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Episode. 21 기사와 엘프의 노래 (2)
열흘이 지났다.
“믿을지어다!”
“미, 믿을지어다!”
신도들을 뒤따라 기사들이 어색한 목소리로 외쳤다.
번쩍 들린 두 손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제법 잘해 준단 말이야.”
나는 턱을 쓸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그마치 일백.
열흘 동안 신도가 된 기사의 수가 일백이다.
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믿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레오랑 아론은 아직 턱도 없고.”
참 우습게도 제일 목청 크던 놈들이 2등, 3등은커녕 100등 안팎도 물 건너가 버렸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꽤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현재 신도가 된 기사들의 경지는 대부분 하급에서 중급.”
그렇다면 일신의 경지가 낮을수록 수월히 신앙심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연합의 기도만 살펴봐도 상급 이상의 기사들은 그 자존심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신을 믿고 섬기는 행위 자체에 마음을 열지 못한 느낌이다.
사실 최상급 기사의 일부는 첫날 이후론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마 전의 레오처럼.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지.”
그러나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최상급 기사보다는 상급 기사가 많고, 또 상급보단 중급과 하급이 많다.
게다가 저들은 내 신도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호, 호르시여!”
“광명…… 광명을 주십시오!”
벌게진 얼굴로 외쳐 대는 기사들을 보자 웃음이 났다.
나는 곧 몸을 돌려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괴물들에게서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음.”
회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시작부터 콱 막혔다.
포이르가와의 전투 끝난 지 열흘.
그 이후로 적의 습격은 없었다.
전시 상황에서 변화란 긴장을 가져오는 법.
“혹시 신…… 의 기운이라던가, 그러한 빛 때문에 습격을 꺼리는 것은 아닐런지요.”
아발트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자 장내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발트, 이 기운이 거슬려서 쳐들어오면 쳐들어왔지, 피할 놈들은 아니야.”
“그럼 성자님께선 어떤 이유로 습격이 멈췄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대로 물어보죠. 언데드들이 왜 꼭 습격을 해야 할 거라 믿는 겁니까?”
내 질문에 수뇌부들이 꿀을 한 움큼 퍼먹었다.
“공격을 또 다른 말로는 방어라고 하죠. 녀석들은 우리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역공을 하고 있던 겁니다.”
바렌 왕국의 절반을 집어삼킨 어둠에 희생된 자들만 대체 얼마일까.
이미 ‘산 제물’은 충분히 바쳐졌다.
남은 건 마계와 이쪽의 경계를 허무는 커다란 의식뿐.
“그럼 서둘러 출정 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 기다리는 건 놈들에게 시간만 주는 짓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굳이 성을 놔두고 적진에 쳐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알다시피 이제야 수성의 이점을 갖추게 되었는데요.”
“그럼 어떻게…….”
리치들은 영악하고 또 영악한 마족이다.
놈들이 비축한 병력이 과연 얼마나 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섣불리 쳐들어갔다간 좋은 꼴 못 보는 게 당연지사.
“오지 않으면 오게 해야지요.”
우선 폴린 성과 그 주변을 탐색하는 게 급선무다.
마침 이 임무에 찰떡인 녀석이 하나 있기도 하고.
“왜, 뭐?”
저도 바텐베르크의 자제라며 꼬박꼬박 회의에 참석하는 모리츠.
그가 내 은근한 시선에 움찔하며 물어 왔다.
이 녀석이 연합 내에서 탄생한 두 번째 신도라니…….
“신께서 네게 특명을 내리셨다.”
“뭐야!?”
“나중에 말해 주마.”
“드디어 나도 그분께 선택받은 거냐! 어서 말해 봐, 무슨 명령이지?”
“쉿. 나중에 말한다고 했다.”
안달이 난 모리츠가 엉덩이를 달싹여 댔다.
참 웃기는 녀석이다.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신도가 되어, 이제는 기존의 신도들만큼이나 독실해졌다.
“아무튼 언데드와 관련된 사안은 일단 넘기기로 하고, 다음은 호르교.”
그렇게 말한 나는 장내를 훑어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수뇌부들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된 게 이 중에 신도가 하나도 없어?”
신도만 없으면 다행이게.
제대로 기도를 하는 놈도 드물었다.
“매일매일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조금 거북하다고 해야 할지…….”
“저도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론…….”
하여간 자존심은 천하제일이다.
대개 기사란 게 그랬고, 잘나신 기사님들은 더 그랬다.
“성자님. 저는 좀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뭐를?”
돌연 레오가 내게 말을 건넸다.
얼굴 한가득 불만을 품은 채였다.
“왜 그분께선 저를 신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까?”
“왜긴 왜야. 네 믿음이 부족하니까 그렇지.”
“매번 종교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열흘 전부터 선지자들은 종교 의식을 진행했다.
이름만큼 거창한 건 아니고, 모여서 기도나 하자는 의미의 모임이었다.
“좀 더 열심히 해. 너는 네 생각만큼 신을 믿는 게 아니야.”
그러자 레오의 얼굴에 더욱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인걸.
◈ ◈ ◈
회의가 끝난 후.
리하르트는 수뇌부들을 데리고 리오 성의 후문으로 나섰다.
그 행렬에 어느샌가 아델이 끼어들었다.
“히히! 아이들이 곧 올 거야!”
리하르트의 손을 꼭 잡은 아델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수뇌부 몇의 입가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누가 온다는 거니? 드루이드 숙녀께서 동물 친구들이라도 사귀셨나?”
“뭐라는 게냐. 내 아이들은 동물이 아니다.”
