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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58화 (58/216)

58화. Episode. 20 기원 (2)

이제야 떠올라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폴린 성을 잡아먹은 어둠.

그때부터 시작된 지옥도.

긍지 높은 기사들의 절규는 어떠했던가.

철그럭-

백작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린 검이 애처롭게 울었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전장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에게선 잘 벼려진 검과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저들은 위대한 바텐베르크를 지탱하는 첫 번째 기사단인 것을.

분명 괴물일 리가 없을 텐데.

이번엔 고개를 돌려 리오 성을 보았다.

산처럼 쌓인 시체 너머 연합군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오르드, 린느, 자칼, 사이언, 헬가…….

믿음직스러운 무가들이 리오 성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 다행, 이도다…….”

끔찍한 악몽이 바렌 왕도와 리오 성을 덮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악, 몽에…… 빠진, 건…… 우리였, 구나…….”

백작이 짙은 안도감을 내비쳤다.

왕도가, 리오 성이 건재하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죄악감이 그를 괴롭혔다.

저들에게 검을 들이민 것은 백작을 비롯한 포이르가의 기사들이었으니까.

“어둠이 너희를 속이고 우롱했다.”

리하르트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 지났다.

“그대, 의…… 이름, 을…….”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백작의 몸이 흠칫 떨렸다.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부디…… 죽여, 주, 십시오…….”

겨우 내뱉은 말이 그것이었다.

백작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다.

눈에 비친 산 자들이 기괴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저주에 저항하던 백작의 정신이 다시 저물어 갔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최소한 기사로서 죽을 수 있도록.

굳은 발걸음으로나마 리하르트에게 다가가 목을 내밀었다.

“우리가 왕국을 지키고 있으니 편히 쉬길 바라지.”

별을 꽉 그러쥔 리하르트가 백작을 위로했다.

믿어 달라는 듯, 잔뜩 지친 몸을 일부러 곧게 펴고선 백작을 마주했다.

고오오-

별과 별이 하나가 되어 공명했다.

한 줌 남았던 신앙이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척-

포이르 백작은 말없이 바텐베르크의 혈통 앞에 검례를 취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고된 전투가 끝났다.

이번에도 성을 지켜 낸 연합은 소리를 질렀다.

환호성이라기보단, 승리했음을 알리는 의식에 가까웠다.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오늘의 전투에서 희생된 기사들과, 포이르가의 기사들을 한데 모아 화장을 실시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신도들이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껏 쉰 목소리였으나 최선을 다해 죽은 이들의 넋을 기렸다.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불꽃이 이리저리 춤을 췄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떠나보낸 동료의 검을 쥐어 든 기사는 연신 궁시렁거렸다.

이게 그렇게나 명검이라고 자랑하더니만…… 바보 같은 자식- 이라고.

슬픔을 잊으려는 서툰 발버둥이었다.

“기름 더 가져와!”

“널브러진 무구는 모두 챙긴다!”

노래가 끝나고, 묵념을 하던 연합은 다시 바빠졌다.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와중, 휴거와 리하르트는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찬송가가 아니라 진혼곡 같았어. 저 녀석들 목소리가 다 갈라졌네.”

“취익, 동감이오. 그나저나, 역시 소저는 아름답구먼…….”

휴거의 시선은 메리에게 떠날 줄을 몰랐다.

헤벌쭉 풀어지려던 얼굴 근육을 가다듬은 그가 돌연 표정을 굳히곤 물었다.

“아론은 좀 어떻소? 많이 다친 것 같던데.”

“어떻긴.”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깃발을 휘감은 채로 누워 있는 기사가 있었다.

그 꼴이 마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은 것처럼 보였다.

“취, 취익! 아론이 죽은 거요!?”

“그래.”

“맙소사……!”

충격적인 사망 소식에 휴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단한 인간 전사의 충직한 기사가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다니…….

그때였다.

“저 안 죽었습니다, 도련님!”

깃발에 감싸인 시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으잉? 대단한 인간 전사, 이게 어떻게 된…….”

“젠장, 결국 언데드가 된 건가!”

“어, 언데드라니……!”

리하르트의 경악 어린 음성에 휴거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곤 서둘러 아론을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언데드가 맞나, 싶던 휴거가 등에 맨 도끼를 뽑아 들었다.

“대단한 인간 전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췩!”

“크흡…… 휴거, 부탁한다. 저런 모습의 아론을 보는 건 내겐 너무나 잔인한 일이야.”

“맡겨 주시오. 정말 하늘도 무심하구려…….”

그 대화를 듣던 아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멍청한 오크가 도끼를 쥔 채 다가오는 작태가 유난히 공포스러웠다.

“휴거어! 도련님이 장난을 치시는 것뿐이다! 나 안 죽었다니까!”

“문답무용이라오!”

리하르트는 그 해프닝을 지켜보며 낄낄거렸다.

