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60화 (60/216)

60화. Episode. 21 기사와 엘프의 노래 (1)

“휴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저놈이 신도가 될 리가 없을 텐데.

저 생각 없는 오크가 아론이나 레오보다 낫다니.

저것 봐라. 메리한테 정신 팔려서 안면 근육이 죄 흐물흐물해져 버린 멍청이가 아닌가.

“씁. 그래도 뭐.”

확인하는 데에 돈 드는 게 아니지.

빨간 돼지에게 손을 뻗고선 외쳤다.

“신도 임명!”

『휴거가 신도가 되었습니다.』

“…….”

삼 초.

뻗었던 손이 정확히 삼 초간 정지했다.

“꾸익, 메리 소저!”

휴거는 제가 신도가 된지도 모른 채 어깨춤을 추기 바빴다.

왜일까.

대체 왜 저 돼지가 신도가 된 걸까.

뭐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길래…….

『휴거의 기도 내용을 듣습니다.』

- 취이익! 나의 허니, 나의 피앙세! 이 노래의 ‘그분’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제발 우리 사이를 이어주시오! 그리하면 내 모든 것을 주겠소!

“웩.”

헛구역질이 절로 나는 구애의 글귀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건 기도가 아니라 러브레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안에 담긴 염원이 이들 중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기도가 미약하다는 건 전혀 아니다.

‘오크라서 그런 건가.’

오크는 용맹한 종족.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규칙이나 격식을 차리는 이들은 아니다.

싸움을 좋아하고 강자를 숭배하는, 몹시 단순한 전사들.

그 원초적이며 직선적인 성정은 인간처럼 이것저것 재는 일이 없었다.

그만큼 기도에 자신의 소원을 확실하게 담아낼 수 있었을 터.

“웃기는 놈이네. 진짜로.”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휴거가 기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신도가 되다니.

아니, 이놈을 기사로 쳐도 되는지는 의문이지만.

짝!

나는 공터의 중심으로 걸어가, 크게 손뼉을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제야 날 알아본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인사를 해 왔다.

“음.”

신나게 노래를 부른 기사들의 얼굴은 한껏 상기된 채였다.

개중 눈치 빠른 이들은 제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몸에 감도는 활력이 낯설게 느껴질 터.

“취익! 왜 그렇게 빤히 보시오?”

정작 휴거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신도가 되어 가장 많은 활력이 감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아니다. 그보다 레오 경, 아론.”

“옛!”

내 부름에 으르렁대던 둘이 동시에 답했다.

그 반응이 평소보다 과하고, 평소보다 부담스러웠다.

역시 무언가 이상한데.

“너희는 신도가 되기엔 아직 수양이 부족해.”

누가 먼저 되네 마네를 따질게 아니라, 열심히 기도나 했어야지.

충격받은 얼굴의 두 사내를 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메리와 눈을 맞췄다.

끄덕.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끄덕이더니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성자님.”

휜 천이 둘둘 말린 봉.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곤 천을 풀어헤쳤다.

펄럭-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천이 봉 끝에서 나부꼈다.

메리와 신도들이 이곳에서 주먹밥만 나눠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전도 계획을 세우고 노래를 작곡하는 등 굉장히 열정적으로 포교 준비를 해 왔다.

“이건 우리의 심벌이다.”

손에 쥔 깃발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깃에 그려진 문양은 바텐베르크의 ‘천하제일검’도, 무가 연합의 것도 아니었다.

나의 선지자들이 밤잠을 지새우며 만든, 호르교(敎)의 상징.

깃엔 내가 다루는 검성(劍星)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모습이 현대의 어떤 종교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쿵!

나는 깃발을 땅에 박아 넣을 기세로 내리찍었다.

신도들이 그 뒤에 서서 경건히 두 손을 모았다.

“리하르트 도련님?”

난데없는 퍼포먼스에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기도를 올린 직후였으니까.

