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Episode. 14 등불 (3)
쿵.
광룡이 뇌수를 뿜으며 쓰러졌다.
『강대한 적, 드래곤을 살해했습니다.』
『업적 달성 2/3』
나는 눈앞을 가리는 시스템 창을 치웠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 호…… 르……?
균열에 눈깔을 들이밀던 거대한 존재가 놀람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저놈은 나를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저 끔찍한 존재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마왕.”
부정(不正)한 자들의 왕이요, 병든 숨결을 내뱉는 역병 군주이자, 더러운 기생충을 품은 괴물.
현기증이 일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눈앞이 흐려졌다.
그것이 놈의 시선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용과의 싸움에서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꽉 그러쥐었다.
“뭘 꼬나 봐.”
허리를 꼿꼿이 펴고, 덤덤한 표정으로 놈과 마주했다.
고작 눈깔 하나 본 것으로 마음이 꺾여선 안 됐다.
콰드득-
그사이 균열이 서서히 닫혀 갔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이 어째서 불완전한 균열을 열어 가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한 것이다.
‘신이 사라진 세계다, 이거지?’
놈에게 이곳은 호화스러운 만찬장이었고, 주인 없는 보물단지였다.
어서 손에 넣고 싶은 갈급함을 못 이겨 침이라도 발라 놓을 생각이었겠지.
인간들이 저항할 의지조차 품지 못하도록, 놈은 이 세계에 진득한 공포를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근데 너, 실수한 거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급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 겁을 집어먹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어떨까.
지금 대륙은 얼마나 큰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까.
사람은 힘들 때 비로소 신을 찾는다.
역설적이게도 놈의 등장으로 호르교의 세를 펼칠 무대가 준비되었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그만 꺼져.”
- 우, 으……!
콰득-!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균열이 닫혔다.
하나 구멍이 메꿔진 하늘은 아직도 시커먼 마기가 잔류하고 있었다.
털썩, 돌연 뒤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땅바닥이 보였다.
아, 쓰러진 거구나.
긴장이 풀린 걸까.
그대로 눈이 감겼다.
◈ ◈ ◈
제3기사단은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심연을 마주했던 공포는 가시질 않았으나, 애써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해 가며 움직였다.
그 원동력은 리하르트의 검에 있었다.
“빛…….”
새까만 색의 드래곤 투스에 희미한 빛무리가 남아 있었다.
신앙으로 타올랐던 별의 잔해였다.
하지만 기사들에겐 그것은 등불이었다. 작디작은 불씨가 어둠을 몰아낸 것이다.
“휴거! 당신 괜찮소?”
“취익…… 용, 용은 죽었소?”
“도련님께서 처리하셨소.”
“그렇소……? 낄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오.”
“헛소리 말고 쉬시게나. 포션을 줄 테니.”
부상자들이 하나둘 수레에 실려 나갔다.
놀랍게도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델이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아빠.”
그녀가 멈춘 곳은 리하르트의 앞이었다.
조막만 한 손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죽은 사람은 없어. 아빠가 말한 노인도 목숨은 무사해. 바로 일어나진 못하겠지만.”
왜냐면 내가 열매 조각을 남겼거든-
뒷말을 삼킨 그녀가 손에 쥔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다.
‘정수’와 ‘생명’이 조합된 그것은 일 년에 단 한 번 맺을 수 있는 보물이었다.
“아빠한테도 이게 필요할 거야.”
아델은 고운 나뭇잎으로 부스러기를 감쌌다. 그러고는 리하르트의 품속에 넣었다.
“나 잠 좀 잘게. 두고 가면 안 돼!”
풀썩-
쓰러진 그녀의 몸이 반투명하게 물들었다.
◈ ◈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전투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들 정수리를 보여 주는 거야?”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허리까지 접어 사과하는 걸까.
기사들 중에는 아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불안한 마음이 싹을 틔웠다.
혹시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닌지.
“기사가 되어 모시는 자를 지키진 못할망정, 겁에 질려 도련님 홀로 위험에 맞서게 하는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저희를 벌하여 주십시오!”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난 또 뭐라고.
“됐어. 그건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거였지.”
“하, 하오나!”
나는 기사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아직 혼란과 공포는 남았지만, 그때처럼 희망까지 저버리진 않은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회복이 되었나 보군.’
그 경지가 하급이든 상급이든, 모두 바텐베르크의 기사다. 하나같이 심지가 범상치 않은 이들이란 뜻이었다.
“……하나 묻지.”
“하명하십시오!”
문득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의 말투는 집어치우고,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내가 왕족인가?”
“왕족보다 더 고귀하고 영광스런 바텐베르크의 혈통이십니다.”
“그 고귀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이 어디에서 기인해 온 것이지?”
그러자 기사 하나가 대뜸 답했다.
“바텐베르크의 업적과 무(武)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화초 취급하는 거냐. 바텐베르크가 너희에게 있어 지켜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따라야 할 대상인가?”
간만에 후광을 밝혔다.
갑작스러운 빛에 기사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난 내친김에 검까지 뽑아 치켜세웠다.
