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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62화 (62/216)

62화. Episode. 21 엘프와 기사의 노래 (3)

“신? 그깟 게 있다고 한들 나완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발락은 완고했다.

거듭하여 설명해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기색이었다.

“나는 이루고자 한 것은 반드시 이루며 살아왔다. 내 삶과 신념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틈은 없다.”

“알겠습니다.”

나는 미련 없이 포기했다.

애초부터 그가 신도가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발락은 그런 사내였으니까.

“그럼 안타깝지만 성주는 못 드리겠군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느냐는 시선이 내 얼굴을 찔러 왔다.

“성수는 있습니다. 그거라도 한잔하시렵니까?”

“흥! 나도 네게 줄 것이 있다만, 이런 식이면 곤란하구나.”

줄 것이라.

한마디로 교환을 하자는 소리였다.

내가 발락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품을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각인의 시험에 통과하리라고는 예상했다. 내 감이 그리 외쳤으니까.”

“……예.”

“그러나 빨라도 너무 빨랐어.”

촤르륵-

그가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금색의 십자가 장식 6개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죽 혁대였다.

“이 여섯 개의 금속은 네게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정확히 뭡니까, 이게?”

“네놈은 별을 검 위에 덧씌워 간신히 유지했을 테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중 검성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고단한 일이다.

진짜 검을 중심축으로 삼지 않으면 마나 소모가 극심해지는 것은 물론, 컨트롤 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건 드래곤의 발톱과 오리하르콘이라는 마법의 금속으로 제련한 ‘코어’다. 한번 이 위에 별을 씌워 보아라.”

발락이 혁대에서 장식 하나를 떼어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별 한 자루를 덧씌웠다.

쿠우우-

“오!”

“오오!”

우습게도 감탄사를 터트린 것은 나와 발락 모두였다.

나는 훨씬 더 다루기 쉬워진 별 때문이었고, 발락은 새하얗게 타오르는 별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얀 별이라니…… 크하하! 어디 강도 좀 알아보자꾸나!”

급기야는 발락도 별을 뽑아 들었다.

당장에라도 부딪쳐 올 것 같은 작태에 나는 힘을 갈무리했다.

“방 박살 낼 일 있습니까?”

“에잉, 김 새게 만드는구나.”

“그보다 이거 굉장한 물건이군요.”

나잇값 못하는 발락을 뒤로한 채 코어를 살펴보았다.

오러를 다루는 난이도가 5라고 했을 때, 검성은 8에 수렴한다.

그런데 이 코어란 물건을 사용하면 3~4라고 쳐도 무방했다.

“코어를 제작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단 한 명뿐이다. 그 빌어먹을 난쟁이를 찾느라 시간을 다 써 버렸지.”

“그래서 이제야 오신 겁니까?”

“그래. 후계자에게 새로운 코어를 전해 주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다. 원래는 네가 각인을 개방하자마자 찾아가야 했지만,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않겠느냐.”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는 아직 별 한 자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내가 수련을 도와주마.”

“반가운 소리입니다.”

◈          ◈          ◈

엘프들이 리오 성에 합류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미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깡말랐던 몸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되찾았고, 목재 가면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옥구슬 흘러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대체 어째서 엘프가…….”

“리하르트 성자님께서 지원을 요청하셨다더군.’

“그분이 엘프와도 연이 있으셨단 말인가!”

기사, 아니 인간과 엘프는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그것도 평상시와 같은 상황에서나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저자들이 도와준다면 좀 더 수월히 막아 낼 수 있겠어.”

“검과 마법의 조합이라…… 어릴 적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인데?”

지금은 공동의 적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연합의 기사들이 수군덕거렸다.

향긋한 풀내음에 코를 벌름거리는 자도 있었고, 몇몇은 앞으로 펼쳐질 전투를 상상하기도 했다.

엘프들이 자리를 옮겼다.

한참 수련에 매진하는 리하르트에게로.

“호르 신의 성자를 뵙습니다.”

“왔어?”

리하르트는 그들을 흘긋 보고는 허공을 부유하는 별 두 자루를 지워 냈다.

“마부(魔斧)는 어떻게 됐지?”

“머지않아 봉인을 완전히 해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좋아. 조금만 더 수고해 줘.”

“별말씀을.”

엘프 족장 타사르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머니인 아델을 대하듯, 깍듯하고 조신한 태도였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자님의 명이 곧 신의 명이라 하셨습니다.”

털썩-

타사르가 무릎을 꿇자 다른 엘프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 달라는 기색이었다.

‘기사들보다 낫군.’

리하르트는 땀을 닦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엘프들은 아델에게서 신도가 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신도가 되었다.

‘아델이 돌보고 금이라 하면 곧 대로 믿을 녀석들이야.’

가만 보면 인형 같기도 했다.

저들의 자아 위에 아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었으니까.

“찬송가는 다 연습했나?”

“예. 메리 신도의 지도에 따라 모든 찬송가를 숙지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굳이 들을 것까지야.

리하르트는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렸다.

깍듯한 건 좋은데, 그게 과할 정도라 마주 보고 있으면 부담스럽기도 했다.

“고놈 참, 귀쟁이 녀석들을 잘도 구워삶았구나.”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끌끌. 수련이나 더 해라.”

발락은 요 일주일간 리하르트의 수련을 도와주었다.

