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Episode. 14 등불 (1)
■■■■■-!
용이 울부짖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걷어지며 거체가 드러났다.
세로로 찢어진 놈의 동공과 마주한 기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오금이 저려 당장에라도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제 상관인 폴크와 잭은 물론이고 리하르트와 그 동료들이 당당히 맞서고 있었으니까.
“취이익!”
첫 공격은 용의 좌측으로 달려든 휴거의 몫이었다.
금빛 오러를 가득 머금은 도끼가 녹색 비늘을 강타했다.
그 뒤를 이어 리하르트와 아론이 용의 우측에서 공격을 펼쳤다.
“2소대! 돌격하라!”
정면에서 시선을 끌던 폴크가 소리쳤다.
그 명령에 각기 무구를 꼬나 쥔 기사 스물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오러를 완숙하게 다루는 상급 기사들이었다.
“으아아아!”
스물의 기사가 반으로 갈라져 드래곤의 양측에 달라붙었다.
쩌엉-!
하지만 그들의 공격으로도 비늘에는 별다른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되려 어마어마한 반탄력으로 기사들의 손아귀만 저려질 뿐이었다.
-크라아악!
잔뜩 성난 용이 꼬리를 휘둘렀다.
기사들에겐 커다란 녹색 파도가 덮쳐 오는 것처럼 보였다.
“5소대!”
비명 같은 폴크의 외침에 큼지막한 방패를 움켜잡은 서른의 중급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우오오오!”
그들이 덮쳐 오는 용의 꼬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갔다.
마나로 한껏 육체를 강화한 서른의 기사들이, 우그러진 방패와 함께.
하지만 그 덕에 리하르트를 비롯한 우측의 기사들이 뒤로 빠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콰가각-!
그사이 휴거와 기사들이 놈의 왼쪽 옆구리를 쉴 새 없이 강타했다.
폴크와 잭은 놈의 발톱과 비늘 사이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
다시 한번 분노를 가득 담은 피어가 울려 퍼졌다.
코앞에서 터진 피어.
기사들의 몸은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용이 잭을 씹어 삼킬 듯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잭의 시야가 새까만 색으로 가득 찰 때,
콰아앙-!
동굴에서 공터까지.
그 먼 거리를 단번에 달려온 기드가 놈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동시에 용이 포효를 내질렀다.
분노와 당혹, 그리고 고통 섞인 울부짖음이었다.
“기드!”
리하르트가 기드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몸과 핏빛 기류가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노인.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2소대, 후퇴!”
리하르트의 상념을 폴크의 외침이 깨부쉈다.
그 말에 미친 듯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물러났다.
“크라아악!”
용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울었다.
평생토록 느껴 본 적 없던 고통이 정수리를 찌르르 괴롭혔다.
간식거리조차 되지 않는, 왜소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고통을 느끼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쩌엉!
기드의 창대가 놈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고개가 쳐들린 용이 눈을 끔뻑였다.
후두둑-
영롱한 녹빛의 비늘 몇 점이 바닥에 떨어졌다.
“도련님!”
리하르트는 폴크와 시선을 교환했다.
2소대는 뒤로 물러났지만, 지휘관인 폴크와 잭, 리하르트와 일행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1소대였으니까.
“놈의 시선을 끌어!”
신앙을 담은 리하르트의 외침이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기드에게 모든 위험을 끌어안게 할 수는 없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 줘야 했다.
1소대는 목숨을 버린 듯 움직였다.
리하르트의 드래곤 투스가 비늘과 비늘 사이를 우악스럽게 비집고 들어갔다.
휴거의 도끼는 꼬리 끝을 연신 찍어 댔으며, 피어싱 오러를 휘감은 아론의 창은 비늘을 끊임없이 두들겼다.
■■■■-!
“겁먹지 마라!”
용이 피어를 내지를 땐, 어김없이 리하르트의 외침이 뒤따랐다.
카드득-!
얼마 지나지 않아 기드가 또다시 비늘 하나를 깨트렸다.
용은 죽을 맛이었다.
놈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반격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코앞에서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는 인간.
그에게 신경을 집중하면 다른 나약한 인간들이 쉼 없이 몸을 두드렸다.
별다른 위협이 안 된다고 한들, 자신의 육체에 손상을 입히려는 놈들을 당장 짓밟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면 눈앞의 인간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하니까.
감히.
인간 따위가.
어린 용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정확히는 마법이라는 이적을 행하기엔 아직 지혜가 여물지 못했다.
아직 놈은 지고의 생명체인 드래곤보다는, 마물에 가까웠다.
카각-!
기드가 땅을 박차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창격이 등을 타오르고 비늘을 깨트렸다. 깨진 비늘 사이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놈에겐 기회였다.
용이 고개를 한껏 젖혀 기드를 삼키려 들었다.
그 순간.
아래턱에서부터 끔찍한 고통이 터져 나왔다.
“크라아악!”
