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Episode. 22 신의 시련 (1)
썩은 살덩이에 빛나는 살이 꽂혔다.
“크에엑!”
고작 성유(聖油)를 묻힌 화살촉으론 놈들을 무력화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약화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물론 한 번으로는 조금의 티도 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어찌 될까.
“발사 준비!”
“발사!”
일련의 과정이 재빠르게 반복되었다.
폭우라도 내리는 것처럼 화살비가 연신 하늘을 갈랐다.
“키, 키에에엑!”
언데드에게 신앙은 독과도 같다.
틀어박힌 촉 주변으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앞서 달리던 놈이 뒷 놈에게 밀려 고꾸라졌다.
그렇게 선두를 차지한 녀석도 곧 뒷 놈들에게 짓밟혀 머리가 터져 나갔다.
신앙 묻은 살이 꽂힐수록 몸이 굼떠지니, 정작 저들을 죽이는 건 몸 성히 달려드는 언데드들이었다.
“좋아! 효과가 있다!”
“다 쏴 버려! 화살은 아직 발에 챌 정도로 많아!”
오르드가의 기사들이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창만큼이나 활을 잘 다루는 이들이니, 오랜만에 쥔 활대에 들뜰 법도 했다.
피잉-
한껏 당겨졌다가 튕긴 시위가 몸을 떨며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아군에겐 듣기 좋은 악기와 같았고, 적군에겐 사나운 쇳소리와 같았다.
“성자님, 물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기사 하나가 리하르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여기도 물이 끓는다고 외쳤다.
“어서 축복을!”
“난 성수 마셔 본 적도 없는데, 저놈들은 이걸로 목욕을 하겠구먼.”
“부러우면 너부터 해 봐.”
입은 놀았지만, 손으론 열심히 땔감을 밀어 넣는 기사들.
하나하나가 눈에 정광이 깃들어 있었다.
[대상에 5,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리하르트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끓는 물에 신앙을 불어넣었다.
이로써 얼추 대비는 끝났다.
“준비해!”
곧 화살 비를 뚫어낸 괴물들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쿵, 쿠웅-!
성벽에 썩은 살덩이가 부딪쳤고, 살덩이 위에 또 살덩이가 밀려 들어와 탑을 쌓았다.
그저 미친 듯 달려들어 물어뜯기만 할 줄 아는 녀석들.
“안녕.”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리하르트가 인사를 건넸다.
죽은 자도 얄미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걸까.
담을 넘으려던 불청객들이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아그작거렸다.
“부어!”
촤아아악-!
그의 신호에 맞춰 솥이 들어 올려졌다.
화살비를 뚫어 낸 언데드를 기다리고 있던 건 뜨겁디뜨거운 열탕이었다.
그것도 신앙을 양껏 머금은.
“키, 키엑? 끄르르륵!”
치이익-
고기 굽는 소리가 났다.
울부짖던 괴물의 주둥이가 눌어붙고, 죽은 눈이 녹아내렸다.
겉가죽과 속살이 뒤집히듯 안쪽을 연신 게웠다.
◈ ◈ ◈
화살이 끝없이 하늘을 갈랐다.
뿐만이 아니었다.
화살보다 많은 건 왕도에서 공급받은 물이었고, 또 그보다 많은 건 리하르트의 신앙이었다.
저급한 언데드로는 리오 성의 두터운 벽을 허물 수 없었다.
결국 진짜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들이 움직입니다!”
“리치의 움직임도 포착하였습니다!”
백의 데스나이트와 다섯의 리치.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참격이다!”
죽은 기사들이 검을 그었다.
그 끝에서 피어난 참격이 성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제1기사단이 성벽을 뛰어넘어 벼락처럼 검을 뽑았다.
콰앙!
폭음이 울렸다.
성벽에 닿은 공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참격을 막아 낸 기사들이 적군의 본진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하나 적들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우웅-
다섯 리치에게서 흉악한 마기가 요동쳤다.
복잡한 수식을 엮어낸 의지가 기적을 일으켰다.
그 기적이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서릿발처럼 시린 폭풍이 될 수도 있다.
특히나 기사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는 더욱 무서운 존재였다.
“흥.”
놈들을 유심히 살피던 리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엔 더 솜씨 좋은 녀석들이 있거든.”
뒤따라 성채의 꼭대기에서 유동적인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화르륵-
허공에 피어난 불꽃이 순식간에 몸을 불렸다.
오십여 개의 불덩이.
크기는 작지만, 그 안에 짜여진 정교한 수식과 마나는 엄청난 위력을 내포했다.
콰과과광-!
마법과 마법이 부딪쳤다.
리치들이 쏘아낸 고위 흑마법, ‘다크 플레임’이라는 불꽃은 순수히 타오르는 파이어 볼과 만나 폭발했다.
“끼에에!”
그 여파는 중간에 끼인 괴물들의 몫이었다.
콰광, 콰과광!
더불어 이쪽의 마법사는 오십 명.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불덩이는 멈추지 않고 쏘아졌다.
“와아아아!”
연합의 기사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몇 번이고 싸워 왔던 언데드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역겨운 마기는 리오 성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비단 리하르트가 내뿜는 신앙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오오!”
기사들의 마음속에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잊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용맹했고, 얼마나 열심히 단련해 왔는지.
“성문을 열어라!”
칼 쥔 사내들이 거칠게 내달렸다.
