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Episode. 16 산송장과 산송장 (3)
나는 제3기사단에게 마차를 이끌고 올 것과 전장의 뒷처리를 도울 것을 명령했다.
신도를 한가득 태운 두 대의 마차는 리오 성 근처의 숲속 한편에 대기시킨 상태였다.
혹시 몰라 아델도 함께 두었으니 별일 없겠지.
“갑시다.”
“예. 따라오시지요.”
레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잠깐! 나도 간다.”
모리츠가 내 뒤를 쫓아왔다.
“그냥 기사들이나 도와주지? 네가 따라가서 뭐 할 건데.”
“흥, 나도 바텐베르크야. 자격은 충분해.”
모리츠는 바텐가에서도 그렇고, 정말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기세였다.
그냥 신경 꺼야지.
◈ ◈ ◈
그렇게 도착한 리오 성 내부.
바텐베르크를 제외한 각 무가의 지휘관 대표 다섯과 강대한 기세를 품은 중년의 사내 다섯.
그리고 나와 레오, 모리츠가 원탁에 빙 둘러앉았다.
“…….”
적막이 원탁 위에 맴돌았다.
왜 다들 말이 없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수뇌부들은 내게 발언의 우선권을 주겠다는 듯,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입니다. 가주의 명을 받아 제3기사단과 함께 연합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리츠도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모, 모리츠 바텐베르크입니다!”
이 자리가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오는지, 얼굴이 빨개진 모리츠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대 바텐베르크의 자제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귀하신 분들께서 직접 나서실 줄이야! 정말 이 이상 든든할 수가 없군요. 바텐베르크의 혜안과 자비에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지휘관들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댔다.
뻔하디뻔한 아첨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그들도 저마다 소속을 밝혔다.
창술과 궁술에 일가견이 있는 린느 가와 오르드 가문.
대검을 다루는 자칼 가문.
쌍검술에 특화된 사이언 가문.
마지막으로 거대한 전투 도끼를 가볍게 휘둘러 대는 헬가 가문.
나는 눈을 감았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 내며 말했다.
“인사는 이쯤 하죠.”
미팅 나온 것도 아니고, 왜들 이리 인사말이 긴 건지.
더군다나 지금 사안은 굉장히 심각했다.
난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다섯 무가가 힘을 합쳤는데도 밀리는 이유가 뭡니까?”
이변이 일어났으리라곤 짐작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원래 알던대로라면, 무가 연합은 세 가문이었다.
헬가와 자칼, 오르드 가문의 기사들이 협력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남부와의 전쟁이 심화되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벌써 다른 두 가문이 연합에 추가됐고, 심지어는 그 가주들까지 나섰음에도 언데드에게 밀리는 꼴이라니.
‘아무리 연합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마기가 훨씬 짙어졌다 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아.’
나는 수뇌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답을 재촉하려는 찰나, 레오가 말했다.
“……처음 연합은 바렌 왕국의 세 개 가문의 기사단과 저희, 제1기사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해 보였지요. 그러나 도련님도 아시겠지만, 어느 날 이상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균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가 연합 또한 공포와 혼란을 피하지 못했겠지.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
“그날, 리오 성은 함락 직전까지 밀렸고, 큰 희생을 치른 끝에서야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모든 것은 제가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탓입니다.”
“지금 저는 잘잘못을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권한도 없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그를 만류했다.
그날의 이변을 대체 누굴 탓하겠는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몸은 빳빳하게 굳지, 정신은 멀어 버릴 것 같지.
그런 상황에 언데드와 마기가 미쳐 날뛰니 정말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레오 경,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 이후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가주들과 린느, 사이언 가문이 연합에 합류했지만, 이미 연합군은 기세가 땅으로 떨어져 제대로 된 대응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레오가 말을 멈추곤 수뇌부를 슬쩍 바라보았다.
미간이 찌푸려진 것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을 때였다.
누군가가 쾅- 하고 원탁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매번 자칼 가문의 기사들이 몸을 사리니까 우리 가문이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
헬가 가문의 가주였다.
그가 산적 같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로 자칼 가주를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그건 흘려들을 수 없군. 그쪽의 기사들이 무식하게 달려들다 피해를 입었을 뿐인 것을!”
“헬가의 기사는 용맹하다. 자칼 가문의 겁쟁이들처럼 마기에 겁먹고 내빼진 않지!”
싸아아-
난데없는 두 가주의 기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헬가 가주가 돌연 화살을 돌렸다.
이번엔 오르드 가주에게로.
“활잡이 가문도 순 겁쟁이들뿐이지. 그대들에겐 이 사태가 남 일 같나 보군?”
“헬가 가주. 그대 가문의 피해가 큰 것은 인정하나, 부디 지나친 언행은 삼가 주시오!”
“흥, 연합에 필요한 건 용맹한 기사다. 고작 머릿수나 채우러 온 거면 부디 빠졌으면 좋겠군. 그대들의 병력은 사기만 더욱 떨어트릴 뿐이니까.”
