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Episode. 22 신의 시련 (2)
꽈르릉-!
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려진 마법진.
그 중심에서 검은 번개가 몸을 비틀며 떨어졌다.
“제가 막겠습니다!”
리하르트를 노리고 떨어지는 번개를 향해 아론이 몸을 던졌다.
꽉 쥔 창을 휘감고 맹렬히 회전하는 보라색 오러.
그것을 번개에 꽂아 넣었다.
응당 울려 퍼져야 할 굉음은 없다.
피잉,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휘유.”
아론의 활약을 본 리하르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피어싱 오러는 마나의 구성을 꿰뚫고 흐트러트리는 마나 특성.
마나를 흐트러트리니, 마나로 구성된 마법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마법사의 천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콰아아아-!
리치들이 부리는 마법은 계속 이어졌다.
불꽃과 번개, 바람 따위가 죄 어둠을 품고선 덮쳐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아론이 나섰다.
피잉, 피잉-
요란한 소리를 내던 마법들이 흩어진다.
흩날리는 마나의 기류 사이에 선 아론이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곧 뜀박질로.
뜀박질은 곧 적을 향한 돌격이 되었다.
그의 뒤를 따라 리하르트와 휴거가 땅을 박찼다.
“크악!”
리치 하나가 배리어를 펼쳤다.
동시에 리하르트 일행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푹, 아론이 재빨리 땅에 창을 박아 넣어 불기둥을 꺼트렸다.
그사이 휴거와 리하르트는 리치의 코앞에 당도했다.
“취이익!”
휴거가 한껏 치켜든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지지직-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는 배리어.
한 장의 장막으로는 휴거의 무식한 도끼질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그 사이로 리하르트의 별이 찔러 들었다.
“컥!”
리치의 하얀 두개골에 빛이 틀어박혔다.
뼈마디 앙상한 손을 들어 뽑아내려 해도, 더욱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취익, 뭐요. 생각보다 쉽지 않소?”
조금씩 바스러져 가는 뼈다귀를 내려다보던 휴거가 머리를 긁적였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점점 어려워질 거야.”
다섯이자 하나인 존재.
싸움이 일기 전, 리치들은 분명 그리 말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오오-
남은 리치들에게서 더욱 강력한 마기가 솟구쳤다.
◈ ◈ ◈
성을 습격한 리치들은 서로 저주로 얽혀들어 있었다.
한 명이 죽으면 남은 이들이 죽은 이의 업을 짊어지는, 최악의 저주였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경우였고, 마기를 받아들인 리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네놈들!”
싸움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콰앙-
연신 전장을 울리는 폭음.
최후의 일인이 된 리치의 마법은 하나하나가 강대했다.
더는 아론의 오러로도 꿰뚫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자 엘프들이 나섰다.
“크아아악!”
마법과 마법이 부딪친다.
강렬한 폭발 너머 또 다른 마법이 날아들었다.
리치는 강했으나, 오십의 엘프가 펼치는 마법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더불어 그들만이 적이 아니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리하르트 일행에 리치가 치를 떨었다.
최고위 마법을 쓰고자 하면, 엘프들이 빈틈을 노렸다.
반격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오러를 휘감은 날붙이가 배리어를 두드렸다.
태산 같던 마나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치 하나론 이미 한껏 기운 승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역시 쉽지 않네. 그래도 덕분에 연습이 됐어.”
몸 이곳저곳이 그을린 리하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앞엔 리치가 주저앉아 있었다.
“…….”
한순간이나마 대마도사의 경지에 들어섰던 리치.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그는 가만히 전장을 둘러보았다.
인간은 강했다.
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확실한 대응 수단을 갖춘 채였다.
새까맣게 몰려든 괴물들은 전부 처리된 지 오래.
칼 쥔 인간들의 얼굴엔 성을 지켜 냈다는 자부심이 그득했다.
전투의 끝.
리치는 홀로 남아 턱을 부딪쳤다.
“크흐흐. 무엇이 그리 기고만장하느냐.”
애초에 자신은 고귀한 분의 말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전령이었다.
이런 성 따위 함락시켜 어디에 쓸까.
“어둠이 고작 너희 앞에 가로막힌 줄 아느냐.”
이들은 죽을 때까지 모를 터다.
고요한 어둠이 저들을 방패 삼아 몸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에 틀어박혀 버티기만 하면 악몽이 끝나리라 믿는 어리석은 족속들.
“너희의 끝은 파멸이고 절망이다. 곧 하늘이 찢어지고 위대한 왕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바스라져 가는 리치가 킬킬 웃었다.
인간들의 절규 어린 비명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콰득-
그의 두개골을 뚫고 별이 우뚝 솟았다.
그 앞에 선 리하르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균열은 열리지 않아. 내가 막을 거거든.”
“뭣…….”
“결국 악몽은 꿈으로 끝날 뿐이다.”
붉게 타오르는 리치의 안광이 흔들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태도는 무엇인가.
“네놈은…….”
정체가 뭐냐-, 라고 묻기엔 시간이 남지 않았다.
리하르트를 노려보던 리치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 ◈ ◈
성을 떠나고 밤낮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과연 전투는 무사히 끝났을까.
분명 우리가 이겼겠지.
사상자는 얼마나 될까.
많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땅을 내달리는 나르 위에서, 모리츠는 저 혼자 주절거렸다.
그렇게라도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으, 으으…….”
그는 큰 시련을 부여받았다.
이겨 내면 큰 의무를 수행한 것이고, 꺾이면 헛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리라.
