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Episode. 13 용 사냥 (2)
음산한 어둠 속, 세 쌍의 안광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왕의 어둠이 도래한다.”
“어둠은 또 다른 어둠을 불러올 것이며.”
“이 나약한 세계는 검게 물들고 말 것이다.”
덜그럭,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
그중 하나, 리치 크롬벨은 문득 일전에 느꼈던 이질적인 기운을 떠올렸다.
어둠과 대비되던 그 기운.
언데드를 보내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변수에 실패로 돌아가 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제 동지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기운은 매우 이질적이고 불쾌했지만, 그 크기가 무척 작고 보잘것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곧 불어닥칠 삭풍에 사그라들고 말 터.”
◈ ◈ ◈
“취익, 동료라고 그랬소?”
눈을 동그랗게 뜬 휴거가 입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는 태도였다.
“그건 좀…… 솔직히 말해 어렵소.”
“왜?”
“췩! 그대가 원하는 것은 토벌 이후에도 함께할 동료 아니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의 적을 앞둔 동지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료는 경우가 다르다오.”
요컨대 내가 정확히 어떤 놈인지 모르니, 섣불리 동료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제안을 거절하는 이놈은 눈치가 없는 걸까, 멍청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신념이라도 갖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발을 쭉 뻗었다.
퍽!
“꾸이익! 왜 걷어차는 거요!”
한껏 엄살 피우는 놈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곤 속삭였다.
“멍청아. 여기서 거절하면 어쩌자는 거야. 목 따이고 싶어?”
“하, 하지만!”
“일단은 같이 용 잡는 데까지만 생각하자고. 그때까지라도 동료가 되는 거야.”
말을 마친 나는 빤히 휴거를 바라보았다.
그 흉터 가득한 얼굴에 내적 갈등이 실시간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곧,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취익, 잘 부탁하오. 이게 정말 얼마만의 동료인지 모르겠구려.”
고민이 짧고 굵은 것이 딱 오크다웠다.
“후회는 없을 거야.”
놈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안이 벙벙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들었지? 휴거는 이제부터 내 동료야.”
나는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맞잡은 휴거의 손을 흔들어 댔다.
정적이 정확히 3초 흐른 뒤.
기사들이 아우성쳤다.
“도련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반쯤 협박이었는데!”
“목 따이고 싶냐 물어보시는 거 다 들었습니다!”
나는 유난히 목소리가 큰 폴크와 잭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동료가 된 건 맞지, 암.
“아론. 자네도 뭐라 말 좀 해 보게나! 자넨 도련님의 직속 기사라 하지 않았는가!”
폴크가 돌연 화살을 아론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아론의 반응이 무척 가관이었다.
“직속 기사의 덕목 제1항. 주군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른다.”
난데없이 괴상한 조항을 읊어 대는 것이었다.
“제가 이번에 만들기 시작한 조항입니다. 하나하나 쌓아 갈 요량이죠.”
“오, 아주 좋아. 바람직해.”
아론과 마주 보며 낄낄거릴 때였다.
이번엔 화살이 아델을 향했다.
“이봐, 꼬마야! 너도 저 무서운 오크와 함께하고 싶은 거냐? 그건 싫지? 부디 싫다고 말해 다오!”
폴크가 아델의 어깨를 부여잡고 애원을 했다.
치사하게 어린애를 인질로 삼으려 하다니.
“상대를 잘못 골랐군요.”
아론의 말에 나는 긍정을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폴크는 계속 입을 열었다.
“혹시 오크에 대해 모른다면 내가 설명해 주마. 저놈들이 얼마나 무섭고 흉한 놈들인지!”
“취익, 거 듣는 오크 속상하구려.”
휴거가 어깨를 추욱 늘어트릴 때, 아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크는 강맹하고 또 용맹한 종족이지. 적으로 만나면 버거우나, 함께할 때는 누구보다 듬직한 이들이다.”
아쉽게도 아델도 폴크의 편이 아니었다.
“뭐, 뭣……!”
“폴크.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더는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 차례 눈을 질끈 감았던 폴크가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예를 갖춰라. 오크이기 전에, 리하르트 도련님의 동료이시다.”
폴크의 항복 선언에 기사들도 마지못해 경례를 올렸다.