정말 난장판이 따로 없다.
이 모든 걸 직접 본 내 감상은 그랬다.
‘알 것 같네.’
레오가 하려던 말.
이 빌어먹을 꼰대들이 연합군을 죄 망쳐 놓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
현재 연합에 합류한 가문들은 리오 성과 바렌 왕도 사이에 영지를 두었다.
엉덩이 무거운 가주들이 왜 연합에 들어왔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리오 성이 함락되면 제 영지도 시체 밭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힘을 합치진 못할망정, 서로 이빨이나 들이미는 광경이 몹시 꼴사나웠다.
그때 레오가 나섰다.
“다들 입 다무십시오.”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커다란 분노가 담겼다.
예의 그 능글능글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뭣……!”
가주들은 고압적인 레오의 태도에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헬가는 더욱더.
‘어쭈.’
이건 정말 갈수록 가관인데.
“바텐베르크의 자제가 두 분이나 이 자리에 계십니다. 때와 장소에 걸맞은 품위를 보이십시오.”
“레오 사령관! 그대도 모시는 자가 있는 기사라면 타 가문의 수장에게도 예를 갖춰야 함이 마땅하오!”
“……헬가 가주. 저는 지금 사령관으로서 말하는 중입니다.”
쿠구구-
두 거인의 기싸움에 리오 성 전체가 흔들렸다.
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휘관들은 이 난장판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원탁만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모리츠는 고래 싸움에 터진 새우처럼 바짝 쫄아 있었다.
무가 연합의 알맹이가 이렇게 오합지졸이었다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엔 그냥 황당하다는 정도였는데, 보자 보자 하니 기가 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열이 솟구쳤다.
연합의 기사들은 언데드가 된 동료에게 칼침을 박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싸우다 죽으면 역겨운 괴물이 되어 또다시 고통받아야 했다.
“……그만.”
그럼에도 가주들은 서로를 헐뜯고 떠밀었다.
심지어 연합의 사령관에게 반기까지 내보이는 자도 있었다.
지금 당장 저들의 집이 통째로 없어질 판인데.
뭐가 어찌 되었든 기사로서, 무인으로서의 사명을 잊어선 안 됐는데.
“그만!”
내가 크게 소리치고 나서야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던가.
지금 이 상황은 그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연합의 암 덩어리가 여기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추태를 용서해 주십시오.”
“레오 경. 당신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나는 턱짓으로 헬가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분란 종자를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레오가 고개를 숙였다.
바텐가에서 한창 나와 아론을 굴릴 때와는 다른 태도였다.
그때, 헬가가 끼어들었다.
“지금 분란 종자라 하셨습니까?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저희 가주들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진작 무너졌을 겁니다.”
이제 그는 아예 막 나갔다.
바텐베르크의 자제인 내게 불경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고, 바텐베르크의 최고 기사인 레오가 이끄는 연합을 깎아내렸다.
더는 내가 참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참아선 안 되었다.
“헬가 가주. 조금 전 연합의 사령관이 입을 다물라 명했소. 그리고 나 또한 그만하라고 하였지.”
“아무리 사령관이라 하더라도 한 가문의 수장을 막 대해선 안 되며, 아무리 바텐베르크의 도련님이라 하더라도 저를 하수인 취급하실 순 없습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장에 기사가 아니라 정치꾼이 기어 들어왔으니 이 모양 이 꼴이 나지.”
나는 끅끅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웃겨.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헬가 가주의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져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민 준비는 잘 되어 가나?”
“……!”
내 말에 놈이 눈을 부릅떴다.
회의실의 다른 이들은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폴랜드 헬가.
리치와 연합의 전쟁 이후, 제 가문과 사명을 버리고 마법가에 붙어먹은 버러지.
“이민 갈 거면 조용히 가야지, 왜 여태 살던 곳에서 깽판을 부리고 가려 해? 그렇게 하면 꽤 대접해 준다나 봐?”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이미 내가 알던 미래는 몇 차례나 변했고, 그 미래가 좋은 쪽으로 틀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 나타난 폴랜드 헬가도 더욱 악질이 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 가문만 팔아먹고 도망쳤을 놈이 북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쓰레기로 말이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놈의 언행과 뒤를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은 이상은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의 등에 매여진 거대한 도끼, 그게 바로 배신의 증거였다.
“마침 바렌 왕국까지 온 김에 너도 처리하려고 했었어. 그래서 가주한테 이것까지 받아 왔지.”
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을 품은 태양’ 장식이 정교하게 조각된 인장.
바텐베르크 가주의 전권 대리인을 뜻하는 징표였다.
“헉!”
“……!”
인장을 알아본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바텐베르크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가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정말 수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레오.”
“충! 하명하십시오!”
“저놈, 적당히 제압해서 내 앞으로 끌고 와.”
사람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썰어 버리는 것쯤이야, 기본 중의 기본이지.
하물며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고 멍청히 서 있는 놈은 더욱더.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세상 충직하게 외친 레오의 신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