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Episode. 13 용 사냥 (1)
아델가르텐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 리하르트가 오롯이 담겼다.
“도련님!”
아론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가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리하르트를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리하르트는 그저 무리했을 뿐이다.
신성력이 아닌, 신앙 그 자체로 오러를 엮는 것은 지금의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리하르트를 응시하던 아델가르텐이 눈을 감았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었다.”
높낮이 없는 독백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잃어버린 믿음은 회복할 수 없음이라.”
오랜 기간의 공백. 세계의 주민들은 더이상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또 다른 믿음이 생겨날지니.”
두터운 불신을 깨트리고 피어날 신앙.
그 씨앗은 이미 저들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 ◈ ◈
폴크는 혼란스러워하는 기사들을 수습했다.
직책에 어울리는 통솔력을 발휘해, 어지러워진 군기를 다잡았다.
휴거는 사지를 쇠사슬로 묶어 거대한 바위에 단단히 몸을 고정시켰다.
놈은 껄껄 웃으며 그에 따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리하르트가 정신을 잃기 전 내린 명령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한편 쓰러진 리하르트와 아론, 그리고 정체 모를 소녀는 새로 지어진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후…….”
폴크가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혼란은 수습했다지만, 정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본인을 숨기고 계셨다고…….”
그는 제3기사단의 노고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우선 예상치 못한 기드의 합류로 인해 당초 수립했던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홉슨 산맥을 얼마나 오르내렸던가.
뿐만 아니라, 드워프로부터 대 드래곤용 발리스타를 공수해 오기 위해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고달팠던 것은, 기드가 담금질에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것이었다.
오래전에 은퇴한 노기사가 이제 와 다시금 창을 쥔 이유, 그게 전부 리하르트를 위해서라니.
기사들은 기드를 존경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기드는 기사들에게 드래곤을 땅으로 고꾸라트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하면 자신이 홀로 담판을 짓겠다고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존경하는 이가 죽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며 싸우는데, 기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기드와 함께 싸우다 죽는 것은 기사단 누구나 반겼다.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다만, 그가 어째서 리하르트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그를 비롯한 제3기사단의 노고가 가치 없이 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마냥 가치 없진 않겠구나.”
폴크는 그간 품어 온 생각을 정정했다.
리하르트는 소문과 달랐고, 그의 기억 속 모습과도 달랐다.
어찌 되었든, 임무는 당연히 속행할 것이다.
제3기사단은 바텐베르크가 뽑아 든 검이었다.
응당 목표를 향해 휘둘러져야 함이 옳다.
다만 좀 더 가치 있는 전장에 설 수 있게 됐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 ◈ ◈
몽롱한 정신 속에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녹색 천막이었다. 날이 밝았는지 천막에 빛이 새어 들어왔다.
“으윽…….”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근육통이 이곳저곳을 쑤셔 댔다. 빨래 짜듯 근육이 비틀리는 감각이었다.
‘신앙으로 오러를 엮는 일은 두 번 다신 못할 일이구나.’
고작 대련 한 번 이기겠다고 아까운 신앙을 3,000이나 소모했다.
나 또한 내가 이렇게나 승부욕이 강한 줄은 몰랐다.
“미친 거지. 미친 게 분명해. 이렇게나 무리하다니.”
혼자 혀를 차며 반성하고 있을 때, 아론과 아델이 막사에 들어왔다.
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도련님!”
“아빠아!”
방긋 웃으며 달려드는 아델을 저지했다.
그대로 냅두면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할 게 뻔한데, 지금 나는 근육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도련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죽을 맛이야.”
아론에게 답하며 신앙을 끌어올렸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신앙 아니겠는가.
과연 왜 진작에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통증이 가라앉았다.
“……또 그 힘이군요.”
“왜?”
아론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앞에서 신앙을 사용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반응이 영 이상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말을 해.”
그는 그냥 웃으며, 무사하시니 다행이라는 말만 했다.
싱거운 놈.
한결 나아진 몸을 이끌고 막사 밖으로 나가자, 기사들이 저마다 시선을 보내 왔다.
개중에는 어색하게나마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다. 어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깨어나셨군요.”
폴크가 다가오며 말했다. 무뚝뚝한 그의 눈빛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됐어. 뭘 그렇게까지.”