화살과 마찬가지로 성유 바른 철검은 부패한 살점을 쉽게 갈랐다.
죽은 자들의 눈먼 공격 따윈 그들에게 닿지 못했다.
샤아악-!
명사수들이 쏘아내는 화살은 적을 알맞게 맞추고, 엘프의 마법은 리치보다 강대하다.
든든한 원호를 받는 기사들은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으하하하!”
겁쟁이 모리츠마저 웃음을 터트리며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쾅- 하고 별이 그의 앞에 떨어졌다.
“으억!?”
그는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별을 보았다.
그러다가 곧 시선을 위로 올렸다.
“모리츠.”
리하르트가 별에 걸터앉아 있었다.
“뭐, 뭐야?”
“저번에 말했던 신의 특명. 지금 알려 주마.”
씨익 호선을 그린 리하르트의 입꼬리가 모리츠에겐 사무치듯 불안하게 다가왔다.
“적의 본진에 다녀와. 정찰 임무야.”
“무슨 소리야? 지금 기사들이 본진을 휩쓸고 있는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흠칫.
오크를 닮은 모리츠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아니겠지.
“폴린 성과 그 인근.”
“야, 리하르트!”
“영지마다 병력이 얼마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와. 지금처럼 대대적인 습격이 진행되고 있을 때가 기회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모리츠는 얼결에 받아 든 웬 송곳니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잠시만…… 나 혼자 거길 쳐들어가라고? 이건 너무하잖아!”
“신의 명령이라니까. 그분께선 불가능한 시련을 내려 주시지 않아.”
툭툭, 리하르트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곳곳에 검은색 구슬이 달린 조형물이 있다면 꼭 깨부숴라.”
“……그럼 어떻게 되는데?”
“별일 없어. 조형물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별일 있다. 조형물도 분명 있다.
모리츠는 스산히 웃는 리하르트를 보며 확신했다.
“참고로 신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
덧붙여진 말도 그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모리츠는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전쟁의 소음도 안 들리고, 손발만 덜덜거렸다.
“뭐야. 다시 예전의 겁쟁이 모리츠로 돌아간 거냐?”
“시끄러워……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리하르트.”
이게 신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믿기 힘들다.
이 잔악한 임무는 리하르트 저놈이 주는 시련이 아닐까.
모리츠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기 싫어? 그럼 말던가.”
“으으!”
거절하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할게, 한다고!”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 신의 계시라면 그는 해야만 했다.
지금의 모리츠는 신을 믿고 광명 찾은 독실한 신도였다. 성수를 마셨을 때 벅차올랐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바텐베르크다. 그 위상에 금이 가는 짓은 더는 할 수 없어! 설령 죽더라도!”
정신력이 나약했기에 보다 수월히 신을 섬기게 되었다.
스스로 변하고자 원했기에 보다 빠르게 변했다.
굳센 각오를 마친 모리츠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뜨거운 시선이 리하르트를 향했다.
형은 목숨을 걸었는데 그 동생은 히죽 웃고 있었다.
“넌 정말 나쁜 놈이다, 동생아.”
내가 널 존경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라는 속마음은 애써 씹어 삼켰다.
◈ ◈ ◈
모리츠가 언데드 사이를 가로질러 나갔다.
“휘유.”
나는 별 위에 올라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짜식. 제법 깡다구가 생겼다.
확실히 변하기는 한 모양이다.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듯 잔뜩 겁에 질렸지만.
물론 나는 그가 쉽게 죽지 못하도록 대비를 해 놓았다. 게다가 모리츠는 은신에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 이번 정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저것 봐. 소질 있잖아.”
언데드는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모리츠를 인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데스나이트도, 영악한 리치마저도 눈 뜬 장님 이었다.
저런 대단한 재주를 썩히는 건 참 아까운 짓이 아닌가.
크워어어엉-!
리오 성을 한참이나 벗어나서야 모리츠가 나르를 소환했다.
대뜸 울려 퍼지는 맹수의 포효에 괴물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찮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뒤늦게 발견한 리치가 마법진을 엮어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내가 별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콰아아!
마법진으로부터 검은 불꽃이 쏘아졌다.
그 앞을 내가 막아섰다.
“흐읍!”
곧바로 일검을 그어 냈다.
검은빛 불의 파도가 몰려오던 기세 그대로 갈라졌다.
“마법사 나리랑 싸우는 건 처음이야. 반갑다.”
“……네놈이 이 악독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구나!’
나는 반가움을 담아 말했는데, 지팡이 쥔 뼈다귀는 노호성을 터트렸다.
[두 자루의 검성 ? 발동.]
코어를 머금은 두 번째 별이 떠올랐다.
첫 번째 별도 공중에서 찬란히 빛났다.
“성자님. 거들겠습니다.”
“취이익! 나도 마법사랑 자웅을 겨루고 싶었다오.”
데스나이트와 드잡이질을 하던 아론과 휴거가 금세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몇몇 기사들도 이쪽으로 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적잖게 리치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건방지구나. 정말 건방져.”
“우리는 다섯이자 하나인 존재. 감히 우리와 대적한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어차피 너희는 폭풍 앞의 촛불이지.”
“곧 끝 모를 심연이 온 세상을 덮을 터! 공포에 떨다 죽어야 함이 마땅하도다!”
시끄럽게 지껄여대는 모습에, 나는 입을 열었다.
“질질 끌 생각 없다. 빨리 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