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Episode. 22 신의 시련 (4)
폴린 성은 더 이상 성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벽은 눈길 닿는 곳마다 회색빛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표면엔 핏줄이 꿈틀거렸다.
흡사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 같은 모습이었다.
“하아…….”
모리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른 곳보다 배는 지독한 악취와 마기.
그는 직감했다.
이곳엔 절대 오래 못 있는다고.
그건 자신과의 타협 같은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였다.
“우으…….”
“크에엑-!”
성채 밖에는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돌아다녔다.
각기 모양새는 다르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있었으니.
저들은 언데드 따위가 아니란 것이었다.
‘뭐야. 저 괴물 놈들은?’
잔뜩 기척을 죽인 모리츠가 입을 틀어막았다.
부릅뜬 눈에는 괴물들이 비쳤다.
어떤 놈은 집채만큼 커다랗고,
또 어떤 놈은 그림자처럼 새까맣다.
개중엔 박쥐 같은 날개가 달린 녀석도 있었다.
녀석들은 죽어서 만들어진 언데드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저쪽’의 생명체인 무언가였다.
혹시 리하르트는 저놈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뭐든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그놈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모리츠는 나중에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괴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체 얼마나 끔찍한 생명체인지, 수백 마리가 뿜어내는 기세가 전부 웬만한 최상급 기사보다 강렬했다.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란 걸까.
‘우읍…….’
속이 메스껍다.
당장에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급기야는 멀쩡해진 정신이 다시 핑핑 돌기 시작했다.
안 된다.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더더욱 기척을 죽였다.
“크에에엑!”
성을 괴물들이 가득 채우니, 숨어 들어갈 틈따윈 없었다.
그래서 모리츠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해야 할 정도의 은신 능력.
놈들은 제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모리츠를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리츠도 죽을 맛이었다.
엄청난 심력 소모는 물론이요,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끝이라는 긴장감이 심장을 꽉 조였다.
곧 그는 기적적으로 성채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쳐들어 바라보니, 성 꼭대기에 온 세상의 마기가 몰려 있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저기에 리하르트가 말한 리치들이 있는 건가.’
모리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기가 터질 듯 모여든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냥 딱 봐도 끔찍한 재앙을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우선 구슬부터 찾아야 해.’
그가 애써 시선을 내렸다.
저 혼자로는 저것을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악의 요새를 나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성채 밖도, 더욱 끔찍한 안쪽도 마찬가지.
최악의 경우 리치들의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만 가는데, 일의 진전은 없다.
조금만 더 이곳에 있는다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보이지도 않는 구슬을 찾을 바엔, 그만큼 위험해 보이는 ‘저것’을 파괴하기로.
모리츠의 시선이 성채 밖 한 군데를 향했다.
거대한 회색 살덩어리.
언뜻보면 거인의 심장처럼 보이는 그것은 이따금 꿈틀거리며 박동했다.
꾸드득-!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곧 살덩어리를 찢고 나타난 무언가가 울부짖었다.
양수로 추정되는 누런 액체를 뒤집어쓴 괴물이었다.
찢긴 살점은 다시금 재생해, 꿈틀거리기를 반복.
지켜본 바로는 저 살덩어리는 괴물을 낳는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이 성을 가득 매운 괴물들이 저기서 태어났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모리츠는 역겨움과 두려움을 꾹 참으며 나아갔다.
극도로 줄인 기척.
호흡조차 멈추고, 발은 땅에 닿지 않는 듯 조용하다.
딱히 배운 적도, 연습한 적도 없으나 모리츠의 은신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이건 하늘이 그에게 내린 재능이었다.
‘침착, 침착하자.’
침을 뚝뚝 흘리는 괴물의 밑을 파고들었다.
몸에 웬 칼날이 달린 녀석을 스쳐 지났다.
“키에에!”
개중 감 좋은 괴물은 돌연 괴성을 질러 댔다.
눈 먼 팔다리가 모리츠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살덩어리와 남은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그는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발을 옮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딱 두 걸음만 더 가면 된다.
그러면 단숨에 오러를 일으켜 저 살덩이를 죄 찢어발길 수 있다.
그 뒤 씨앗을 삼키고 신속히 복귀한다.
참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조악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요 며칠간 두 눈으로 본 것을 연합에게 알려야만 했으니까.
표정을 딱딱히 굳힌 그가 발을 뗄 참이었다.
“우으……?”
모리츠의 앞에 거대한 눈알이 들이밀어졌다.
온몸에 눈알 수십 개가 달린 괴물.
놈이 웃었다.
퍼어억!
직후, 오우거보다도 두터운 팔이 모리츠를 후려쳤다.
“끄에에엑!”
“키르륵!”
터져 나오는 신음마저 꾸역꾸역 삼켰건만,
땅에 몇 번이나 구른 채로 은신을 유지할 재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괴물들이 모여들었다.
콰앙, 콰앙-!
전후 사정 없이 곧바로 쏟아지는 폭력.