나는 한 발 물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다 휴거에게 물었다.
“일개 오크에서 신분 상승한 기분이 어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지만, 뭐, 부대끼다 보면 친해지지 않겠소? 취익!”
정론이었다.
◈ ◈ ◈
“드래곤은 홉슨 산맥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잭이 산맥의 지도 중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가위 표시들은 뭐야?”
잭이 펼친 산맥의 지도에는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봉우리를 중심으로 열댓 개의 가위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를 설치한 구역입니다.”
“오.”
드워프가 설계한 그것은 꽤 유명한 물건이다.
그걸 열다섯 기나 공수해 오다니.
“만만치 않았을 텐데.”
“예. 드워프들이 어찌나 괴팍하게 굴던지. 하나라도 망가지면 가만 안 둘 거라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잭은 그들에게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토벌 계획은 간단합니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먼저 기드 경께서 담금질을 끝마칩니다.”
툭-
그의 손가락이 산맥 중 어딘가를 짚었다.
그곳에 위치한 깊은 동굴 속에서 기드가 담금질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직후 기드 경이 투창을 가해, 드래곤을 자극합니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 먼 거리에서 드래곤의 봉우리까지 창을 던진다니.
하지만 담금질은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생명력을 불태우는 그 힘은 잠시나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 줄 터.
“하늘에 떠오른 용을 향해 발리스타를 발포. 놈을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잭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공격은 기드가 맡고, 기사단이 보조를 한다. 최소 상급 기사의 전력이 아니라면, 드래곤에게 어정쩡한 공격은 무용지물이었다.
“정말 계획은 간단하네.”
“애초에 놈에게 잔머리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나마도 어린 용이라 다행이죠.”
고개를 끄덕였다.
홉슨 산맥의 드래곤은 아직 지성이 발달하지 못한 유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췩, 기드라는 인간 전사가 그리도 강하오?”
“최고의 창기사요.”
휴거의 물음에 아론이 답했다. 그 단호한 어투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껄껄! 다음에 한번 겨뤄 봐야겠구려!”
눈치 없는 오크 하나가 해맑게 웃었다.
이 바보는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지.
“취익? 다들 눈초리가 왜 그러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휴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자,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야?”
“이미 준비는 전부 끝마쳤습니다. 기드 경의 일이 끝날 때까지, 주변의 토벌과 주기적인 순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나는 눈을 감았다.
기드의 담금질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열흘.
거센 긴장감과 한 줌의 불안이 심장을 두드렸다.
◈ ◈ ◈
리하르트가 주둔지에 도착한 지 엿새가 지난 날.
결전을 앞두고 간단한 식사 자리가 열렸다.
명목은 리하르트의 합류를 기념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기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연회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힘이 넘치는구먼! 이 고기 누가 구웠어?”
멧돼지의 뒷다리를 단숨에 먹어치운 기사가 입맛을 다시며 외쳤다. 다른 기사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 손에 들린 음식을 바라보았다.
“내 손맛이 이렇게 좋았던가?”
정작 고기를 구웠던 하급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앙 좀 쓴 보람이 있네.”
남들 몰래 고기에 신앙이라는 조미료를 뿌려 주었던 리하르트가 슬쩍 웃었다.
“아빠. 신도는 왜 안 만들어?”
아델이 리하르트의 품을 파고들며 물었다.
“서두르면 큰일 나거든. 아주 위험한 양반이 하나 있어서.”
리하르트는 꼬장꼬장한 루드비히를 떠올렸다.
그간 아론이 보여 준 반응으로 유추하건대, 조심성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어떤 평지풍파가 일어날지 모른다.
“아무튼, 어중간하게 하면 앞날이 꽉 막혀 버릴 거야.”
물론 제3기사단 전원이 신도가 되면 엄청난 이득이다.
하지만 위험성이 너무나 컸다.
혹여 루드비히가 직접 나서서 종교를 금지시켜 버리면, 바텐베르크에서 전도 활동은 물 건너가는 셈이니까.
아직 제 위치를 다잡지 못한 리하르트에겐 그런 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대체 누구야? 내가 혼내 줄게!”
“아서라. 그러다가 장작 신세 된다.”
리하르트가 아델의 머리통을 토닥였다.
