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57화 (57/216)

57화. Episode. 20 기원 (1)

모두가 소년을 미친놈이라 불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소년은 죽음을 찾아다녔으니까.

대륙을 떠돌며 수없이 마물과 싸웠고, 잘난 무가에 찾아가 기사들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미천한 출신에, 제대로 된 검술 한 자락 배운 적 없는 소년은 미치광이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정말 미친 것은 아니었다.

“죽으면 나는 그게 끝인 놈이란 것이고.”

“살아남으면 성장한 것이리라.”

그저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약자와의 싸움은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저보다 턱없이 높은 수준의 상대에게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처음은 고블린.

그다음은 오크.

또 그다음엔 무가의 기사.

소년은 고블린에게 세 번이나 죽을 뻔했으며, 오크 하나를 쓰러트리는 데 죽음의 문턱을 수십 번이나 밟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죽지는 않았다.

마치 소년의 삶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듯, 어떻게든 이어져 갔다.

그렇게 수백 번을 싸우고, 생사를 수백 번 넘나들었을 때. 반드시 뛰어넘고 싶은 상대가 생겼을 때.

어느새 청년이 된 그의 손엔 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흉악한 오크 대족장을 홀로 막아섰을 때는 두 자루가.

강대한 마법사의 군대가 펼치는 마법을 갈라냈을 당시엔 세 자루가.

하늘이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별을 내려 주었다.

반대로 소년은 죽음을 원하는 것처럼, 위기에 몸을 내던지고 별을 얻어 냈다.

그의 별이 여덟 자루가 되었을 땐 비로소 최강의 격에 올라섰다.

“너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경지다.”

“대체 어찌 여기까지 올라왔는가.”

오래전 그에게 참패를 안겨 주었던 천재가 물었다.

천재 앞에는 청년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지긋지긋한 재능.”

“토악질이 나오는 출신.”

“그따위 것들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 초월을 위한 검술을 만들었다.”

청년이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한계에 달해 부들거리는 몸을 붙들고 다시 일어섰다.

“보아라.”

“이렇게 또 한 번 한계를 뛰어넘지 않았는가.”

두 발로 일어선 그의 곁엔 아홉 번째 별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

천재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분명 기억에도 희미할 정도로 보잘것없던 자였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강해져서 다시 자신을 찾아왔다.

천재의 메말랐던 감정에 파문이 일었다.

어찌 기껍지 않으랴.

고독했던 정점에 또 다른 이가 올라와 준다는 것이.

“너를 검성이라 부르마.”

“하늘 아래 오직 나, 검황만이 너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두 최강자가 맞부딪쳤다.

◈          ◈          ◈

검황은 바텐베르크의 초대 가주다.

그리고 검성은 그의 유일한 호적수였다.

끝끝내 열두 자루의 별을 다루게 되어, 정점을 넘어 초월에 이르른 두 번째 초월자.

“발락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어.”

리하르트가 욱신거리는 성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몰아쉬는 숨에 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별의 힘을 끌어내는 데에 중요한 건 재능이 아니야.”

물론 초대 검성의 재능도 절대 얕지 않았다.

하나 그래 봤자 최상급 기사 정도의 재능이었다.

애초에 시험의 각인도 ‘자질’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진짜 필요한 건, 압도적인 상대에게 목숨을 내걸고 달려드는 성정.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승리하리라 굳게 믿는 신념.

초대 검성의 의지를 품은 성흔은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계승자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한계에 끝없이 맞서기를 종용했다.

원래 이런 무모한 도전은 리하르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사서 고생을 해야 하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발락에게 각인을 부여받았다.

죽음을 가까이할수록 강해질 수 있으니까.

“포기, 해라…… 네, 놈들, 은…… 날…… 이, 길 수…… 없다…….”

“결국은 내가 다 이겨.”

포이르 백작의 음성에 리하르트가 나직이 답했다.

모니터 너머로 지켜봤던 초대 검성의 입버릇이었다.

우습게도 그 말에 반응하듯, 성흔이 우웅 떨었다.

“아론.”

“예, 도련님.”

“아직 할 만하냐?”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론이 짐짓 괜찮은 척하며 허세를 부렸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리하르트는 다시금 별을 치켜들었다.

