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Episode. 13 용 사냥 (3)
노인은 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끝이 허공을 찌를 때마다 거센 파공음이 동굴을 울렸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던 팔의 고통도, 수없이 반복된 고행에 지쳐 버린 정신도 이제는 없었다.
남은 것은 무의식뿐.
“후욱, 후욱!”
결코 노인의 몸이라 할 수 없는 근육이 터질듯 부풀었다. 비정상적으로 솟은 핏줄 속엔 혈액이 질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담금질.
수천, 수만 번을 때려 제련한 강철과도 같이, 기드는 자신의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드래곤을 죽인다.
놈의 심장을 뽑아 도련님께 바친다.
오직 그 목표만이 담금질의 원동력이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기드를 말렸다.
대체 어째서 리하르트 같은 망나니를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것이냐고.
그에 대한 기드의 답은 간단했다.
그냥.
거창한 미사여구 따윈 필요 없었다.
정말 그냥, 그 아이에게 마나라는 신비를 알려 주고 싶었다.
모두에게 멸시받는 그 핏덩이에게 뒤늦게나마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어차피 늙어 쓸모없어진 몸뚱어리.
한 번쯤은 불살라 볼 만하지 않겠느냐-
기드는 그리 말하곤 떠났다.
그렇게 이곳에 자리 잡은 지 넉 달이 흘렀다.
우뚝-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의 몸이 멈췄다.
초점 잃은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쿠드득!
잔뜩 부풀었던 근육이 더욱 터질 듯 팽창했다가 돌연 수축했다.
그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며 기드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은 혈액과 함께 온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
붉게 달아오른 육체 위로 새빨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담금질.
나약한 인간의 육신이 가진 한계를 강제로 깨부수는 금술.
지금 이 순간, 기드는 잠시나마 초인의 격에 오를 수 있었다.
◈ ◈ ◈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리하르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상태창.”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12 □ 신앙 ? 54,772
□ 권능 -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5만 4천밖에 못 모았다니…….’
신격이라기엔 지나치게 빈약하고 초라한 신앙이었다.
“역시 전도 좀 할걸 그랬나.”
그렇게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기사들 앞에서 신을 외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나 컸고, 다른 마을에 들러 전도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차라리 천천히 뜸을 들이는 것이 백배는 나은 선택지였다.
다만, 결전을 코앞에 둔 입장으로선 신앙의 양이 적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마다 쌓이는 신앙은 대략 1,500 포인트.
그중에 무려 일천 포인트가 아델의 밥값이었고, 나머지 500 중에서 300은 홀리 오러의 숙련도 상승을 위해 꾸준히 소모했다.
근 한 달간은 신앙을 거의 모으지 못한 것이다.
“아델. 너 정말 열매 맺을 수 있지?”
“응응! 나만 믿고 맡겨 주라아!”
조막만한 두 손을 불끈 쥔 아델이 콧김을 내뿜었다.
평소보다 과한 그녀의 애교는 그녀 나름대로 리하르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툭, 툭-
그에 리하르트가 기특함을 담아 아델의 머리통을 토닥였다.
‘그래. 어차피 써야 할 곳에 쓴 거지.’
사실 5만 포인트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상대가 드래곤인 게 문제일 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홀리 오러가 E랭크로 승급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렇게 긴장되시면 주둔지에서 쉬고 계시지요. 놈의 심장은 금방 뽑아 오겠습니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리하르트의 귓가를 때렸다. 고개를 돌리니 폴크가 히죽 웃고 서 있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 없을 때 홀라당 먹어치우려고?”
“아니!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하십니까!”
“왜, 나 주기 아까울 수도 있지.”
암묵적 합의라 해야 할까. 그들은 일부러 몇 마디 잡담을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오랜만에 기드를 보겠네.”
“이미 당부해 드렸지만 절대 기드 경에게 다가가지 마십시오.”
“알았다니까.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리하르트가 질색을 함에도 폴크의 표정은 단호했다.
마치 드래곤보다 기드를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어조였다.
“기드 경은 이미 이성을 잃으셨을 겁니다. 피아 구분을 못하게 되는 거지요. 토벌 계획은 미리 거듭해서 숙지해 두셨으니 괜찮겠지만…….”
한마디로 눈먼 창에 맞아 죽지 말라는 뜻이다.
뼈도 못 추릴 테니까.
“그나저나, 여기가 용과 싸울 곳이란 말이지?”
폴크의 잔소리에 서둘러 화제를 전환한 리하르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기사들이 완전 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곳은 주둔지가 아니었다.
용의 봉우리와 기드의 동굴 중간 지점에 위치한 넓은 공터.
제3기사단이 지난 몇 달간 고르고 고른 최적의 사냥터였다.
“탁 트여 발리스타로 쏘아 맞추기 용이하고, 기사들도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음…….”
공터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로 수많은 기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서 있었다.
긴장으로 굳은 그들의 표정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너희들, 죽지 마라!”
“아, 도련님! 대체 죽지 말란 말을 몇 번이나 하시는 겁니까?”
대뜸 외치는 리하르트의 말에 잭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기사들도 저마다 입을 열었다.
“도련님 엉덩일 걷어차기 전까진 못 죽습니다!”
