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Episode. 14 등불 (2)
쩌적-
너무나도 불길한 소음이 모두의 귀에 틀어박혔다.
“뭐야, 이건…….”
폭풍같던 전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치던 용도.
미친 듯이 창칼을 들이밀던 기사들도.
심지어 이성을 잃은 기드마저 몸을 바싹 굳혔다.
“으, 으으……!”
멈춰버린 전장에 아델의 신음 섞인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 푸른 하늘에 금이 갔던가.
“왜, 왜 균열이 벌써……!”
리하르트는 ‘저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이 사태는 결코 지금 벌어져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렷다.
- 우우우…….
음울하고 기괴한 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균열 너머로 새빨갛고 커다란 눈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의 시선이 하늘 아래를 훑었다.
흡사 눈으로 맛을 음미하듯, 불쾌하고 끈적한 시선이었다.
이윽고, 지독스러운 기운이 온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아아!”
기사들이 쥐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렸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새어 나온다.
푸르렀던 하늘은 놈이 흩뿌린 마기로 검게 물들었다. 그건 마치 이 세상 전부를 제 영역으로 삼겠노라 선포하는 것 같았다.
“미친!”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니,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전투 중에 얼음 왕관을 떨어트렸던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올린 그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감촉. 얼음으로 이루어진 왕관은 온전히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다.
그때, 폭급함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세상을 훑어보던 눈알이 멈췄다.
“아.”
리하르트와 괴물의 눈이 마주쳤다.
◈ ◈ ◈
- 우으……?
푸른 하늘이 균열을 중심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붉고 거대한 눈은 집요하게 리하르트를 응시했다.
리하르트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고 외쳤다.
“모두 정신 차려!”
그러나 기사들의 시선은 균열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를 자극하는 마기에 정신이 먹혀 버린 것이다.
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드!”
털썩-
기드가 무릎을 꿇었다.
담금질의 시간이 끝나고야 만 것이다.
붉게 달아올랐던 피부는 탈색된 듯 순식간에 잿빛이 되어 버렸다.
거의 다 왔는데.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풀렸을 텐데.
단번에 기드에게 달려간 리하르트가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나 열기를 분출하던 몸이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아델!”
빨리 열매를 먹여야만 한다.
세계수의 열매도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까지는 없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외침에도 아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세계수인 만큼, 균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드를 등에 업은 그가 아델 앞으로 달려왔다.
“아델!”
“아, 아빠…….”
“우선 정신 차려.”
그녀의 양 뺨을 감싼 손에서 신앙이 빛을 발했다.
“부탁해. 기드를 살려 줘.”
다급한 리하르트의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금 바로 열매를 맺을게. 이 사람은 꼭 살릴 테니까…….”
“믿을게.”
아델을 뒤로한 리하르트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고 새빨간 눈은 아직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며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몸을 움직였다.
모두가 몸을 웅크리고 겁을 집어먹은 전장에서, 오직 그만이 움직였다.
‘우선 용을 죽여야 해.’
균열은 크지 않다. 세계와 마계 간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균열은 조금씩이나마 메꿔지고 있었다.
저 눈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덜덜-
리하르트는 새빨간 눈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검을 들었다.
고작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얼음 왕관과 신앙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졌을 것이다.
“크르르…….”
고개를 땅에 박아 넣은 용이 몸을 웅크렸다.
한껏 말려들어간 꼬리는 놈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우우…….
리하르트가 놈의 앞에 다가섰을 때, 기괴한 울음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런 망할.”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쳐든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촤아악-!
시뻘건 핏물이 웅크린 용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균열 너머의 눈알에서 쏟아진 피눈물이었다.
-크, 크라아악-!
피를 뒤집어쓴 용이 울부짖었다.
무언가 불안하다.
저게 그냥 평범한 피일 리 없었다.
“제3기사단! 정신 차리라고!”
리하르트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헛수고였다.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론과 휴거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 미치겠군.”
리하르트는 용을 바라보았다.
녹색이었던 거체는 어느샌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광룡의 상징인 검붉은색.
쇠사슬이 끊어질듯 요동쳤다.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용이 포악한 기세와 함께 리하르트를 향해 포효했다.
위험하다.
정신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균열 저편의 시선도, 하나둘 쇠사슬을 끊어 내는 미친 용도,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리하르트는 신앙을 아낌없이 끌어올렸다.
‘생각하자. 방법을 생각해 내자.’
얼음 왕관이 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지금 싸울 수 있는 기사는 없어.’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포, 혼란.
이미 모두가 전의를 상실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은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균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지독스러운 기운은 ‘마기’였다.
마기 중에서도 진정 흉악한 마기.
현재의 인간들에겐 그것에 대한 면역이 전무했다.
■■■■■-!
광룡의 피어가 전장을 울렸다.
옴짝달싹 못할 땐 언제고. 피눈물을 뒤집어쓴 광룡이 쇠사슬을 단숨에 끊어 냈다.
광룡이 되며 더욱 강해진 것이 분명하다.
놈이 리하르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크라아아악!”
짓쳐 드는 발톱을 가까스로 피해 낸 리하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캉-!