코어를 이용해 별의 모양을 더 수월히 유지하는 법부터, 별 자체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법까지.

“검 위에 별을 씌우는 건 검을 낭비하는 짓이고, 별을 쥐고 싸우는 건 손을 낭비하는 짓이다.”

휘리릭-!

세 자루의 별이 발락의 주변을 자유롭게 나돌아다녔다.

아마 저 궤도에 무언가가 걸리기라도 하면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다.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별의 개수가 아니다.”

“예예, 별 한 자루라도 제대로 다루는 거겠죠. 벌써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에잉, 건방진 놈.”

그때였다.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리오 성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저 멀리 드높은 마기가 치솟았다.

“아무래도 습격인 것 같구나.”

포이르 백작과의 전투로부터 17일 만의 습격.

리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뿔 나팔이 울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늘에 닿을 듯 기세등등한 마기도, 코를 찌르기 시작하는 악취도.

신앙을 품은 리하르트라면 진작에 알아차릴 수 있었어야 했다.

“설마, 기척을 숨겼다고?”

데스나이트라면 뒤틀린 자아로나마 그럴 순 있다.

그러나 지금 다가오고 있는 마기의 파도가 전부 데스나이트의 것이라면 더욱 악질이었다.

“가시죠.”

“그러자꾸나. 어디 연합의 실력 좀 봐야겠다.”

둘은 수련장을 벗어나 성벽으로 향했다.

연합의 기사들은 날듯이 계단을 타고 올라, 성벽 위에 자리 잡았다.

그 외에 지휘관들도 악다구니를 쓰며 명령을 내렸다.

화살이 이곳저곳에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고, 기사 몇몇은 물을 끓였다.

“우리는!”

“무가의 기사!”

“우리는!”

“등불이 될 자!”

쿵, 쿵!

가슴을 두드리는 기사들의 표정은 굳건했다.

긴장은 했으나 두렵지는 않았고, 혼란스러웠으나 몸이 굼뜨지는 않았다.

“호오. 이 정도 마기라면 패닉에 빠질 법한데.”

“저들의 마음에 신앙이 싹튼 이상, 마기에 쉽게 절망하진 않을 겁니다.”

지켜보십시오-

중얼거린 리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등불 쥐신 자 있나니!”

“어둠을 밝히고자 하시고!”

“뜻을 알리고자 하시더라!”

찬송가가 노동요라도 된 것처럼 기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흐음…….”

리하르트는 성벽에 찰싹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적군 추정 병력 일만.”

“데스나이트 백 기와 리치 다섯이 확인되었습니다.”

레오가 그 옆에서 보고했다.

개떼처럼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던 리하르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리치?”

“예. 물론 폴린 성을 장악한 리치로는 안 보입니다.”

과연 그런 거였나.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놈들은 최고위 리치고, 저 녀석들은 그냥 리치. 그래도 방심할 순 없지.”

마법을 부리는 놈들이라면 능히 마기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일만의 언데드가 내뿜는 마기를 말이다.

쿠웅-!

리하르트의 몸에서 신앙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264 □ 신앙 - 330,632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5/5, [최하급 성기사] 0/3 [최하급 사제] 0/2

그가 현재 가진 신앙은 약 삼십삼만.

약 보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발사 준비!”

오르드 가주의 외침에 기사들이 시위에 살을 걸었다.

그들이 쥔 화살에선 밝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호르가 이르시기를]

[내 눈 닿는 곳을 밝힐지어다]

호르교의 깃을 치켜든 신도들이 노래를 불렀다.

기사들도 열과 성을 다해 따라 불렀다.

고오오-

성스러운 기운이 리오 성에서 들끓었다.

그때였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저들은 우리를 해하지 못할지어다.”

“오늘이 역사가 될지어다.”

스산하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는 음성이 노래 위를 덮었다.

엘프들의 목소리였다.

성을 휘감은 신앙이 춤을 추듯 몸을 비틀었다.

주변은 죄 새까만데, 성 혼자 빛을 내뿜으니 이곳이 곧 등불이었다.

“취익, 이것이 그대가 원하던 광경이오?”

어느새 리하르트의 곁으로 온 휴거가 물었다.

그렇다 답했더니, 그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역시 대단한 인간 전사를 따라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오.”

“갑자기 왜?”

“나는 신 같이 본 적도 없는 것에 경의를 표하진 못하겠구려. 다만 그대에겐 내 신뢰와 경의를 바쳐도 될 것 같소.”

이처럼 근사한 전장을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오-

씨익 웃은 그가 도끼를 그러쥐었다.

“…….”

리하르트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벽 위의 모든 기사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엔 휴거와 다를 바 없는 기색이 담긴 채였다.

드디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 리하르트에게 보내는 찬사.

“바보들.”

참 바보 같고 단순한 사내들이다.

그는 피식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적이 몰려온다.

수는 일만.

더불어 강대한 마법사인 리치까지 다섯이나 포함되어 있다.

쉽지 않을 전투가 될 것은 자명했다.

“자신이 없네.”

질 자신이.

리하르트의 몸에서 다시 한번 신앙이 솟구쳤다.

그게 신호였다.

싸아악-!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신앙을 품은 기름, 성유(聖油)를 듬뿍 바른 화살이었다.

“마, 이게 진짜 수성전이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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