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Episode. 17 깃발 아래 (2)
가주에게 인장을 받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를 연합의 가주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내 좋을 대로 써야지.
“아무리 그래도 신은 너무 뜬금없지 않습니까.”
“뜬금없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힘이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거야. 연합군은 신을 믿고 기도해야 해.”
“도련님 말 대로하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내가 가진 힘이 세지는 거지. 신의 계시를 받은 건 나니까.”
사실 메리의 경우를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전도사가 된 그녀도 ‘후광’은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도련님, 연합은 기사가 모이고 모인 집단입니다. 기도 같은 걸 할 리가 없지요. 제3의 무언가에 의지하는 행위니까요. 저들의 긍지에 어긋납니다.”
그게 지금까지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기사가 기사로서의 긍지를 지키는 것…… 그럼, 지금 연합군은 기사다운가?”
“예?”
“마기에 겁먹고, 언데드 앞에서 몸을 떠는 게 기사다운 행동이냐고.”
“…….”
레오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기도가 나약한 행위란 생각 자체가 틀렸어.”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신, 호르의 신도가 되어라. 그리고 우리 선지자들을 도와줘.”
과연 그는 뭐라 대답할까.
이 순간을 위해 많은 말들을 생각했지만,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아무리 거창한 말을 한들, 핵심은 연합군에게 이득이 될 것이란 것.
연합의 사령관, 레오를 설득하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재밌군요. 도련님도 무언가 이유가 있으니 이런 행동을 하시는 거겠죠.”
그 눈에 일렁거리는 것은 강렬한 호기심.
신의 존재 여부에 흥미가 생긴 걸까.
아니면 내 행동 자체가 궁금증을 유발한 걸까.
뭐가 됐든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도련님의 말씀대로, 저는 전권 대리인의 명을 따를 뿐이죠.”
“빠져나갈 구석은 기가 막히게 찾네.”
“나중에 가주님께 크게 혼쭐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 ◈ ◈
제3기사단이 리오 성에 도착한 지 3일째.
아론은 성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높게 쌓아 올린 성벽은 이곳저곳 금이 가 있었으며, 땅에선 마기가 악취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바렌 왕국의 2차 요새라 불리던 나날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싸워 온 건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역시나 마기.
아론은 하늘에 균열이 열렸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구멍 사이로 쏟아져 내렸던 마기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 이상 사태 당시보단 덜하지만, 이곳은 연합군에게 너무나 불리한 악조건이었다.
‘연합의 분위기가 최악일 수밖에 없지.’
그는 주변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왔고, 표정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리하르트를 볼 때면 표정이 풀어졌지만,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기 바빴다.
그런데 그 어둡기 그지없는 연합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기사님! 사랑과 평화의 주먹밥 드시고 힘내세요!”
“아이고, 어디 다친 데 있으면 저한테 오슈. 사랑과 평화를 담아 붕대 감아 드릴게!”
리하르트가 데려온 스노우폴의 주민들이 리오 성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평범한 민간인들이 여간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사랑과 평화…….’
철인 같던 기사들도 이 땅에선 제힘을 쓰지 못하는데, 주민들은 마기에 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 항상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아니, 애초에 마기의 영향을 덜 받는 것처럼 보였다.
“아론님! 여기 사랑과 평화의 주먹밥! 맛있게 드세요!”
가만히 서 있는 아론에게 여인 하나가 다가와 주먹밥을 내밀었다.
진한 갈색 머리에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
메리였다.
“가, 감사합니다.”
아론은 얼결에 받아 들고는,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진 메리를 바라보았다.
사랑과 평화라.
우적-
그가 주먹밥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왜 주먹밥에서 리하르트 도련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하.”
도련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민간인들을 데려왔나 했더니만.
‘그때 말씀하신…… 전도인가.’
한동안 잠잠하길래 포기한 줄 알았거늘.
입으론 허탈한 듯 한숨이 나왔지만, 한편으론 유쾌하다는 감정도 들었다.
어째선지 예전처럼 그들의 행동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빛.
그저 그것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럴 때면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설마 나도 옮은 건가 싶을 때였다.
“사랑과 평화? 하! 속 좋은 소리만 하는군!”
잔뜩 심통 난 음성이 아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젊은 기사 하나가 중년의 민간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에구! 왜 이리 화가 나셨어유!”
중년은 흙바닥을 나뒹구는 주먹밥을 손으로 긁어 담았다.
“이봐. 이런 곳에 왜 민간인이 있는 거야! 누가 데려왔어?”
“저, 저희는 리하르트 도련님과 왔지유.”
“뭐?”
인상을 와락 찌푸렸던 기사가 몸을 움찔했다.
“리하르트 도련님께서 민간인을 왜……?”
“저기, 일단 저것 좀 보셔유.”
중년은 푸근하게 웃으며 성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기사의 눈에 깃발이 보였다.
리하르트가 전투 중 삼만의 신앙을 부여했던 연합군의 깃.
“아…….”
“어때유. 마음이 확 풀어지쥬?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저걸 보고 풀어유.”
“…….”
기사는 말없이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중년이 새 주먹밥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얼굴 핼쑥한 것 봐. 밥도 잘 안 챙겨 먹은 거 같은데, 이것 좀 잡숴 봐유. 사랑과 평화를 담았으니께.”