물론 모리츠는 꺾일 생각이 없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리하르트가 뿜어내는 빛을 떠올렸다.
참으로 따스하고, 아름다운 빛.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이라더라.
“나도……!”
나도 갖고 싶다.
모리츠의 눈에 열망이 서렸다.
“빌어먹을 리하르트!”
분명 저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고 깔봤는데, 눈 떠 보니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 버린 동생.
머잖아 다시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자신은 저 아래로, 아우는 한참이나 더 위로 진일보했다.
이제는 수긍해야 했다.
자신은 리하르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그렇게나 괴롭히고 우습게 여기던 놈에게 말이다.
“겨울바람 시리고 어둔 밤 두려우면.”
“그분께서 안아 주실지니.”
“나는 나아가리라. 나아가 해내리라.”
리하르트의 진면모를 깨닫고 인정한다는 건, 모리츠 바텐베르크에겐 지극히 고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을 섬기고 나니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저가 믿고 기도를 올린 건 신인데,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리하르트에게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분명 존경과 경외.
기사로서 모시는 자에게 느낄 법한 감정이기도 했으며, 신을 향한 신도의 지극한 마음이었다.
‘다른 놈들은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지만.’
이따금 씩 리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휘잉-
역한 마기 섞인 바람이 불어와, 모리츠의 상념을 일깨웠다.
부르르 떠는 몸을 붙들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에서 멀어지니 저 혼자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만큼 성 밖은 죄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호르시여, 앞길을 밝혀 주소서!”
그는 간곡한 기도를 올리며 내달렸다.
우습지만 머릿속에 그려진 신의 모습은 리하르트를 쏙 빼닮아 있었다.
크워어엉-!
드문드문 마주치는 언데드는 나르가 씹어 뱉었다.
리하르트가 길들인 영물이라더니, 그 영험함과 강맹함은 결코 짐승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저긴…….”
그렇게 한참을 달려, 평원을 건넜을 때였다.
모리츠의 눈에 숲이 들어왔다.
폴린 성과 리오 성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경계선이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이 선만 넘어서면 폴린 성을 지키는 무가들의 영지가 나올 것이다.
으득 이를 악문 모리츠는 멈추지 않고 숲으로 향했다.
◈ ◈ ◈
“취익, 모리츠 동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요새 통 안 보이는구려.”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휴거가 대뜸 찾아와 물었다.
두 눈 가득 담긴 무료함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생각 없는 오크란 참 부러운 존재다.
누군 앞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임무를 보냈어. 당분간 못 돌아올 거야.”
손짓으론 빨리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휴거는 기어코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임무는 무슨 임무요? 췩.”
“하…… 정찰 임무. 폴린 성과 인근 영지를 정찰하고 오라 했다.”
“껄껄! dnwjdtj우리 겁쟁이 동지가 퍽 고생하겠구려!”
배를 두드리며 웃는 휴거를 무시하곤 기도 내용을 훑어보았다.
여느 날과 딱히 다를 바 없는 염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모리츠의 기도 내용을 듣습니다.]
- 호르시여, 앞길을 밝혀 주소서!
그중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모리츠의 기도.
이 담백한 염원에 담긴 신앙이 95나 된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무섭고 두렵다는 거겠지.
“동지가 성장하긴 했나 보구려, 췩! 아기 고양이처럼 벌벌 떨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혼자 정찰도 나가다니!”
“시끄러워. 나가서 떠들어.”
방안에 오크의 걸걸한 음성이 울려 퍼지니 골까지 울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내 말동무를 해 줄 사람이 그대밖에 없다오. 상대 좀 해주시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메리는 어쩌고- 라고 말하려 했으나 도로 입을 다물었다.
리치와의 전투가 끝난 직후, 그녀는 내게서 엉망이 된 망토와 옷을 빼앗아 갔다.
수선해 준다고 하더니,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자님의 옷이니 뭐니 하며 바쁜 모양이다.
“대단한 인간 전사.”
“왜.”
“혹시 모리츠 동지에게 악감정이라도 있소?”
오크 놈이 대뜸 아픈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취익, 물론 난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오.”
“그럼 신경 꺼.”
“그대와 모리츠 동지를 보면 나와 메리 소저가 겹쳐 보이는구려.”
“……뭐?”
휴거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갑자기 지 짝사랑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게 딱…….”
“나가.”
퍽, 그의 얼굴에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걸 재주 좋게 잡아챈 휴거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 농담이라오. 취익!”
“계속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지금 당장 나가.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데.”
내가 그 녀석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을 이유는 터럭만큼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 모리츠의 첫인상은 비호감이다.
그게 다다.
인정하고 말 것도 없는 하찮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비호감이든 아니든, 모리츠는 이미 내 신도가 되었다.
놈은 내 힘에 굴복해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도 아니었다.
기도를 들어 보면 그 포악한 성정이 교화되었다는 것을 절절히 알 수 있었다.
독실한 신도인 그를 차별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동지가 그대의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러워서 그랬소. 혹시 이번 정찰도 그대가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닐까 하고, 췩!”
“부디 네가 메리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이 덜 안쓰럽기를 바란다.”
“꾸이익!”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혼자 옛일에 찔려서 눈치 보는 걸 고쳐줄 필욘 없지.”
바보 같은 놈.
한창 고생하고 있을 모리츠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웬만하면 혼자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건 그 녀석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한 대비는 해 두었으나, 나머지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툭, 툭-
왜일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흐흐…… 뭐요, 동지가 걱정되나 보오? 췩!”
휴거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역시 이 오크 놈은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