그의 뺨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왕관을 벗어 던진 리하르트는 더는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억눌렀던 두려움이 고개를 치켜들고, 눈앞의 괴물이 뿜어내는 살기에 몸이 굳어 버렸다.

꽈앙-!

순식간에 짓쳐 든 백작의 검이 별을 두드렸다.

아론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틈을 만들어 준 덕에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결국은 내가 다 이겨……!”

강렬한 일격에 주르륵 밀려난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초대 검성이 된 것처럼, 더 이상 죽음이란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이기리라고 세뇌하듯 되뇌었다.

“흡!”

땅을 박차고 달려든 리하르트의 별이 백작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포이르 백작은 자세를 낮춰 피하곤 검을 가로로 한 번 그었다.

푸확-!

그 가벼운 휘두름의 여파는 적지 않았다.

검 끝을 벗어난 참격이 뒤로 물러난 아론과 리하르트의 몸을 갈랐다.

“이, 이런!”

싸움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나설 수 없었다.

막내 도련님과 그 직속 기사의 눈에서 타오르는 전의가 여전했으니.

이를 으득 악문 둘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별과 창이 매섭게 백작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 찮다……!”

좌우로 나뉘어 가해지는 공격에 백작의 검이 움직였다.

카가가강-!

찰나의 순간, 별과 창, 검이 수차례나 충돌했다.

무구와 무구가 만나 피어나는 불똥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일반인의 눈으론 쫓을 수도 없는 공격과 수비의 연속.

쾅!

그 날붙이의 폭풍 속에 웬 주먹 하나가 백작의 갑옷을 때렸다.

독기를 한가득 품은 리하르트의 주먹이었다.

“감, 히!”

백작의 노기 어린 검격이 리하르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초집중 특기 ? 발동.』

무아지경(無我之境).

리하르트의 시계가 느려졌다.

멈춘 것만 같은 세상에 백작의 검만이 빠르게 찔러 오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리하르트가 전력을 다해 고개를 꺾었다.

픽- 하고 그의 볼에서 피가 뿜어졌다.

“노옴!”

백작이 일갈하며 그를 걷어찼다.

리하르트가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피를 한 움큼 뱉어 내며 날아갔다.

그때였다.

보라색 오러를 줄줄이 휘감은 창이 백작의 미간을 노렸다.

백작은 이깟 공격 따위 눈 감고도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콰직-!

그러나 이상하게도 백작의 얼굴 절반이 뜯겨 나갔다.

마지막에 고개를 비틀지 않았다면 그대로 결판 날, 위험한 일격이었다.

대체 어떻게.

검을 휘둘러 창의 진로를 비틀었건만.

백작의 한쪽 남은 눈이 흔들렸다.

아론이 다시 창을 찔러 넣었다.

카드득!

올곧게 뻗어 오던 창대를 검으로 걷어 내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비틀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창을 휘감았던 보라색 오러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쏘아졌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백작의 어깨.

콰직!

그 흉포한 오러는 어깨를 갑옷째 씹어 삼키듯 뚫어내곤 사라졌다.

“젠장!”

아론이 숨을 몰아쉬었다.

창을 쥔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더는 오러를 유지할 재간도 없다.

주군이 원하는 적을 반드시 꿰뚫는 수족 같은 기사.

마경을 떠나 홉슨 산맥으로 향하며 들었던, 리하르트가 원하는 기사의 모습.

그 이후로 아론의 목표가 된 기사의 상(狀).

그러나 아직은 멀기만 했다.

겨우 두 번의 찌르기로 여력이 하나도 남지 않다니.

그의 표정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제법, 이구나…….”

백작이 짧은 감탄을 토로했다.

소드 마스터인 그에게 이런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창기사는 드물다.

필시 조금만 더 여문다면 정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창을 구사할 터였다.

검을 타고 마기가 솟구쳤다.

새까맣게 물든 검이 그대로 아론에게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폭음이 울렸다.

어느새 아론의 앞에 선 리하르트가 검을 막아 냈다.

힘겨루기하는 별이 쉴 새 없이 떨려 왔다.

“이젠 내 차례야.”

리하르트의 눈에서 진득한 독기가 번들거렸다.

계속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성흔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두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그리고 두 번째 별이 리하르트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쳤던 몸에 거짓말처럼 활력이 깃들었다.