“커, 커억……!”
우악스럽게 짓씹긴 왼팔이 너덜거렸다.
온몸의 뼈가 바스라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산더미처럼 제 몸을 뒤덮은 괴물들 아래에서, 모리츠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살아서 모든 걸 전해야 해.
저 미친 살덩어리를 없애 버려야 해.
죽음보다도 사명이 먼저 떠오르는 건,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일까.
까드득-,
겨우 입안에 털어넣은 씨앗을 짓이겼다.
엄습해 오는 고통 사이에 알 수 없는 맛이 입에 감돌았다.
달다, 쓰다 따위의 감각이 아니다.
이 맛은 찬란한, 성스러운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파아앗-!
죄 새까만 괴물들 틈에서 빛이 솟구쳤다.
놈들은 불에 데인 듯 몸을 움찔하며 물러섰다.
“꺼져,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아!”
그사이로 모리츠가 튀어 나갔다.
‘온몸에 활력이 넘친다!’
부러졌던 뼈도, 날카로운 이빨에 갈려 나간 살과 근육도 재생되었다.
그가 씹어 삼킨 씨앗은 아델의 힘, ‘생명’을 구현화한 것이었다.
더불어 그 안에 담긴 20만의 신앙이 힘을 더해 주었다.
구명줄이라더니, 정말 그 이름에 알맞았다.
꽉 쥔 검에서 밝은 빛이 폭사했다.
리하르트의 마나 특성, 신성력을 똑 빼닮은 빛이었다.
왜 갑자기 특성이 나타난 걸까- 같은 의문이 떠오를 새는 없었다.
모리츠는 신성력을 역고 또 엮어, 홀리 오러를 뽑아내었다.
평상시의 오러보다 배는 많은 마나를 소모했지만 괜찮았다.
지금은 힘이 넘쳤으니까.
“으아아!”
괴물의 손톱이 팔뚝을 갈랐다.
마기가 넘실대는 주먹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몇 개는 피했고, 또 몇 개는 검을 들어 막았다.
나머지는 몸으로 받아 내, 거친 흙바닥을 몇 번이고 굴러야 했다.
“꺼져! 꺼지라고!”
모리츠는 벌떡 일어나 역겨운 살덩어리를 향해 달려갔다.
몸을 사리지 않는 의지가 통한 걸까.
그는 마침내 목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푸욱-!
물컹하고 불쾌한 감촉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모리츠가 으득, 이를 악물곤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쾌검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빠르게 펼쳐졌다.
끈덕진 살 속을 몇 번이나 헤집었을까.
콰직, 하며 칼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러자 살덩어리가 부글거리며 녹아내렸다.
“아!”
되었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다.
이제야 리하르트 앞에서 떳떳하게 임무를 완수했노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안색이 환해진 모리츠가 냅다 성벽 밖으로 달려갔다.
손으로는 나르의 송곳니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으, 으하하! 역겨운 괴물 새끼들! 너흰 나중에 다 뒤졌다!”
◈ ◈ ◈
“호르를 위하여!”
와아아-!
리오 성에선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어느새부턴가 불규칙적으로 습격해 오는 언데드.
죽은 자들이 언제는 규칙적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무언가 낌새가 달랐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았다.
“잘해 주었어.”
한창 시체와 엎치락뒤치락하는 기사들을 보며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모리츠가 깨부쉈던 구슬.
그 결과가 지금의 광경을 불러일으켰다.
슬슬 최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척, 치켜든 손 위에서 커다란 별 두 자루가 떠올랐다.
곧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언데드가 뭉쳐 있는 곳을 가리키자, 두 별이 쏘아졌다.
콰과광-!
폭음이 울리며 빛이 연신 폭사했다.
그럴 때마다 기사들은 힘이 나는 듯, 사기를 크게 드높였다.
“어차피 잡놈들 뿐이다!”
“호르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거기 너무 앞으로 나서지 마! 대열 지켜, 새끼야!”
분기탱천한 기사들을 통제하는 지휘관의 외침.
전장의 처절함을 위로하듯,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찬송가.
기사들의 무구에 어려 있는 빛무리.
리오 성은 다시금 제2요새라는 옛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신앙심을 품은 자들이 하나둘 모이니, 성 자체가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
어차피 승기는 이쪽으로 단단히 기울었다.
리하르트는 성벽에서 한 발짝 물러나, 저 멀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길 한참.
“온다.”
저 혼자 멈춘 듯 가만히 있던 리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한달음에 성벽을 뛰어넘은 그는 별을 타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열심히 칼을 휘둘러 대던 기사들이 시선을 보냈다.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리츠가 돌아오고 있다. 길을 열어 주자.”
“충! 괴물 하나 없도록 정리하겠습니다!”
기사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시체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처리되기 시작했다.
고오오-
더불어 리하르트의 위에 높이 떠오른 두 자루의 별.
두 검성을 이룬 신앙이 태양처럼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