어느새 놈의 몸을 기어 오른 리하르트가 상처투성이인 아래턱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홀리 오러가 억센 근육을 가르며 상처를 헤집었다.
“3소대, 돌격!”
잭의 외침에 스물의 기사가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용의 양 측면이었다.
그 와중에 기드가 놈의 등에서 공격을 쏟아부었다.
촤르륵-!
거체의 자유를 속박한 쇠사슬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 쇠사슬부터 끊어야 한다-
겨우 정신을 차린 용이 쇠사슬 하나를 짓씹었다.
그때, 부릅뜬 놈의 시야에 붉은 무언가가 가득 들어왔다.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흉터.
익숙한 얼굴.
붉은 오크가 도끼를 쳐들었다.
“취익! 죽어! 죽어어어!”
콰직-
용의 왼쪽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눈에서부터 느껴지는 격통에 용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아래턱에 통증이 일었다.
이번엔 피어싱 오러를 휘감은 아론의 창이 아래턱에 깊이 틀어박힌 것이다.
“3소대, 후퇴!”
전황을 살피던 폴크가 외쳤다.
탁월한 판단이었다.
쾅, 콰앙-!
기사들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용의 꼬리가 제 몸 양측을 번갈아 때렸다.
쿠구구-!
압도적인 마나가 용의 아가리에 몰려들었다.
물론 브레스라는 고절한 마법이 아닌, 무식하게 끌어모은 마나의 덩어리였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가 숨을 한껏 들이켰다.
그리고.
“8번 발리스타, 발포!”
숲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콰앙-!
그 직후 굉음이 일었다. 전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설치된 발리스타의 발포음이었다.
흉악한 쇳덩어리가 마나를 가득 머금은 아가리를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쇳덩어리에 달린 사슬이 위턱과 아래턱을 휘감았다.
꽈아앙!
응축된 마나가 놈의 입 안에서 폭발했다.
용의 하나 남은 눈깔이 뒤집어질 듯 위아래로 요동쳤다.
“우오오오!”
그사이 분기탱천한 1소대가 끈덕지게 달라붙어, 비늘이 깨지고 드러난 상처를 찔러 댔다.
콰직! 콰지직!
등을 헤집던 기드는 어느새 왼쪽 옆구리를 맹렬히 강타하고 있었다.
용이 춤을 추듯 몸을 뒤틀어 댔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방심하지 마! 상대는 용이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악다구니를 쓰듯 외친 그가 놈의 몸을 다시 기어올랐다.
이미 난장판이 된 등판을 필사적으로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꾸준히 기드를 따랐다.
폭발적인 기세를 내뿜던 기드의 기운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불사지르던 그의 생명이 끝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전에 끝내야 해.’
아무리 놈의 체력을 깎는다 해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기드뿐이다.
기드가 쓰러지면 이 싸움의 결과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돌격!”
그 안에 끝장을 봐야만 한다.
이를 악문 기사단이 총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좀 더 기드가 편히 날뛸 수 있도록.
땅을 할퀴듯 휘두른 놈의 발톱 앞에 6소대, 방패를 쥔 중급 기사들이 달려들어 시간을 벌었다.
단 한 번의 여파로 그들은 멀리 나가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상급 기사로 이루어진 2소대, 3소대, 4소대는 한 몸이 된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용을 괴롭혔다.
막바지에 달한 기드의 공격은 더욱 막무가내가 됐다. 이성을 잃고 용을 사정없이 강타하는 그의 창격이 쇠사슬 여럿을 끊었다.
“13번 발리스타, 발포!”
그럴 때마다 또 다른 발리스타의 쇳덩이가 굉음과 함께 날아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랄 때는 아델의 나무가 솟아올라 녹색의 거체를 옭아맸다.
-크그그극!
쇠사슬에 감싸인 아가리 사이로 억눌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죽어어!”
리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마나는 진작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지금은 다시금 신앙으로 엮어 낸 오러가 깨어진 비늘 사이로 파고들었다.
기사들이 용을 흉내 내듯 포효를 내질렀다.
저 멀리 발리스타에 배치된 하급 기사들도 동참해 목청을 높였다.
승기는 기울었다.
용의 눈이 불안함을 가득 담고 사방을 훑었다.
이제 놈에게선 전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을 오시해야 될 용이, 고작 이백의 인간 앞에서 겁먹은 도마뱀이 되고 만 것이다.
기사들은 승리를 예감하고 더욱더 가열차게 공격을 이어 나갔고, 복수의 화신이 된 휴거는 놈의 하나 남은 눈알을 마저 터뜨리려 도끼를 쳐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깨지기 전까지는.
◈ ◈ ◈
덜그럭-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뒤를 따라 격양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왕의 어둠이 온다!”
리치들에게서 기운이 솟구쳤다.
그 기운이 한데 모여 복잡한 수식을 이루자, 하늘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
이 참람한 세상을 검게 물들일 지옥문.
그 너머로 붉디붉은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