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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55화 (55/216)

55화. Episode. 18 망자의 군대 (3)

“아빠는 죽지 않았다.”

모리츠를 흘겨보며 중얼거린 아델은 성벽 밖을 바라보았다.

리오 성을 위협하듯 들끓는 마기.

이 정도의 마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연합 내에서도 오염된 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터.

아델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쿵-!

돌연 그녀가 성벽 위에서 발을 굴렀다.

직후, 성 주변의 땅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콰드득-!

솟구친 나무줄기 수 갈래가 성벽을 휘감았다.

“뭐, 뭐야?”

연합은 난데없는 나무줄기에 몸을 떨었다.

혹시 적의 공격은 아닐지, 긴장 가득한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그러나 그 불안은 점차 사그라졌다.

“신앙만큼은 아니나, 어느 정도는 마기를 막아 줄 것이다.”

세계수의 뿌리.

기나긴 세월 동안 가뭄 아닌 가뭄에 바짝 메말랐던 그 뿌리는 조금이나마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싸아아-

고동색 뿌리에서 옥빛이 뿜어져 나왔다.

세계수가 품은 생명의 빛이었다.

사납게 성을 내던 마기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드루이드가 이런 힘도 갖고 있었나.”

레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자그마한 꼬마가 몹시 커 보였다.

“사령관아. 적들은 당장 쳐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아델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 진을 친 시체들은 오롯이 선 채로 이쪽을 노려볼 뿐, 당장 칼을 뽑아 들진 않았다.

“병사를 기다리는 거겠지.”

악취를 풍기는 병사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방을 훑은 레오는 다시금 기세를 일으켰다.

“경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은 제외하고 전투를 대비하라!”

그렇게 외친 그는 수장들을 따로 불러 연합의 사기를 북돋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고는 적군이 쏟아 내는 살기를 저 혼자 맞받아 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연합의 표정이 한결 더 나아졌다.

“잘 싸우기만 하는 바보인 줄 알았더니, 제법 무리를 다룰 줄 아는구나.”

아델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계수로서 수많은 전쟁을 지켜보았던 그녀에겐 처음의 무가 연합은 영 오합지졸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령관의 자질이 의심되던 참이었다.

“리하르트 도련님이 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지.”

“아, 들렸느냐? 혼자 중얼거린 건데.”

“보기완 다르게 건방진 꼬맹이구나.”

레오가 적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머리에 꿀밤이라도 한대 놔주고 싶은데, 아델이 풍기는 분위기가 영 범접하기 힘든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 도련님을 아빠라 부르던데…… 설마 도련님의 숨겨 둔 따님이십니까?”

“하대를 할 건지, 존대를 할 건지 하나만 하거라.”

피식 웃은 아델이 말을 이었다.

“자식은 맞으나,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라는 육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는 못하지. 굳이 말하자면…… 아빠는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너는 기도나 하거라.”

아델은 그 말을 끝으로 성벽을 내려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나타냈다.

“…….”

레오는 그녀의 뒷모습을 흘긋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적들을 향한 눈에 힘이 들어갔다.

‘기도라.’

그게 뭐라고 이렇게 힘든 건지.

오직 무(武)만을 갈고닦아 온 일생이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기도란 약한 쥐어 대는 지푸라기요, 나약한 자가 의지하는 헛된 희망일 뿐이다.

뿌리 깊게 박힌 선입견이 그러한 속삭임을 멈추질 않았다.

스윽-

레오가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정확히는 반지를.

“부디 도련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게 해 주십시오.”

호르시여.

이 약하고 또 나약한 기사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아니지, 나 안 약한데.”

레오가 불만스레 중얼거릴 때였다.

몸에 갑작스러운 활력이 맴돌았다.

◈          ◈          ◈

연합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숨 막히는 대치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또 해가 저물어 밤이 되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 온종일 살기를 쏘아 대는구나!”

사령관과 수장들의 노력 덕에 연합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성질을 내며 두려움을 몰아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무가의 기사다!”

“가문의 깃발 아래 내건 맹세는 무엇인가!”

“기사로서 살고! 기사로서 죽는다!”

쿵, 쿵!

지휘관의 외침에 성벽 아래 늘어선 기사들이 가슴을 두드렸다.

긴장이 고조되며, 눈가에 일렁이는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이제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역겨운 괴물들이 가까워졌음을.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리오 성에서 분 것이 아니다.

우습게도 죽은 기사들이 뿔 나팔을 분 것이다.

“하……!”

지휘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데스나이트.

이지를 가진 언데드로서, 무리를 통솔하는 능력은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전투 준비!”

저 멀리 수천의 언데드가 검은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놈들은 포이르의 기사들을 지나쳐, 리오 성을 향해 득달같이 덮쳐 왔다.

“성문을 개방하라!”

“우오오!”

성문이 열렸다.

연합의 기사들은 전원 밖으로 나가, 방진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훅 하고 마기가 숨에 섞여들었다.

고작 한 발짝 나아갔을 뿐인데, 세계수의 생명력이 미치지 않는 성 밖은 지옥 그 자체였다.

“으으……!”

공기마저 음습한 전장.

달려오는 수천의 시체들.

그 뒤에서 살기를 쏘아 대는 망자의 군대.

연합은 고개를 돌려 성벽에 내걸린 깃발을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을 애써 목구멍으로 넘겼다.

“1열, 방패 들어!”

“제대로 자세 잡아라! 적들을 막아!”

레오가 벼락같이 외쳤다.

