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Episode. 16 산송장과 산송장(2)
“먼저 간다.”
나는 별을 그러쥔 채로 앞서 나아갔다.
“끄어어억!”
시체 뭉치가 내게 마주 달려들었다.
별이 뿜어내는 신앙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포악한 기세와 함께 날아드는 놈의 주먹.
그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쿵, 하고 시체 뭉치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검게 죽은피가 땅을 물들인다.
나는 쉴 새 없이 놈의 거체를 갈라냈다.
썩은 시체를 엮어 올려 만든 놈의 몸은 둔하고 부피만 클 뿐이라, 지금의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끄르르륵!”
별이 놈을 가를 때마다, 썩은 살덩이에서 매캐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체 뭉치 특유의 재생력이 신앙에 의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괴로울 테지.
죽어서도 고통받는 놈이 한없이 측은했다. 저 구더기 끓는 거체에는 연합군의 기사로 보이는 시체도 엉켜 있었으니까.
안식을 되찾아 주겠다.
“끄어, 끄어어억!”
나는 기세를 올려 공격을 가했다.
놈의 한쪽 다리를 베어 무릎을 꿇렸고, 양팔의 관절을 끊어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내게 아가리를 들이밀며 아귀처럼 이빨을 부딪쳐 왔다.
가여우면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존재.
“편히 쉬어라.”
별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 중간에 놈의 목이 걸렸다.
상급 언데드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도련님!”
목 달아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론이 내게 다가왔다.
두 눈에는 전장의 열기가 가득 담긴 채였다.
“저희도 날뛰고 오겠습니다!”
그러곤 쌩하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기사들도 저마다 언데드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는 걸 보고 흥분한 모양이다.
“왜 지들이 신났어?”
정작 사기를 북돋아 주려 했던 연합군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이러려고 무리해서 신앙을 운용한 게 아닌데.
역시 상급 언데드 하나 처치한 거로는, 전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없는 건가.
“쯧.”
나는 리오 성의 성벽으로 나아갔다.
◈ ◈ ◈
“취이익!”
휴거가 거세게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 흉폭한 기세를 온몸으로 받아 낸 언데드는 머리부터 두 쪽이 나 갈라졌다.
“이건 뭐, 쪼개는 맛이 최악이로군! 췩!”
솔직히 말해서 짙은 실망감이 들었다.
휴거가 원했던 것은 투지와 투지가 맞부딪쳐, 누가 더 용맹하고 강대한지 자웅을 겨루는, 진정한 전사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죽은 자에게 투지가 있을 리 만무했고, 반대로 죽은 자를 향해 투지가 불타오를 일 또한 없었으니까.
“으음?”
그런 그가 돌연 전장의 한쪽을 바라보았다.
제3기사단이 분투하고 있는 와중, 저 혼자만 동떨어져 서 있는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동지?”
리하르트를 부득불 따라온 모리츠였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선, 부여잡은 검 끝이 덜덜 떨리는 게 꼭 갓 태어난 오크처럼 가녀려 보였다.
“동지! 왜 그러고 있소?”
휴거는 냉큼 달려가 물었다.
“설마 두려운 거요?”
“시, 시끄러워! 두렵긴 뭐가!”
울컥하고 외치는 모리츠는 사실 두려웠다.
리하르트의 활약에 영향을 받아 기세 좋게 달려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애초에 실전 경험이 적은 그였다.
시꺼먼 마기가 심장을 꽉 옥죄어 오는 것도 모자라 눈앞의 적은 끔찍한 언데드다.
모리츠에겐 질 나쁜 농담이었다.
“흐음!”
그를 멀겋게 쳐다보던 휴거는 도끼를 내리쳤다.
동시에 모리츠를 노리던 언데드가 반으로 갈라졌다.
“히, 히익!”
“뭐요, 두려운 거 맞구먼! 취익!”
창백하게 질린 모리츠를 보며 휴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흐, 동지는 겁쟁이구려. 이럴 거면 왜 따라왔소?”
“……겁쟁이 아니야!”
정곡이라도 찔린 듯, 치기 어린 외침이 모리츠에게서 터져 나왔다.
억지로 부릅뜬 눈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 보였다.
두려움은 극복하는 거지, 외면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을.
용맹한 오크, 휴거는 이 미숙한 오크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내려 주고 싶었다.
“동지, 그렇게 두려울 때는 말이오.”
척- 그의 두툼한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모리츠는 얼결에 휴거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대단한 인간 전사를 보면 마음이 편해질 거요. 췩!”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리하르트가 있었다.
언제 성벽 위로 올라간 건지.
위풍당당하게 서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리하르트의 손엔 웬 깃발이 들려 있었다.
바텐베르크와 바렌 왕국 소속 다섯 무가의 문장이 그려진 연합군의 깃이었다.
“리하르트……?”
저기서 무얼 하는 걸까.
모리츠가 멍하니 중얼거릴 때, 리하르트가 쥔 깃발에서 빛이 폭발했다.
“크흐흐! 진짜 멋있지 않소? 뭐 저리 빛난단 말이오, 횃불처럼!”
모리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고 싶지만, 휴거의 말대로 리하르트는 멋있었다.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빛.
왜 저것만 보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까.
왜 저놈만 저런 빛을 뿌릴 수 있을까.
“큭!”
