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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54화 (54/216)

54화. Episode. 18 망자의 군대 (2)

나는 놈의 포효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평원의 끝자락에서부터 들려온 울음소리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아니군.’

완전히 마기에 오염되었다면 이런 울음소리조차도 못 내겠지.

크워어엉-!

다시 한번 포효가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꺼멓게 죽은 잡초들이 몸을 떨어 댈 정도였다.

이따금씩 덤벼드는 짐승 언데드를 베어 가며 내달린 지 한참.

드디어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르르…….

바렌 왕국의 수호자로 추앙받던 영물이자, 미래에는 레오의 파트너가 되었을 아티팩트.

사자왕(獅子王)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쯧.”

나는 멀찍이 떨어져 놈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집채만큼 커다란 몸과 용맹함이 물씬 느껴지는 갈기는 여전했다.

그러나 하반신은 까맣게 썩어들어가 몹시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하마터면 정말 늦을 뻔했네.”

마기의 진짜 무서움은 바로 역병과도 같은 성질이다.

한 번 오염되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마인(魔人)으로, 마물은 더욱 흉악한 괴물로.

“이리 온.”

사자왕에게 손을 까딱인 순간.

놈이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눈동자를 보니 이미 영물도 뭣도 아닌, 맹수 그 자체였다.

쾅-!

사자왕의 앞발이 평원을 크게 할퀴었다.

난 침을 삼키며 뒤로 몸을 날렸다.

지금은 내가 무어라 해도 알아듣지 못할 터.

-크르…….

“좀 맞고 시작하자.”

나는 드래곤 투스를 뽑아 들곤 놈과 마주했다.

잠시간의 정적.

놈은 사냥감의 빈틈을 찾듯, 몸을 낮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런 장단에 맞춰 주기엔 시간이 아깝다.

온몸에 신성력을 둘러싸고 땅을 박찼다.

꽈앙-!

검과 앞발톱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강렬한 충격이 손잡이를 타고 올라온다.

그러나 사자왕은 그 충격을 해소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큭!”

웬만한 명검보다도 날카로울 발톱이 몇 번이고 공간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발톱을 피하면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진 채로 들이밀어졌다.

어쩐지 용과 싸울 때가 떠올랐다.

‘짐승형 마물은 레퍼토리가 비슷하지.’

발톱과 깨물기.

그다음은.

“크아아앙-!”

역시 피어였다.

근처에서 당하면 일순 정신을 잃을 만큼 위협적인 공격.

“우어어-!”

신앙을 담은 외침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천둥소리 같은 두 소음이 맞부딪혀 평원을 울렸다.

-크르!

승자는 나였다.

마기에 오염되어 가는 놈에게 신앙은 치명적이었다.

사자왕이 몸을 움찔 떨 때, 나는 홀리 오러를 일으키곤 검을 휘둘렀다.

서걱-

두꺼운 가죽을 갈라내는 저항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약이다 생각해라.”

얼굴에 튀긴 피를 쓱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니었다.

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으니까.

홀리 오러는 마기와는 상반된 속성인 신성력으로 엮은 것이다.

신앙의 외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은, 이성을 잃은 사자왕을 깨우기에 특효약이라는 뜻이었다.

콰앙- 콰앙-

그 뒤로 우리는 한참을 더 부딪쳤다.

사자왕의 발톱이 땅을 그을 때마다 기다란 줄이 평원에 그려졌다.

몸놀림은 또 어찌나 재빠른지, 잠깐 방심하면 빈틈을 잡히기 일쑤였다.

‘오길 잘했어.’

놈의 기습을 가까스로 피해 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봐도 탐나는 놈이다.

“……!”

그때였다.

나는 몸을 굳혔다.

조금 전만 해도 눈앞에 있던 놈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

“……그래. 이만큼 했으면 정신 차릴 때도 됐지.”

고개를 꺾어 사자왕을 바라보았다.

놈은 내 뒤에 꼿꼿이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꼴이 마치 자기가 승리했다는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눈빛은 영물 특유의 맑은 기운을 품은 채였다.

“제대로 했으면 내가 이겼어.”

-크릉.

어쩐지 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나 참, 다시 싸우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찜찜한 기분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야기 좀 나눌까.”

사자왕은 말을 못 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네 몸을 치료해 줄 테니까, 나랑 같이 가자.”

사자왕이 줄기차게 흘리던 흉흉한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러곤 슬쩍 제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검게 죽은 털과 녹아내리는 가죽, 그 사이로 흐르는 진물.

“너 그대로 있으면 추악한 괴물이 될 거야. 알고 있지?”

-크르르…….

돌연 놈이 인상을 찌푸리곤 포효를 터트렸다.

분함과 고통이 절절히 느껴지는 울음이었다.

척 봐도 프라이드가 높아 보이는데, 그런 녀석이 이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대상에게 2,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나는 놈의 하반신에 손을 얹었다.

질퍽한 진물의 촉감이 불쾌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사자왕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빠른 속도로 하반신을 좀먹던 어둠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고 있었다.

-크르…….

놈이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눈을 감고는 잠에 빠진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간헐적으로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동의한 걸로 안다.”

나 또한 사자왕의 옆에 앉아 오염된 부위에 신성력을 부어 넣었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사자왕의 하반신을 집어삼킨 어둠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삼 일이 더 지났다.

오염의 치료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하루에 한 번 이천의 신앙과 신성력을 부여하면, 사자왕이 그것을 온몸에 순환시킨다.