동시에 수장과 지휘관들이 검을 뽑아 들고는 목청을 높였다.

어느덧 전투가 시작되었다.

철제 방패에 썩은 살덩어리가 수없이 부딪쳤다.

미친 듯 달려오던 적의 선두가 그제야 멈췄다.

크에에엑-!

방패 너머로 2열이 창칼을 찔러 시체의 머리를 꿰뚫었다.

1열이 막아 내고, 2열이 급소를 찌른다.

그 뒤로 수많은 기사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콰드득-! 콰앙-!

전장의 중앙에선 유난히 커다란 소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레오와 제1기사단이 적들 사이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단장! 단장은 연합을 통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나는 칼질이 성미에 맞나 보다.”

기사단원은 레오의 푸념 섞인 말에 낄낄거렸다.

그러곤 더욱 바삐 몸을 움직이며 외쳤다.

“제가 언데드가 되면 단장이 죽여 주쇼!”

그 외침이 선두였는지, 적들에게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단원들이 저마다 목소릴 높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이나 해!”

레오는 한 번 일갈하고는 달려드는 언데드를 베어냈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언데드.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조를 나눠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파도에 손가락 몇 개를 찔러 넣는다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손바닥, 아니 온몸을 던져도 모자랐다.

그 때문에 연합은 성을 텅 비워 두고 전면전에 나섰다.

“으아아악!”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고, 땅은 검은 피에 질퍽거렸다.

“제, 젠장! 물렸어!”

잔뜩 우그러진 방패를 내던진 1열의 기사가 제 목에 칼을 박았다.

그 자리를 3열의 기사가 채웠다.

“방진 유지해!”

통솔 역할을 맡은 지휘관과 수장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론과 휴거를 비롯한 리하르트의 일행도 분전을 거듭했다.

그렇게 싸우길 한참.

언데드는 끝이 없었고, 진짜 적은 아직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굳건한 방패가 되었던 연합은 지치기 시작했다.

“방패 똑바로 들으라고!”

“정신 못 차려!”

패색이 짙어질수록 전장을 가로지르는 고함이 잦아졌다.

죽고자 하면 산다더니.

그 산다는 것이 언데드가 된다는 뜻이었던가.

악취 나는 괴물이 싱싱한 살점을 씹어 댈수록 조금씩, 조금씩 용기와 사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조용히 성벽 위에 서 있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뒤로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저마다 새하얀 망토를 깊이 뒤집어쓴 채였다.

“길 잃은 영혼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줍시다.”

움켜쥔 연합의 깃발에서 빛이 일었다.

메리와 신도의 눈에서도 기이한 열기가 일렁였다.

신이시여.

어둠과 맞서는 용사들에게 축복을.

“아아-.”

성벽에 늘어선 신도들이 가느다란 음성을 내뱉었다.

“등불 쥐신 자 있나니.”

메리가 그 가운데에서 읊조렸다.

그러나 전투가 격해진 전장까지는 닿지 못했다.

우웅-

그녀의 뒤로 밝은 후광이 일었다.

이어서 읊조린 목소리는 몹시 묘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분이 등불을 부려 어둠을 밝히고자 하시고]

메리를 둘러싼 후광이 밝아졌다.

신도들이 열 개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린 양을 부려 뜻을 알리고자 하시더라]

그들이 준비한 찬송가.

‘양은 노래하리’.

깃발에서 빛이 솟구쳤다.

자그마한 읊조림에 고운 음률이 섞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한밤중에]

[그분께서 등불 통해 기쁜 소식 전할지니]

[곧 새벽 동이 터 오르리라]

전장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듣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음색은, 거듭된 전투에 지친 연합군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저들은…….”

새까만 마기가 불에 덴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 신도들로부터 피어난 빛이 다가왔다.

[어둠은 두려움 품고]

[양은 믿음 품으니]

[어찌 이 짧은 밤 못 버틸까]

스노우폴에서 지낼 무렵.

그들은 깨진 하늘 사이로 쏟아져 내린 마기가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보살핌을 갈구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이겨 냈다.

『특기 - 찬송가』

그때의 기도는 점차 노랫말이 되었고.

지금은 메리가 전도사로서 일궈 낸 특기로서 발현되었다.

찬송가의 음색이 마치 공명하듯, 신도의 입에서도 울림이 퍼져 나갔다.

“리오 성을 지켜라!”

“우오오!”

연합군의 지친 눈빛에 활기가 차올랐다.

곧 동이 터 오른다더라.

도대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묘한 믿음이 가슴을 두드렸다.

곧, 정말로 이 고된 전투가 끝날 것만 같았다.

“크, 크에에엑-!”

반대로 언데드들은 괴성을 터트렸다.

머리를 쥐어뜯는 놈,

더욱 광분하여 달려드는 놈.

뿌우우-

심지어는 여태 지켜보고만 있던 망자의 군단마저 움직였다.

그들은 유령마를 타고 언덕을 내달리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저 믿을지니]

[이제는 동이 터 오를 차례이리라]

“더, 러운……!”

포이르 백작이 기함을 토했다.

신앙을 품은 노랫말은 망자의 귀를 괴롭혔다.

이 불협화음을 내는 괴물을 기필코 베겠노라.

포이르 백작이 그리 다짐할 때였다.

크워어엉-!

망자의 군단 뒤쪽에서 웬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지금보다 더욱 밝은 빛이 하늘에 떠올랐다.

『한 자루의 검성 ? 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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