공격은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리하르트는 물러서지 못했다.
“아론!”
애타게 아론을 불렀다. 휴거와 폴크, 잭을 연이어 불렀다.
답은 없었다.
“컥!”
용이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리하르트가 저 멀리 날아갔다. 몇 차례 땅을 구른 그는 한 기사 옆에 몸을 멈췄다.
“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는 리하르트에게 광룡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주변의 기사 또한 휩쓸릴 터.
“이봐, 얼른 물러나!”
“종말, 종말이야……!”
상급 기사는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그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리하르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욱, 후욱……!”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최대한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게 지금 리하르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크라아아!
쿵- 쿵-
용이 리하르트에게 다가왔다.
광기에 잠식된 눈이 번들거린다.
- 끄흐.
하늘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리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살고 싶었다.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나 허무했다.
쾅!
떨어져 내려오는 용의 발톱을 겨우겨우 막아 냈다.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땅을 굴렀다.
“크으.”
한 차례 신음을 내뱉은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 도련님…….”
이번엔 아론의 앞까지 날아간 걸까. 고개를 돌리자 충성스런 직속 기사가 보였다.
툭, 그의 손을 잡은 리하르트가 신앙을 흘려 넣었다. 아론의 눈빛에 미약하게나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듯 주변을 둘러본 그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아론. 너라도 도망가.”
“……제,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
아론은 리하르트의 뒷말을 듣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을 쥐어 잡곤 광룡을 향해 덤벼들었다.
카각-!
용의 비늘 위를 창이 긁어 내려갔다. 미친 듯 난동부리는 광룡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아론이 눈짓을 보냈다.
제발 도망치라고.
정신을 놓았던 것을 속죄하듯 아론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창끝은 흔들리고 있었다. 억지로 밀어 냈던 두려움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이다.
“취이이익!”
그때 휴거가 합류했다. 도끼로 제 허벅지를 찍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발악한 흔적이 남은 채였다.
콰드득-!
거대한 나무줄기가 솟아나 광룡의 아래턱을 찔렀다.
기드에게 열매를 먹인 아델의 지원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누군가가 리하르트 곁을 스쳐 지나갔다.
폴크와 잭이었다.
한 줌의 이성. 그것을 겨우 부여잡은 이들이 광룡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퍼억-
꼬리에 얻어맞은 잭이 땅을 굴렀다.
잭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푹-
휴거가 용의 발톱에 꿰뚫려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아…….”
곧이어 폴크와 아론도 당했다.
광룡이 아론을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그 모습이 리하르트의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리하르트가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멈춰.”
저들이 죽는 게 두려웠다.
지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위선적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내 동료야.”
여태껏 잘 이해되지 않던 기사란 족속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들에겐 저마다 신념이 있었다.
‘이지훈’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내 것에 손대지 마.”
절망 가득한 최악의 상황.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강대한 적.
리하르트는 그 시련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검을 들었다.
자신이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해.
그때였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시험의 각인이 개방됩니다.』
돌연 손등에 빛이 일었다. 육각형의 각인은 사라지고, 십자(十) 모양의 성흔이 자리 잡았다.
『한 자루의 검성(劍星) - 발동.』
리하르트가 쥐고 있던 검이 둥실 떠올랐다.
드래곤 투스가 축이 되었다. 그 위를 신앙이 질주했다.
쿠구국-!
이윽고 완성된 검의 별.
데스나이트 때와는 달리 그것은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하지 못할 빛이 별에서 뿜어져 나왔다.
-우으으…….
세상을 내려다보던 눈이 동공을 확장시켰다. 광기에 휩싸인 광룡도 몸을 멈칫거렸다.
전장을 뒤덮은 공포를, 검성의 빛이 조금씩 몰아내고 있었다.
“이건…….”
드디어 각인을 개방했다.
멍하니 서 있던 리하르트가 검을 집었다.
‘힘이…… 넘쳐흐른다.’
감상을 늘어놓을 시간은 없었다. 신앙이 미친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으니까.
■■■■■■-!
광룡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모든 걸 뒤로하고,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꽈앙!
쩍 벌린 용의 이빨과 별이 부딪쳤다.
강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까드득-!
연이어 휘둘러 오는 발톱에 검을 마주 대었다. 거센 반발력과 함께 리하르트가 뒤로 밀려났다.
“크윽!”
치열한 대치가 이어지면 곤란한 것은 그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검성의 힘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단 한순간.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리하르트가 땅을 박찼다.
초집중이 발동된 그의 시계(視界)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찔러 들어오는 꼬리 끝을 피했다. 공간을 찢을 듯 할퀴는 발톱을 비껴 냈다.
마침내 드러난 것은 이제 약점이 된 놈의 아래턱.
집중적인 공세로 완전히 박살이 난 부위였다.
“흐읍!”
리하르트가 전력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별이 빛을 내뿜으며 솟구쳤다.
푹!
용이 고통에 찬 울음을 내뱉었다. 아래턱을 뚫고 들어간 별은 멈추지 않았다.
거침없이 입천장을 가르며 위로 나아갔다.
콰직!
그리고 마침내.
별은 광룡의 뇌까지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