대뜸 고개를 숙이는 폴크를 만류했다.
그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어색한 것은 나도 매한가지였다.
“그보다 오크는 어디 있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폴크의 안내를 따라 주둔지 뒤편으로 걸어 나갔다.
한눈에 봐도 큼지막한 바위.
거기에 사지를 결박당한 휴거가 있었다.
“충!”
놈을 감시하던 기사 셋이 우리에게 예를 표했다. 그 중엔 잭도 포함되어 있었다.
“취익, 대단한 인간 전사!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구려!”
“그 꼴을 하고선 넉살도 좋아.”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로 인사를 건네는 휴거가 퍽 우스웠다.
놈도 껄껄 마주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대련에서 승리했으니 패자는 그에 따라야겠지. 그래, 내 처우는 이제 어찌 되는 거요? 취익!”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초탈한 기색이었다.
정말 봐도 봐도 신기한 오크였다.
대개 오크는 흉포한 야성을 주체하지 못할 텐데, 눈앞의 휴거는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희 부족은?”
“췩, 이젠 존재하지 않소. 부족 모두가 드래곤에게 당했지.”
“그래서 복수를 하려는 거였군.”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통하게 떨군 두 눈에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놈은 사악하고 잔악한 놈이오. 취이익! 씹어 죽일 도마뱀 자식!”
절로 피어나는 휴거의 살기에 기사들이 검을 쥐었다. 허튼짓이라도 하면 즉각 대응하겠다는 경고였다.
“확실히 용은 성격이 파탄 난 놈들뿐이지.”
나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설정을 왜 그렇게 해놓았을까-
심히 후회될 뿐이었다.
“쇠사슬 풀어.”
“도, 도련님?”
기사들이 당황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부디 저들이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 반대로 휴거는 눈을 반짝였다.
“뒤통수 칠 놈은 아닌 것 같아. 토벌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거야.”
“맞소. 참으로 맞는 말이오! 취익,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리다!”
휴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사들은 쉬이 설득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련님.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십시오. 녀석은 오크입니다.”
폴크가 완강하게 거절 의사를 피력했다.
“설령 이놈이 진심으로 협력을 원한다 해도, 저희는 오크의 도움 따윈 필요 없습니다.”
“전력 하나가 늘면 그만큼 기사들이 입을 피해가 줄어들어.”
“이건 긍지의 문제입니다. 기사가 오크와 손을 잡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폴크와 기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역시 기사란 놈들은 죄 꽉 막혔다.
도대체 이게 긍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우습구나.”
내 옷깃을 쥐고 있던 아델이 입을 열었다.
입가엔 삐뚜름한 미소가 내걸린 채였다.
“다른 종족과 협력하는 것이 긍지를 저버리는 일이더냐.”
난데없이 설전에 끼어든 아델에게 시선이 모였다.
“성마대전의 영웅들은 모든 종족을 하나로 규합했다. 그럼 그들은 긍지 없는 것이더냐?”
기사들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아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성마대전은 옛적에 잊혔으니까.
그들에겐 아귀다툼 같던 대전쟁의 기억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델의 음성에는 세계수의 위엄이 가득 서려 있었다. 반박의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 아이는 누굽니까?”
폴크가 내게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었지만, 지금까지 아델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아델가르텐. 아빠의 딸…….”
“강력한 드루이드야.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아델의 말을 얼른 끊었다. 괜히 딸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나는 상황을 중재시키곤, 붉은 오크를 바라보았다.
“휴거.”
“말하시구려, 취익.”
“나에겐 기사들과 논쟁을 하면서까지 너를 두둔할 이유가 없어.”
붉은 오크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그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끝내 남은 것은 체념이었다.
“취익, 면목 없소. 나 때문에 불화가 일었나 보오. 애초에 내 아집이었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마시구려.”
오히려 놈은 결박된 상태에서도 내게 미안함을 표했다. 이거 참. 마음에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나는 아론에게 시선을 보냈다.
묵묵히 서 있던 그가 휴거의 쇠사슬을 하나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췩……?”
“그러니까, 너는 그냥 내 동료가 돼라.”
이놈은 이대로 놓치기에 아까운 인재였다.
오크는 지배종의 자리를 두고 다퉜던 주축 중 하나. 타고난 전사인 그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오크들만의 기연을 얻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