“이제부터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지 마라.”

신앙 섞인 음성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센스 좋은 전도사 다섯이 동시에 후광을 펼쳤다.

우웅-

나도 질세라 후광을 켜곤, 깃발에도 일만의 신앙을 담았다.

입에선 침이 바싹 마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새겼던 몇 마디 말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께서 쥐고 계신 등불이며.”

“아아-!”

쿵! 쿵!

서른의 신도가 발을 구르며 하모니를 내었다.

“또 나는 그분께서 다루시는 성자일지니.”

발구름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에 맞춰 목소리에 더 많은 신앙을 섞었다.

“나는 위대한 계시를 받아 이 땅에 왔도다.”

“왔도다!”

“악몽 꾸는 양들은 들으라.”

“들으라!”

멍하니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며.”

“너희는 더 많은 이를 구원하게 될 터이니.”

“신께선 양의 믿음을 양분 삼으시고, 양은 믿음을 이정표 삼을 것이다.”

“믿고 기도하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덤덤히 좌중을 훑어보는데, 고개를 돌리고 입을 틀어막은 아델이 보였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이게 얼마나 오글거리고 우스운 짓거리인지.

성자니 위대한 계시니, 전부 다 구라였으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미리 말을 맞췄던 아론이 내 앞에 서서 외쳤고, 뒤늦게 레오가 따라붙었다.

그러자 기사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믿을게, 아니! 믿습니다! 저에게도 빛을 주십시오!”

“취익. 호르라는 신이 정말 있다면 내 소원도 이루어 주지 않겠소? 이거 믿어야겠구려!”

허겁지겁 달려온 모리츠가 철퍽 엎드리며 소리쳤고, 휴거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 광경을 보던 연합의 표정이 묘한 빛을 띠었다.

적잖게 갈등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사로서 자신의 무(武)와 신념을 중히 여겼다.

신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종교 같은 건 나약한 이나 믿는 미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사령관이 믿으면?

또, 그들 중에서 믿는 이가 나타난다면?

이미 마기에 지칠 대로 지친 터가 아니던가.

연합이 맛본 신앙은 결코 미신이라 폄하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앞으로 오후 열두 시 정각에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진행토록 하겠다. 참고로 불참은 불허한다.”

저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던 자들이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나.

“신도가 되는 이에겐 성수 한 모금을 내려 주마.”

신도 하나가 재빠르게 유리병 하나와 나무잔을 가져왔다.

일천의 신앙을 담은 성수와 아델의 나무로 만든 한 모금 크기의 잔이었다.

아론과 레오의 눈이 번뜩였다.

둘 다 자신이 먼저 마시게 되리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둘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휴거. 이리 와 봐.”

“췩?”

쪼르륵-

나는 나무잔에 성수를 따라 냈다.

“몸에 큰 활력이 느껴지진 않아?”

“어…… 그러고 보니, 질 좋은 고기를 양껏 먹은 것처럼 울끈불끈하오. 아까 노래를 부를 때부터 말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밀었다.

멀뚱히 바라보던 아론과 레오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축하한다. 네가 연합에선 첫 번째로 신도가 되었다.”

“꾸, 꾸익? 내가 말이오?”

“그래. 너의 기도엔 아무런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원초적이고 간절했지.”

스윽, 나는 휴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메리와 이어지고 싶다고? 호르께서 톡톡히 들으셨으나, 아직은 너의 신실함이 부족하다.”

“그, 그, 그럼 더 열심히 기도하면……?”

“혹시 모르지. 하지만, 메리 또한 인격체란 것을 잊지 마라. 과하게 들이대지 말란 소리야. 그녀가 마음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며 기도해라.”

입을 떡 벌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잔을 쥐어 주었다.

“마셔. 영광의 첫 잔이다.”

“취이익…….”

그런데 휴거는 잔을 내려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입가에 가져다 대지도 않았다.