밝은 미소도 함께였다.
기사의 눈에는 오직 그 민간인과 깃발만이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봅니다.”
“아유, 괜찮아유! 이런 곳에 있으면 성격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쥬. 그러니 사랑과 평화를 항상 마음에 품어야 해유.”
“사랑과 평화가 대체 뭐길래 다들 그리 말하는 겁니까?”
“신의 축복이고, 신의 은혜유.”
“그렇습니까…… 그, 제가 떨어트린 주먹밥을 주십시오. 그게 먹고 싶습니다.”
그 대화를 엿듣던 아론은 고개를 돌렸다.
이 같은 광경이 리오 성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러다가 뒤처질지도 모르겠는데.”
왠지 모를 유치한 경각심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 ◈ ◈
나는 원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지루하고 지루한 회의의 연속이 고달팠다.
“성벽을 보수해야 합니다!”
“그럴 자재도, 시간도 없는 게 문제 아닙니까!”
지휘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이렇게 진전이 없는 건지.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오르드 가주가 의견을 꺼냈다.
“폴린 성을 먼저 치는 게 어떻소? 이리 수성만 하는 건 연합의 일방적인 소모를 야기할 뿐이오.”
그의 의견은 정론이었다.
그러나.
“기각합니다.”
나는 단칼에 잘라 냈다.
“전에도 말했듯, 리치들은 커다란 의식을 진행 중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리치라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전력 대부분이 폴린 성에 상주하고 있을 겁니다. 까딱 잘못하면 리오 성마저 지키지 못할 수 습니다.”
담금질에 버금가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 놈들.
뻔히 드러난 약점을 가만히 내버려 둘 족속이 아니었다.
리치의 근본은 마법사이니 더더욱.
차라리 그들이 의식을 마쳤을 때, 그 순간에 드러날 틈을 노리는 게 훨씬 더 승산이 높았다.
“으음…….”
수뇌부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맴돌았다.
나는 아발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가장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니었다.
“아발트. 헬가의 기사들에겐 뭐라 했지?”
“폴랜드 헬가가 중요한 임무를 하달받고 자리를 비웠다고 전달했습니다.”
“그런가.”
사실상 헬가 가문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폴랜드의 하나뿐인 자식은 오래전에 죽었고, 더 이상 마땅한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확 내 개인 사병으로 끌어들일까.
“리하르트 도련님.”
잠시 딴 데 가 있던 내 정신을 깨운 건 자칼 가주였다.
“말씀하시죠.”
“현시점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엉망입니다.”
내 단답이 당혹스러웠던 걸까.
자칼 가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초에 성을 내버려 두고 난전을 펼쳐야 하는 것부터 넌센스입니다. 상대는 언데드입니다.”
놈들은 몸에 칼이 박혀도 죽지 않는데, 아군은 어디 한 군데라도 물리면 언데드가 되어버린다.
그런 적을 상대로 난전이라니.
“하지만 언데드에겐 수성의 이점이 전혀 통하질 않습니다.”
그건 해결할 수 있었다.
화살에 신앙을 담으면 되고, 성벽에 붙은 놈들에겐 성수를 들이부으면 된다.
무력화는 시키지 못할지언정, 수성의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다.
문제는 내가 그만큼의 신앙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거지.
“일단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최우선 과제는 연합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특히 헬가는 구심점을 잃었으니 아발트가 잘 이끌어야 할 테고.”
“맡겨 주십시오.”
깍듯이 고개를 숙인 수뇌부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제 회의실에 남은 건 레오와 나뿐.
나는 인상을 팍 쓰며 입을 열었다.
“레오 경, 기도하겠다면서 왜 안 해? 거짓말이었나?”
“했습니다! 도련님이야말로 거짓말하신 건 아닙니까? 매일 자기 전에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변화가 없다라…….
삼 일 전, 그에게 신께 기도하면 무언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고작 해 봐야 몸에 활력이 감도는 정도일 테지만.
아무튼 제대로 기도를 했다면 내가 알아챘겠지.
“간절함을 담았어야지.”
“간절할 게 없는데 어떻게 담습니까.”
“바텐베르크의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봐. 아니면 네 궁금증을 해결해 달라고 싹싹 빌던가.”
구색만 갖춘 기도로는 어림도 없다.
“이건 연합을 넘어 모두의 미래를 위한 일이야.”
“하아, 알겠습니다.”
레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영 껄끄럽겠지.
오직 무(武)가 최고라 여기는 기사에게 갑자기 신을 믿으라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이 전쟁은 길게 이어질 것이다.
기회는 많고, 상황도 딱 알맞게 만들어졌다.
그때였다.
“음?”
신앙을 획득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런데 무언가 낯설었다.
‘확인.’
평소엔 다음 날 아침에 한 번에 확인했었지만, 지금은 바로 살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곧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아론 마이어의 기도로부터 20의 신앙을 획득합니다.』
『기도를 올린 자에게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어…… 어어?”
이놈이 왜 갑자기 기도를 해?
나는 그 기도의 내용을 듣고자, 손가락을 들어 시스템 창을 건드렸다.
『아론 마이어의 기도를 듣습니다.』
- 우선 저는 당신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오해 마시길. 그래도 기사 중에선 첫 번째로 신도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신도로 만들어 주십시오. 호, 호르……?
“풉!”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