“맞습니다! 안 죽을 거니까 도련님이나 몸조심하십쇼!”
이 불경한 놈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리하르트는 그냥 픽 웃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엔 충실한 직속 기사, 아론이 있었다.
리하르트가 아론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아론, 기드는 걱정하지 마. 아델의 열매라면 후유증이고 뭐고, 반드시 치료할 수 있으니까.”
“그 말씀도 이미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한 열댓 번쯤은 말이죠.”
“아 진짜. 너까지 그러기냐?”
어찌 이렇게 그냥 넘어가는 이들이 없는지.
뚱한 리하르트에게 휴거가 다가왔다.
“췩, 뭘 그리 긴장하시오? 둘 중 하나일 뿐이라오. 오늘 이 자리에서 도마뱀 새끼가 죽든지, 죽지 않든지! 물론 나는 놈을 쳐 죽일 거라오! 취이익!”
그렇게 말하는 휴거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별로 긴장 안 했거든.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아니야. 드래곤은 오늘 반드시 죽는다.”
이렇게나 고생했는데 용을 처치하지 못하면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았다.
화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리하르트는 왕관을 고쳐 썼다.
냉기가 머리에 스며들자, 그의 분위기도 점차 차분해져 갔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도 흐트러트렸던 기세를 날카롭게 세웠다.
이제 전투를 시작할 때다.
산맥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바텐가에 돌아가기 전에, 우리끼리 용 고기로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꾸이이익!”
그리고 그 순간.
쿠구구구-!
그들이 대열을 갖춘 공터 뒤쪽, 기드가 있는 동굴 방향에서 압도적인 기운이 솟구쳤다.
온몸의 털이 쭈뼛거리며 전율이 일었다.
여과 없이 내뿜어지는 초인의 격에 산이 몸을 떨어 대는 것 같았다.
“생명이 불타오르고 있어. 이건 정말 내 열매가 아니고서야 어쩔 방도가 없겠네.”
“아델. 너는 꼭 열매를 맺을 여력을 남겨 둬야 해.”
“아빠는 아빠 몸만 조심해. 그 사람은 내가 꼭 구할 테니까.”
믿음직한 아델의 말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기드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쐐애애액-!
동시에 굵기가 팔뚝만 한 거창(巨槍)이 하늘을 찢어 버릴 듯한 파공음을 내며 날았다.
콰앙!
그것은 순식간에 용의 봉우리에 틀어박혔다. 아니, 틀어박히다 못해 봉우리를 붕괴시켜 버렸다.
그리고.
■■■■■■■-!!
분노에 가득 찬 괴물의 포효가 산맥을 휩쓸었다.
“으아아악!”
드래곤 피어.
그 끔찍한 포효를 들은 기사 몇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만,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리하르트가 신앙을 끌어올렸다.
마나 루트를 타고 오른 신앙이 성대에 도달했다.
“제3기사단-!”
그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신앙을 가득 담은 그 음성엔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라-!”
외침이 산을 울렸다.
공터의 기사들을 넘어, 발리스타를 다루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하급 기사들에게도 닿을 정도로.
■■■■■■-!!
붕괴하는 봉우리에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어를 줄기차게 흘려 대는 놈이 날개를 펼쳤다.
파충류의 눈알이 한 점을 향했다.
공터의 나약한 인간들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목표는 오직 하나.
자신의 단잠을 깨운, 굉장히 거슬리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존재만을 노려보았다.
“온다!”
놈이 포악한 기세를 뿜으며 기드가 있는 동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폴크는 숨죽인 채 타이밍을 쟀다.
하나, 둘, 셋.
“도련님!”
“발포-!”
신앙이 가득 담긴 음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쾅! 콰앙!
그 직후, 리하르트에게 응답하듯 숲 곳곳에서 굉음이 일었다.
그것은 발리스타가 발포될 때 이는 소음이자, 용을 땅으로 고꾸라트릴 선전포고였다.
“크라아악-!”
거침없이 날아가던 놈을 향해 흉악한 쇳덩어리들이 쏘아졌다.
촤르륵!
쇳덩어리에 연결된 쇠사슬이 허공에 거미줄을 쳤다.
발포된 것은 도합 아홉 발.
몇 개는 놈의 거체에 적중했지만, 단단한 비늘을 뚫지 못했다.
나머지는 아예 스쳐 지나기만 했을 뿐, 놈에게 닿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나를 주입해라!”
리하르트의 네 번째 외침.
그 외침에 발리스타 한 기당 다섯 명씩 배치된 하급 기사들이 눈을 빛냈다.
이내 그들은 발리스타 본체에 부착된 동력 장치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본체와 연결된 두터운 쇠사슬이 꿀렁거리며 마나를 빨아들였다.
촤르륵!
그리고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 크라아아-!”
어린 용이 울부짖었다.
제 몸을 순식간에 옥죄는 다섯 가닥의 쇠사슬이 비행의 자유를 억제했다.
활성화된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그물이자, 드워프의 신기가 집약된 포승줄이 바로 그것이었다.
쿠웅-!
곧 드래곤이 땅에 떨어지며 귀가 멍할 정도의 굉음이 일었다.
희뿌연 흙먼지 속 커다란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기드의 기운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기 - 초집중 발동.』
“가자.”
리하르트와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비로소 용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