문득 세계수로 장작을 만들면 특별한 효과가 있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 지났다.
“바, 방금 아빠가 무서운 생각을 한 거 같은데…….”
“아무튼 씨앗은 뿌려 뒀으니 때를 기다리면 돼.”
리하르트는 제1기사단장, 레오를 떠올렸다.
곧 있으면 리치와 기사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수많은 희생자가 생길 것이고, 절망에 빠진 이들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 법이지.”
언젠가 했던 말인 것 같지만, 그때가 되면 정말 많은 게 변할 것이다.
리하르트가 머릿속으로 앞날을 그릴 때였다.
“오, 대단한 인간 전사! 나의 임시 동료여!”
배를 든든히 채운 휴거가 리하르트에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냥 리하르트라고 부르라니까. 그보다 땀내 나니까 떨어져!”
“취익, 너무하구려.”
리하르트의 질책에 휴거가 익살맞게 울상을 지었다. 그동안 휴거는 기사들과 친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리하르트의 입장에선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보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기사들 틈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너 진짜 오크 맞아? 뭔 놈의 오크가 이렇게 붙임성이 좋냐.”
“나에게 이들은 그냥 인간이 아니오. 취익, 공동의 적을 처단할 동지이지. 오크는 동지끼리의 화합을 중요시한다오.”
“…….”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정작 인간들은 저들끼리 기사와 마법사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건만.
그 말에 아델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돼지야, 제법 멋진 말을 하는구나.”
“돼, 돼지라니! 뀌이익!”
휴거가 펄쩍 뛰며 멱따는 소리를 내자, 이쪽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맥주가 가득 담긴 컵 세 잔을 들고 있는 아론이 있었다.
“아론.”
“머슴 왔구나.”
“취익. 머슴이 왔구려.”
졸지에 머슴이 되어 버린 그가 피식 웃으며 손에 들린 맥주잔을 내밀었다.
전투를 앞두고 과음을 피하기 위해 인당 한 잔씩만 허락된 맥주였다.
“건배사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
“건배사는 무슨, 그냥 마셔.”
리하르트가 질색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결코 사교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솔직히 말하면 휴거보다도 못한 리하라트에게 건배사는 큰 난제였다.
“취익, 이런 자리에서 빼면 쓰나!”
“맞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십시오!”
휴거와 주변의 기사들까지 거들었다. 그 성화에 결국 리하르트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주목! 도련님의 건배사다!”
신이 난 폴크가 끼어들어 기사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게 전부 아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라고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좌중을 훑었다.
공터에 자리를 깔고 앉은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며칠 전과는 다른, 아주 적대적이기만 한 시선은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숨을 골랐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직 내가 껄끄러운 이들이 있겠지.”
어렵사리 입을 연 그가 기사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맞췄다.
“날 좋아하든 말든. 죽지 마라. 죽을 것 같으면 그냥 뒤로 빠져.”
기드는 결코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세계수의 열매라면 능히 살려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아델이 맺을 수 있는 열매는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한다.
“살아남은 놈들은 내 엉덩이를 걷어찰 기회를 줄게.”
어영부영 말을 마친 그가 어색하게 건배를 외쳤다.
참으로 사기를 뚝뚝 떨어트리는 건배사였다.
“무슨 건배사가 그럽니까!”
“우우!”
기사들이 장난스레 야유했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다.
리하르트가 어떤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엿새간 리하르트는 열심히 기사들의 업무를 거들었다.
아니, 매번 앞장서 궂은일을 도맡으려 했다.
말을 몰아 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순찰을 나가기도 했고, 주둔지에 얼쩡거리는 마물 여럿을 직접 베어 넘겼다.
심지어는 조용히 사라졌다가, 멧돼지 몇 마리를 사냥해 오기도 했다.
휴거가 기사들과 함께 어울리려 노력했다면, 리하르트는 혼자 묵묵히 짐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사내들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에잉, 도련님을 위하여! 건배!”
“위하여!”
때문에 그들은 되려 텐션을 높이며 분위기를 띄웠다. 입가엔 저마다 나름의 흐뭇함이 걸려 있었다.
“취익, 내 생애 최악의 건배사였소!”
“시끄러워.”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리하르트가 맥주를 홀짝였다.
드래곤을 마주하기까지 나흘을 앞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