“내 앞에 서려 하지 마라. 너희는 나의 뒤를 따라라. 어둠이 몰아치거든 내가 등불이 되어 줄 터이니.”
말을 마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저 혼자 분위기에 심취해 낯부끄러운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어 버렸다.
그런데 기사들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등불!”
“우리의 등불!”
사내들이 굉장히 감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럽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 빛을 똑똑히 보아라! 추악하고 역겨운 기운을 몰아낼 등불이다!”
“오오오!”
기사들이 열렬히 환호해 주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깊어졌으며, 경외가 일렁였다.
‘이만하면 쇼는 성공이지.’
저들에게 있어 나는 지켜 줘야 할 철부지 도련님이 아니라, 믿고 따를 수 있는 주군이어야 한다.
지금은 딱 그 정도가 적당했다.
나는 좌중을 훑어보다가 무리를 해산시켰다.
우르르 몰려 왔다가 우르르 흩어지는 기사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아론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 휴거까지 얼굴을 비췄다.
“너희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내 생명줄이 꽤 질긴가 보오. 취익.”
그들은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었었다.
아론이야 용의 아가리에 들어갔다 나왔고, 휴거는 복부를 꿰뚫렸으니까.
그들이 무사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발락 경의 검술을 깨우치신 것,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정말 굉장했소! 내 태어나서 그런 것은 처음 봤구려.”
“아.”
그러고 보니 나, 각인을 개방시켰구나.
눈 뜨자마자 정신이 없던 탓에 잊고 있었다.
손등을 내려다보자 십자(十) 형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성흔, 별의 흔적이라 했던가.
『한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쿠구국-!
들어 올린 손 위로 마나가 뻗어 나갔다.
“오오!”
휴거가 야단법석을 떨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제 할 일을 하던 기사들도 별에 시선을 빼았겼다.
“음.”
확실히 크기는 좀 작다.
용과 싸울 때보다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아마 신앙이 아니라 신성력으로 빚었기 때문일 터.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힘이었다.
“어째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려. 그 무시무시한 눈알이 나타난 뒤부터 숨이 턱턱 막혔는데, 지금은 조금 옅어진 느낌이오. 취익!”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눈을 화등잔 만하게 키운 아론과 휴거가 연신 감탄했다.
“대충 이 정돈가.”
서둘러 힘을 갈무리했다.
역시 유지하는 데에 오러보다 더 많은 신성력이 소모되었다.
발락에게 제대로 된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거기에 드래곤 하트까지 섭취한다면 별 무리 없이 검성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아론을 향해 물었다.
“기드는 어디 있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아론의 뒤를 따라 막사에 들어섰다.
그곳엔 노인 하나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야윈 몸.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거지?”
“예.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하셨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다행이다.
애써 덤덤히 답하는 아론의 말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지금도 날이 다르게 육체가 회복되고 계십니다.”
“그렇군.”
기드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뭐가 좋다고 담금질까지 해 가며 무리한 건지.
아직도 그가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보답은 한 거다.’
가치로만 따지면 드래곤 하트보다도 더 대단한 것이 세계수의 열매였다. 그런 보물을 먹었으니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전성기 시절의 육체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델은 어디 있지? 안 보이던데.”
“그것이…….”
아론이 말을 골랐다.
“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걸까. 말끝을 흐리는 아론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론이 향한 곳은 또 다른 막사였다.
“……이런.”
그곳엔 아델이 누워 있었다. 작고 가냘픈 체구가 당장 사라질 것처럼 반투명해진 채로.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이 상태입니다.”
무리를 한 건가. 열매를 맺는 것은 쇠약해진 아델로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기드를 살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정작 자기가 쓰러져 버렸다.
힘이 부족했으면 나한테 신앙을 더 달라고 하던가.
『세계수 - 아델가르텐에게 2,00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아델의 팔목을 잡고 신앙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반투명해진 몸이 살짝 색을 되찾은 것 같았다.
“수고했다. 아델.”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였다.
상태를 보니 당분간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델에게 정말 큰 빚을 졌군요. 혹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아론이 내게 물어 왔다.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꽤 고심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엘프 만나면 살갑게 대해 주기나 해.”
“예?”
“엘프와 세계수의 관계는 특별하니까. 저번처럼 으르렁거리지 말란 소리야.”
언젠간 엘프도 일행에 합류할 거거든.
나는 뒷말을 삼키곤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용의 사체는?”
“우선 심장만 뽑아 놓았습니다. 나머지는 부르트 왕국과 협력해 바텐가로 운송할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자리에서 드래곤을 도축하려면 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용은 어디 하나 버릴 구석이 없는 존재이니까.
“고기 파티는 못하겠네. 기사들이 아쉬워하겠어.”
“어쩔 수 없지요. 광룡을 먹는다는 게 영 찝찝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론의 얼굴도 내심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입맛이 쓰다.
“뭐니 뭐니 해도 집밥이 최고지. 안 그래?”
“그 말씀은……?”
“돌아가자. 바텐가 요리사한테 진수성찬을 준비하라고 일러야겠어.”
용의 고기만큼은 아닐지라도, 바텐가 요리사의 실력은 내가 보장하는 바다.
연회로나마 우울해진 기사단의 마음을 달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