영물이라는 격에 달한 사자왕이었기에 그나마 치료가 가능했다.

‘신앙은 전투를 위해 남겨 둬야 하니까…….’

이천이 하루에 쓸 수 있는 맥시멈.

그 덕에 신성력을 죄 끌어 쓰느라 기가 허할 지경이었다.

영물이라더니 기 빨아먹는 요물이랑 다를 바가 없다.

‘젠장.’

나는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리오 성을 향하는 적군의 마기는 가까워졌다가 어느 기점부터 멀어져 갔다.

이미 나르 평원을 지나쳐, 리오 성에 다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군 속도가 정말로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기사들이 나선 것 같은데…….

“야. 아직 멀었냐?”

급한 마음에 괜히 사자왕을 재촉했다.

놈은 평원에 드러누워 마기를 몰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반신 일부가 본래 색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삼 일이 또 하염없이 지나갔다.

사자왕은 드디어 마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크워어엉-!

네 발로 굳건히 일어선 놈이 포효를 터트렸다.

자신의 온전함을 평원에 널리 알리겠다는 태도였다.

-크르릉!

그러곤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사자왕.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사자왕이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사자왕이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사자왕이 신수의 자격 조건을 달성합니다.』

과연 영물은 영물.

자존심이 강한 만큼 한 번 약속한 것은 저버리지 않는다.

『사자왕을 신수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좋아, 네 이름은 이제부터 나르다.”

놈이 그르릉거리는 것과 함께 콧방귀를 뀌었다.

좋아하는 건지 마는 건지.

[나르] [사자왕(獅子王)]

□ 특기 - [축지], [피어], [형태변환], [괴력], [불사], [마력동화], [육감]

□ 비고 - [호적수], [호감], [영특]

“흐음.”

눈여겨 볼 것은 형태변환과 축지, 불사 특기였다.

그때 나르의 몸이 연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푸스스-

무언가 재로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르의 거대한 몸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팔뚝만 한 송곳니 하나.

이것이 사자왕의 본모습이었고, 녀석을 아티팩트라 부르는 이유였다.

“형태변환.”

나는 송곳니를 쥐곤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이번엔 송곳니가 연기에 휩싸이며 거대한 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워어엉-!

“옳지.”

다시 나타난 나르의 모습은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새하얀 갈기, 새하얀 가죽.

금빛이었던 눈동자는 묘한 느낌을 주는 은백색으로 물들었다.

‘이게 마력동화.’

사용자의 마나 특성에 따라 자신도 변화하는 놀라운 힘.

졸지에 백사자가 된 나르가 제 몸을 신기한 듯 살펴보았다.

“그럴 시간 없어. 너도 느껴지지?”

-크르릉…….

적군의 마기가 리오 성 인근과 그 후방에서 요동쳤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바로 출발하자.”

나르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낮췄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라는 듯, 콧방귀도 함께였다.

비고에 호적수라는 게 있던데, 아무래도 나중에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자!”

나는 나르의 등에 올라타곤 전방을 가리켰다.

그 직후, 무지막지한 속도감이 엄습했다.

◈          ◈          ◈

망자들은 지치지 않는다.

강철 같은 기사의 시체를 태운 유령마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밤낮 구분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올 수 있었고, 그들은 곧 리오 성이 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꿀꺽-

성벽 위에 서 있던 연합군의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넘실거리는 마기와 시체 썩은 내가 진하게 풍겨 왔다.

“사령관님! 적군의 수는 대략 사백! 하오나, 적은 포이르……, 포이르 백작가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살펴본 지휘관은 비명을 내질렀다.

백작가이자 1차 요새를 지키던 무가의 일각인 포이르.

그들이 얼마나 강맹한 기사단이었는지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데스나이트 팔십, 좀비 나이트 삼백이십……!”

“데스나이트는 상급 이상의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듯합니다!”

“저들은 선두요……! 아직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마기가 수없이 많소!”

지휘관들의 악다구니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질수록, 연합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런 그들에게 레오가 외쳤다.

꽉 말아 쥔 주먹에선 리하르트의 힘이 담긴 반지가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여과 없이 일으킨 기세가 연합군의 정신을 일깨웠다.

“연합의 깃발을 바라보아라! 너희들의 숭고한 사명을 떠올려라!”

“또다시 겁을 집어먹을 텐가! 아니면 용맹하게 싸울 텐가!”

무가의 수장들도 목에 핏대를 세웠다.

리하르트로부터 받은 지시는 단 하나.

연합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라.

‘더는 도련님께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그들에게 리하르트는 그저 권력을 가진 애송이가 아닌, 바텐베르크의 마땅한 전권 대리인이었다.

어쩌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건, 리하르트가 가진 신비하고 놀라운 힘일지도 몰랐다.

가주들은 그런 그를 기다리며 목청을 높였다.

“리하르트 도련님……!”

아론이 깃발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두드렸다.

제3기사단도 마찬가지였고, 모리츠는 아예 울상을 지었다.

“휴거! 리, 리하르트 그 자식……, 이미 죽은 거 아니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돌아오겠다며!”

덜덜 떨리는 손이 매달리듯 휴거를 붙잡았다.

그런 모리츠에게 휴거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모리츠의 등을 퍽 때렸다.

“큰아빠야, 큰아빠야. 헛소리 하지 말아라.”

“무, 뭐?”

“아델 소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린 아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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