모리츠는 이런 곳까지 리하르트를 따라온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의 한심한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존심마저 굽히지 않았던가.
“젠장, 젠장! 이렇게 한심하게 있을 순 없지!”
그가 눈을 치켜뜨고 검을 들어 올렸다.
언데드를 향해 달려드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는 비단 모리츠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아!”
“리오 성을 지켜야 해!”
리하르트를 본 연합군의 기세가 달라졌다.
저 빛나는 깃발엔 저마다 충성을 맹세한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공포에 묻혔던 사명감이 제자리를 찾아왔고, 기사로서의 의무가 떠올랐다.
창칼을 휘두르는 손에는 힘이 실렸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싸우냐! 당장 몰아붙여!”
“우오오!”
여태까지 마기에 떨었던 게 꿈인 걸까, 아니면 마기가 두렵지 않은 지금이 꿈을 꾸는 중인 걸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더는 두렵지 않다는 것만이 기사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전장의 흐름이 일시에 뒤바뀐 순간이었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성벽 위에서 살펴본 지휘관, 아발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이 모든 게 자신의 옆에 있는 청년이 벌인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알 수 없는 빛을 품은 남자.
그가 답했다.
“성자.”
“성자……?”
멍청히 되묻는 아발트에게 리하르트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때 레오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연합군! 적을 섬멸하라!”
“와아아!”
연합군이 언데드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죽어 좀비가 되어 버린 동료에게 안식을 찾아 주었고, 리오 성을 지키기 위해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래. 이게 기사지.”
조금 전만 해도 산송장처럼 죽어 있던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리하르트는 그 변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 ◈ ◈
사기는 한 번 하향세를 타면 다시 올라가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한 번 드높아진 사기는 또 여간해선 그 기세가 낮춰지는 법이 없다.
오늘의 연합군이 그러했다.
“…….”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합군은 공포와 절망에서 벗어나, 파죽지세로 언데드 군단을 몰아쳤고, 끝내 이번에도 리오 성을 수비해 낼 수 있었다.
“와아아!”
기사들이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포효했다. 그러곤 하나같이 나를 쳐다보았다.
감사, 경의, 호의 등 온갖 게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쉬고 있을 시간 없다! 시체를 한곳에 모아라!”
“빨리빨리 움직여!”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언데드의 시체는 땅을 오염시키고, 부정한 기운을 잔뜩 뿜어내니 서둘러 처리해야 했다.
화르륵-!
곧 머리 따로 몸 따로 노는 시체 수천이 한데 뭉쳐 타올랐다.
그 안에 동료를 두고 온 자들이 얼굴을 빳빳이 굳혔다.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그 참혹한 광경을 한 발자국 물러나 지켜보고 있을 때, 제3기사단이 우르르 다가왔다.
“그래. 너희는?”
“전원 무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제3기사단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이번 전투로 기가 죽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모리츠가 눈에 들어왔다.
“모리츠.”
“어, 어? 왜?”
그냥 불렀을 뿐인데 한껏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다.
이런 건 바텐베르크의 둘째, 지크한테나 보이던 반응인데.
“네가 언데드가 되면 나한테 오라고. 친히 성불시켜 줄 테니까.”
“……이 자식이!”
모리츠가 열심히 싸운 건 알고 있는데, 또 예상외로 성실한 모습을 보이니 왠지 모르게 놀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내가 일행들과 투닥거릴 때였다.
“리하르트 도련님!”
레오가 다가왔다.
뒤에는 연합의 수뇌부로 보이는 자들을 잔뜩 이끌고서.
“리하르트 도련님이 맞으십니까?”
입으로는 그리 물으면서 눈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출세하셨습니다, 레오 경. 연합의 사령관까지 되시고.”
“정말 도련님이셨군요…… 하, 그 빛이 아니었다면 못 알아보았을 겁니다.”
훌쩍 커 버린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 듯, 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연합의 수뇌부들도 눈을 크게 치켜떴다.
“도련님.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들을 소집하겠습니다.”
레오가 돌연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었다.
“소집? 한창 뒤처리 중인 이들을 왜 부릅니까?”
“바텐베르크의 혈통이 두 분이나 오셨으니, 합당한 예를 취하는 게 맞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이번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영웅 아닙니까.”
“그런 건 됐습니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나는 슬쩍 연합군을 보았다.
그들은 분명 승리했음에도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였다.
굳이 그런 자들에게 인사를 받아 어디에 쓸까.
‘연합군의 병력이라면 큰 피해 없이 막는 게 정상일 텐데.’
이래서 흐름이란 게 중요하다.
싸우기 전에 겁부터 집어먹으니 될 것도 안 되는 거지.
“레오 경, 아니 사령관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편히 부르십시오.”
레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얼굴엔 온갖 궁금증이 한가득 인 걸 참아 내느라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하긴, 그는 호기심이 무척이나 많은 성격이었지.
“그럼 레오 경. 지금 당장 회의를 열 수 있겠습니까?”
“회의를 말입니까?”
“예.”
고된 전투가 막 끝난 참이라 피곤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오가 내게 궁금한 게 많은 것처럼, 나도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피해 상황은 어떻게 되는지, 또 대책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셨으니, 제 비밀도 알려 드려야겠지요.”
레오의 손가락엔 내가 주었던 반지가 끼워진 채였다.
드디어 수확의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