 아끼지 않고 썼음에도 이만큼이나 축적할 수 있었다.
그건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고, 결코 우습지 않은 무기였다.
“치사한 짓거리나 하는 놈들을 골탕 먹일 방법도 떠올랐고.”
아, 기대된다.
아델과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 ◈ ◈
폴린 성은 고요했다.
수백의 마수들은 강대한 강제력 아래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침입자를 제거하라-
고귀한 마족들이 내린 명령은 그것뿐이었으니.
쿠구국-
세 리치가 똬리를 튼 성의 꼭대기에선 불길한 기운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균열을 열기 위한 의식은 얼마 전 막바지에 들어섰다.
그들은 계획을 완벽히 실행하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고작 왕국의 절반을 제물로 바친 걸론 일을 수월히 진행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왕국 하나는 마기에 집어삼켜야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큰 불길은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을 이끌 테니.
자칫 잘못하면 그들로서도 상대하지 못할 강자들이 나설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별을 휘두르던 노인이라던가.
다만 이제는 전부 다 끝난 일이다.
이 의식만 제대로 마무리되면, 마왕이 강림해 세상을 불길로 휘감을 터.
저 멀리 불쾌한 기운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미약하기 짝이 없는 빛이다.
마기에 움츠러들 뿐인 겁쟁이들론 이곳을 지키는 마수들에게조차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일부러 함락시키지 않고 있던 성이 아니던가.
놈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은폐하기 위한 방패일 뿐.
세 리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식에 완전히 몰입했다.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집중에 집중을 더했다.
그것은 가히 무아지경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를 넘어 담금질의 수준이었다.
수십 일 동안 모든 잡념을 끊은 채 의식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크나큰 실수란 것도 모른 채.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얕보았던 리오 성에선 미약했던 불꽃이 이제는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마기가 더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겉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기사들과 협력해야만 합니다!”
한 소년이 강하게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몹시 적었다.
“앨런 도련님. 무식한 기사 놈들과 협력이라니, 절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오래전부터 공을 들였던 폴랜드 헬가와의 연락이 두절된 지가 한참입니다. 이미 기사들도 저희의 속셈을 알아차렸겠지요.”
폴린 성의 반대편, 마법사들이 모인 이곳에서만큼은 기사를 두둔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이 기회를 살려 기사들을 골탕 먹일 궁리만 하는 자들이었다.
“기사가 승리해도, 저 마기의 주인이 승리해도. 저희는 어부지리만 노리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깟 기사 놈들이 기습을 예상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겁니다.”
“그렇지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그 작태를 바라보던 앨런이 입술을 짓씹었다.
무식한 기사라면 치를 떠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이건 무언가가 달랐다.
“오오! 저 강대한 마기 좀 보시오! 마치 밤하늘 같지 않소?”
마법사들은 제 눈에 시력 강화 마법을 걸면서까지 폴린 성에 시선을 던졌다.
마기를 바라보는 눈빛에 언뜻 황홀함이 스쳐 지난 건 착각일까.
‘미쳤어. 이자들은 미친 게 분명해.’
앨런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멍청한 칼잡이들에게 한 방 먹여 주기 위해 이곳, 롤랑가를 필두로 한 마법 연합에 친히 합류했건만.
‘기사도 짜증 나기 짝이 없지만, 미친 마법사는 더 혐오스럽다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분명 이들도 마기에 몸서리치던 때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결계 마법을 이중 삼중으로 펼쳤을까.
그러나 그것으로도 무리였나 보다.
결계를 뚫고 흘러 들어온 소량의 마기를 몇달간 쐬더니,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것 같았다.
까득, 이를 악문 앨런이 발을 굴렀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들이 진정 올바른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란 말입니까!”
마력이 가득 실린 그의 음성이 마법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제야 넋 놓고 마기를 바라보던 이들이 헛기침을 해 댔다.
마법제일가, 마르크스 가문에서도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의 외침을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아마 실력만으로 따지면 이 어린 소년이 연합의 톱을 달릴 것이다.
“죄송합니다, 앨런 도련님. 저희가 추태를 부렸습니다.”
연합을 주최한 롤랑 가주가 앨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굉장히 깍듯하고 공손한 태도였으나, 앨런의 표정은 더욱 딱딱히 굳었다.
저 멀쩡한 가면 속에 얼마나 많은 뱀이 살고 있는지 뻔히 보인 탓이었다.
“……기회나 제대로 잡으시길. 그대들 말대로 기사와의 협력은 이미 물 건너간 듯하니, 어부지리라도 잘 노리라는 말입니다.”
앨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거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입안에선 원대한 포부가 맴돌았다.
‘이 세상에서 기사를 모조리 지우면, 내 다음 적은 모든 마법사이리라.’
또 그다음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이종족이 될 것이다.
“칼과 마법이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