좀비에게 물린 것도 아니고, 데스나이트의 검에 베인 걸로는 언데드가 되지 않는다.

아론이 깃발을 휘감고 있는 이유는 깃발이 품은 신앙의 효과를 받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도 꽤 무리했으니까.

“참 짓궂으십니다.”

레오가 리하르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말은 그러했으나, 레오도 피식 웃으며 휴거와 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축 처질 것 같아서.”

리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포이르 백작의 목을 베었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선명했다.

무언가를 베는 것에 나름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이번의 감각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그렇게 말한 레오가 리하르트가 벗어 던졌던 왕관을 그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요.”

“고맙다. 한결 낫네.”

그 뒤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오였다.

“적지 않은 기사가 전사했습니다.”

“적의 수가 그만큼 많았으니까.”

“원래는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오늘도요.”

그가 이를 꽉 깨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아직도 연합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립니다.”

하나같이 엘리트 소리를 들으며 단련해 온 기사들이다.

그런 그들이 툭하면 겁먹고, 또 툭하면 허둥지둥 실수를 남발한다.

이 모든 게 마기 때문이었다. 근성 따윈 이 빌어먹을 어둠 앞에선 허울 좋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웬만한 자가 아닌 이상 마기에 괴로워하는 게 당연하지.”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않습니까.”

레오의 시선이 신도들을 향했다.

일반인에 불과한 저들이 연합의 기사들보다 활기차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스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정말 신이라는 게 있긴 한가 봅니다.”

레오가 뜨거운 눈길로 주군의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기도를 성공적으로 올린 이후부터 리하르트에게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아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무언가.

“그러게 내가 몇 번을 말했냐.”

리하르트는 작게 웃으며 레오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그것을 끝으로 그의 육신이 뒤로 허물어졌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었으니, 거하게 잠이나 잘 셈이었다.

◈          ◈          ◈

시끌벅적한 소음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사실 잠이 아니라 기절이었지만.

“아으…….”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나를 성채 안의 방으로 옮겨 준 게 분명했다.

그건 고마운데, 제발 잠 좀 자고 싶다.

백작과의 전투에서 너무나 무리를 한 탓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내겐 휴식이 필요했다.

“아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걸까.

소음은 끝이 날 줄 몰랐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머리끝까지 덮었던 이불을 걷어 내곤 귀를 기울였다.

소음의 정체는 노랫소리였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성채 밖에서부터 신도들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여기까지는 좋다.

조화롭게 얽힌 그들의 음성에선 성스러운 기운이 풍겨 나왔다.

문제는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두 남정네였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잔뜩 악에 받친 외침이 귓가에 때려 박힌다.

음정도 뭣도 없는 괴성에 가까운 그것은 아론과 레오의 목소리였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머리를 긁적였다.

이 와중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삭신이 쑤시는 몸을 이끌고 괴성의 근원지로 향했다.

『아론 마이어의 기도를 듣습니다.』

- 부디 바라옵건대 도련님이 무사히 깨어나시게 살펴주시고, 기사된 자로서는 제가 첫 번째 신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적어도 레오 단장님보단 빨리! 호-르!

『레오의 기도를 듣습니다.』

- 우리 막내 도련님이 쓰러진 것은 알고 계실 테지요. 그분의 옥체에 무언가 문제가 있어선 아니 될 겁니다. 후후…… 제가 당신을 위해 이천의 신도를 준비할 터이니, 당신도 그에 걸맞은 성의를 보이십시오. 참, 아론 마이어라는 놈팽이보다도 저를 먼저 신도로 받아들이셔야 할 겁니다. 호-르.

“허.”

밖으로 나오는 길에 기도 내용을 확인하는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단 내가 쓰러진 지 이틀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기도가 두 번씩 들어왔으니까.

문제는 최근의 기도 내용이 가관이라는 것이다.

“아니, 아론은 그렇다 치고, 레오는 뭐야? 기도랑 협박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아픈 골이 더욱 당겨 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경쟁이 붙은 건지.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두려워 마라!”

곧 성채 밖 넓은 공터에 도착한 내 눈에 난장판이 들어왔다.

깃발을 치켜들고 노래를 부르는 신도들.

그 앞에 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는 레오와 아론.

그리고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연합군들까지.

“아빠아!”

근처의 나무 위에서 깔깔거리던 아델이 먼저 날 발견하고 달려왔다.

와락 안기려 드는 그녀를 제지한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게 있지! 들어 봐, 완전 웃겨!”

잔뜩 신이 난 아델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쓰러지고 하루 지난 날, 레오가 신도들과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기도하는 것조차도 버거워하던 그를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서?”

“근데 아론이 끼어들어서 같이 노래를 부르더니, 문제의 발언을 내뱉은 거야!”

“문제의 발언?”

“응응. 큼, 크흠!”

그녀가 목을 가다듬곤 말을 이었다.

아론의 말투를 따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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