“왜 그래?”

“이 물의 효능이 뭐요?”

효능이라.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신앙을 일천이나 담은 성수를 마신 적도 없고, 딱히 마실 필요도 없었다.

“신의 은총을 받게 되겠지. 이 물에 담긴 축복만큼. 너의 걸음걸음에 호르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췩, 그리 빙빙 돌려 말하면 나는 이해 못 하오.”

“한마디로 좋은 거라고. 몸에도, 정신에도.”

대답을 들은 휴거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누렁니를 자랑했다.

그러더니 곧 걸음을 옮겼다.

“메리 소저.”

“휴, 휴거 님?”

휴거의 음성이 무척이나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붉고 두터운 손가락 사이에 끼인 잔이 메리에게 내밀어졌다.

“취익, 나보다는 그대에게 필요할 것 같소.”

“안 됩니다! 이건, 호르께서 휴거 님에게 내려 주신 은총……!”

메리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메리. 네가 마셔도 괜찮아. 자기가 주겠다는데 뭐.”

어차피 기존의 신도들에겐 따로 성수를 줄 생각이었다.

다만 탐욕의 대명사인 오크가 제 것을 남에게 양보한다는 게 퍽 놀라울 따름이었다.

“흐흐, 팔 떨어지겠소.”

“휴거 님…….”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잔을 받아 들었다.

곧 한 모금의 성수를 조심스레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자그마한 목 넘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아!”

몸을 부르르 떠는 메리에게서 후광이 터져 나왔다.

성수의 효과인지, 평소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

“도련…… 아니, 성자님. 두 번째론 꼭 저를 신도로 받아 주십시오!”

“사령관인 제가 먼저 되는 것이 더욱 이득 아니겠습니까?”

일등을 빼앗긴 두 남정네가 금세 목소리를 키웠다.

그게 못내 흐뭇하면서, 한편으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론도, 레오도 신에 대해 유난히 회의적이던 놈들이었으니까.

기도 몇 번 했다고 사람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그런데 그 둘이 끝이 아니었다.

“성자님. 성자님께선 신을 믿고 섬기시는 겁니까?”

제3기사단장, 폴크가 내게 물어 왔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저희가 그 호르교(敎)의 신도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래.”

그러자 눈빛이 바뀌었다.

비단 폴크만 아니라 제3기사단과 여타 기사 몇몇의 눈빛이 말이다.

“알겠습니다.”

왜일까.

그들이 굳센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          ◈          ◈

리오 성으로 가기 위해선 바렌 왕도를 지나쳐야 한다.

그러나 왕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신원이 불분명한 당신들을 보내 줄 수 없소.”

창을 꼬나 쥔 경비병이 눈을 부라렸다.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고된 심문을 받게 될 것이오.”

가면을 쓴 일단의 무리들이 난감한 태도를 취했다.

“사정이 있어 가면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라는 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증거를 대라 이 말이오!”

대단히 훌륭한 경비병이로다-

가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가 속으로 감탄을 토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 상황이 곤란했다.

‘분명 어머니께선 이 이름을 밝히면 될 거라 하셨는데…….’

뭐가 되기는커녕 의심의 눈빛만 짙어질 뿐.

이제는 아예 손에 쥔 창을 내지를 기세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법으로 잠재우는 것은 쉬우나, 올바르게 제 할 일을 하는 경비병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비슷한 업을 행하는 이들로서 동질감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가면을 쓴 존재들이 내적 갈등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지금 리하르트라고 했는가?”

“……!”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초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묻잖느냐. 리하르트라고 했느냐고.”

“……그렇습니다.”

대체 어느 틈에 온 건지 모를 노인이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킁킁-

그가 돌연 코를 움찔거렸다.

“호…… 풀내음이 진동을 하는데, 내 제자 놈이 의외로 발이 넓나보구나.”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노인, 발락이 흥미롭다는 듯 씨익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