난데없는 온도 차에 말을 걸었던 수뇌부가 머쓱하니 볼을 긁적였다.
“지원군이 올 거야.”
“성자님. 그게 무슨…….”
그때였다.
저 너머에서부터 들짐승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후문에 선 일행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가면과 후드를 뒤집어쓴 오십여명의 사람들이 늑대를 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어떠한 마법이라도 부린 것인지, 사람을 태운 늑대의 발걸음이 바람처럼 가벼웠다.
척-
그들이 곧 후문 앞에 발을 디뎠다.
그리곤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왔나이다.”
수뇌부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들은 누구고, 위대하신 어머니는 또 누구인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재간이 없었다.
“어찌 그런 가면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렸느냐. 나는 너희를 보고 싶단다.”
그때 입을 연 것은 아델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끌어모은 그녀가 발을 옮겨, 가장 앞에 무릎 꿇은 가면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타사르.”
자그마한 손에 나무 가면이 끌어내려졌다.
곧이어 머리를 뒤덮던 후드도 벗겨졌다.
“에, 엘프?”
“성자님! 이건 대체…….”
수뇌부가 술렁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저들의 눈앞에 있는 가면인들이 죄 엘프였으니까.
“네가 족장이었지? 몰라보게 변했네.”
“변한 건 자네 같은데. 인간이 빨리 큰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네는 유독 빠른 것 같군.”
리하르트가 엘프 족장 타사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 봤을 적엔 말라비틀어진 도라지 같던 엘프들은 아름다웠던 제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그 미모가 가히 경국지색.
여성이고 남성이고 하나같이 빼어난 외모를 뽐냈다.
물론 리하르트가 엘프를 필요로 한 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잘 들어라. 이들은 이제부터 연합과 함께 리오 성을 지킬 것이다.”
충격적인 말에 레오를 비롯한 기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엘프가 발 벗고 나서서 인간을 돕는다니.
두 종족 간의 깊디깊은 골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자님!”
대체 어떻게 엘프와 친분을 갖고있는 걸까.
아델이라는 꼬마의 정체가 무엇일까.
샘솟는 궁금증에 레오가 입을 열 때였다.
“가면 안 벗으시면 맛좋은 성주(聖酒)는 없습니다.”
통증이 이는 성흔을 부여잡은 리하르트가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아직 가면을 벗지 않은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쯧.”
짧게 혀 차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지막 가면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스승이 이렇게까지 하면 속는 척이라도 하지. 에잉, 건방진 놈.”
가면인의 정체는 발락이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승님.”
성채에 마련된 방으로 장소를 옮긴 리하르트가 말했다.
어째선지 그의 목소리가 약간은 싸늘했다.
“내가 늦게 찾아와서 계집처럼 삐친 것이더냐?”
“알고는 계십니까?”
그가 각인을 개방한 게 용과 혈투를 벌이던 당시였다.
그 뒤로 시간이 적잖게 흘렀고, 이제는 두 번째 별마저 얻었다.
“별을 다루는 게 쉽지만은 않더군요.”
“당연하지. 쉬울 리가 있나.”
으득-
리하르트가 슬쩍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퍼뜩 와서 수련법이나 알려 줬어야지-,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참아 냈다.
발락에게서 얻어야 할 게 참 많았으니까.
“그보다 이놈 참 재밌어졌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발락은 리하르트의 이곳저곳을 뜯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환골탈태를 했음에 한번 놀라고, 마나 특성을 보유했음에 두 번 놀랐다.
“검성의 후계자가 마나 특성을 갖고 있다니! 크하하!”
사실 발락도 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체 귀쟁이들과는 어떤 사인지,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또 뭔지 등등.
그러나 지금은 그저 웃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으므로.
“자…… 어서 성주(聖酒)를 내오거라.”
성주.
온 대륙을 돌아다녀도 그것보다 깊은 맛을 내는 술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맛보게 될 최상의 술을 떠올린 발락이 입을 달싹였다.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려 해 봐도, 그는 성주만 생각하면 당과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술보단 물이 건강에 좋습니다. 물이나 한잔 드시겠습니까?”
다만 리하르트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
일 초, 이 초, 삼 초.
둘 사이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곧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최고의 성주를 내어 드리지요.”
“미리 말하지만, 나는 이 전쟁에 참가할 생각이 없다.”
“예.”
“…….”
너무도 평온한 대답에 발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묻지 않는 게냐?”
여덟 자루의 별을 다루는 그는 루드비히와 같은 경지에 선 최강자였다.
발락이 참전하면 아군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적군의 수장인 세 리치에겐 재앙과도 같은 존재일 터.
그런 유용한 아군이 불참 선언을 하는데, 리하르트는 너무도 덤덤해 보였다.
“세상을 뒤덮은 어둠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인류는 지금부터라도 어둠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동화에나 등장할 법한 영웅을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되는 거죠.”
설령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호오.”
발락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그렇지. 때문에 나와 네 아비가 나서지 않는 것이다. 다만, 네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니 놀랍구나.”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세상은 곧 너를 중심으로 뭉치겠구나.”
성채로 들어서기 전에 보았던 깃발이 떠올랐다.
그 안에 담긴 기운이 리하르트의 것이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기와는 상반된 속성의 힘이라니.
이 시국에 이보다 더 눈에 띄는 녀석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럼 네가 말한 부탁은 무엇이더냐.”
“신을 믿으십니까?”
“허, 갑자기 무슨 신 타령이냐.”
멈칫,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굳었다.
“호르교의 신도가 되어 주십시오. 그전까진 성주는 없습니다.”
반면 리하르트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