꽈앙-!

◈          ◈          ◈

[모든 의심을 내버려라]

[너희가 믿을 때 광명을 얻으리]

신도들의 노랫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새까맣게 몰려들던 언데드는 어느새 끝을 보였고, 제1기사단과 격전을 치렀던 망자의 군단은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남은 건 포이르 백작 하나.

“크아아악!”

부하를 모두 잃은 망자가 분노를 터트렸다.

당장 저 흉악한 놈들을 죽여야 하는데.

왕국을 괴물들로부터 되찾아야 하는데.

눈앞의 역겨운 괴물이 역겨운 빛을 뿜으며 물고 늘어졌다.

빛이 하나 더 늘고 나서부턴 더욱더 역겨워졌다.

빠르고, 강맹하다.

태양같이 밝은 빛은 한여름의 그것처럼 기승을 부렸다.

꽈앙-!

검과 별, 두 개가 부딪쳤다.

분명 막았는데도 빛의 파동이 백작을 휩쓸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백작은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괴물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콰앙, 콰앙-!

양손에 두 별을 쥔 괴물이 미친 듯 공격을 가했다.

제 몸의 어디가, 얼마나 잘려 나가던 상관없다는 듯, 무식한 공격 일변도.

백작이라면 능히 그를 죽일 수 있었고, 당연히 그리하려 했다.

그런데 왜 죽지를 않는 것일까.

왜 자꾸만 공격이 빗나가는 것일까.

목을 노리면 어깨를 베었고, 팔을 자르려고 하면 겉가죽을 가르는 선에서 그쳤다.

백작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만큼 신앙을 쐬었는데, 아직도 눈치 못 챘어?”

역겨운 괴물이 공격을 멈추고 말을 건넸다.

“네가 어떤 꼴인지 직접 봐 봐.”

“무, 슨…… 소, 리를…….”

백작이 입을 멈췄다.

어째선지 자신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것처럼 보였다.

“괴물은 우리가 아니야.”

역겹기 짝이 없는 시체가 백작에게 다가왔다.

“포이르 백작, 너야.”

“……!”

그 말을 듣는 순간, 줄곧 귀찮게 하던 끔찍한 괴물이 생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백작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저가 즐겨 입던 갑옷.

애지중지 다루던 소중한 검.

극도로 단련된 신체.

모든 게 그대로였다.

역시.

저 괴물이 간악한 혀를 놀린 것뿐이다.

더러운 언데드답게 기이한 사술을 부린 것뿐이다.

“웃기, 지…… 마라……!”

데스나이트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나는 이쪽, 너희는 저쪽이라고.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검이 리하르트를 향해 뻗어 나갔다.

검 끝은 그대로 미간을 꿰뚫을 것처럼 나아가더니, 직전에 탁 멈췄다.

“것 봐. 너도 아니까 날 안 죽이는 거잖아.”

안 죽이는 것이 아니다.

못 죽였다.

검을 더 이상 뻗지 못했다.

육체가 눈앞의 괴물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다.

파각-!

딱딱히 굳은 백작의 몸을 역겨운 빛의 별이 갈라냈다.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몸에 흐르는 것은 산 자의 피일 텐데, 죄 새까맸다.

응당 느껴져야 할 고통도 없었다.

“귀를 기울여라.”

괴물이었던 청년이 차분히 말했다.

백작의 귓가로 아름다운 노랫말이 들렸다.

[먹보다도 검게 물든 이여]

[등불이 너의 색을 되찾아 주리라]

[웅혼한 영혼이여]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

[너는 위대했고 찬란했으니]

조금 전만 해도 끔찍한 괴물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죽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서걱-!

찬란한 별이 다시 한번 그의 몸을 갈랐다.

성스러운 기운이 백작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주변을 살펴봐라.”

백작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포이르가의 기사를 모조리 죽였던 괴물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되려 괴물과 용맹히 싸워 승리한 기사들만이 존재했다.

“아…… 아아…….”

왕국을 되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병사들은 끔찍한 언데드였다.

자신이 이끌었던 이들이, 모두 다 언데드였다.

그가 떨리는 눈으로 다시 제 몸을 살폈다.

갈라진 갑옷 사이로 구더기 들끓는 살점이 드러났다.

거기서 검은 피가 꾸역꾸역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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