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episode. 12 거, 눈총 쏘지 말고 (3)
핏빛 나무 부족의 마지막 전사, 휴거.
홉슨 산맥을 누비고 살던 휴거의 부족은 난데없이 나타난 드래곤이라는 재앙 앞에 허무히 쓰러졌다.
눈앞에서 가족과 전우가 용의 아가리에 집어 삼켜졌고, 번창했던 보금자리는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 참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휴거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휴거는 복수를 다짐했고, 증오스러운 용을 찾아가 도끼를 들이밀었다.
뒤떨어지는 오크의 지능으로도 그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가슴은 복수를 외쳤다.
긍지를 잃고 숨어 사느니 용맹을 떨치다 죽는 게 백배는 나았으니까.
하지만 휴거는 용의 잔악함을 얕보았다.
놈은 자신에게 덤벼든 휴거의 살갗을 발톱으로 헤집었다.
그의 붉은 피부를 불길로 더욱 붉게 달궜으며, 아가리에 머금었다가 뱉어 내기까지 했다.
드래곤은 숨을 헐떡거리는 휴거를 살려 돌려보냈다. 마치 다음에 또 덤벼 보라는 듯이.
이는 전사의 긍지와 용맹을 나락으로 떨궈 버리는 극악무도한 짓거리였다.
놈에게 휴거는 한낱 심심풀이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또다시 살아남은 휴거는 절망에 빠졌다.
바짝 날을 벼렸던 복수의 칼이건만, 그 대상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손에 쥔 무기를 놓지는 않았다.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흐를 동안 휴거는 수없이 많이 덤볐고, 그럴 때마다 끔찍한 흉터가 온몸에 아로새겨졌다.
붉은 오크는 죽지 못해 살며, 죽지 않아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백이 넘는 인간들이 홉슨 산맥을 찾았다.
휴거는 인간들의 목적이 용이라는 것을 어렵사리 알아냈다.
그에게 있어선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취익, 대련에서 이기면 정말 약속을 지켜야 하오.”
대화를 시도하려다 기사들에게 내쫓기기를 수어 번.
마침내 교섭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의 비실비실한 인간이 대련을 청했다.
자신을 꺾으면 힘을 합치는 걸 고려해 보겠단다.
제 입으로 약속했으니 응당 전사라면 지켜야 할 것이다.
휴거가 거대한 전투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인간 뒤편에 선 기사들의 살기가 피부를 저릿하게 찔러 왔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도련님! 어찌 독단으로 그런 결정을! 이 원정대의 지휘관은 저입니다!”
그 와중에 폴크는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리하르트를 나무랐다. 분노한 그의 음성은 매서웠다.
“이야기만 나눠 보는 게 뭐 어렵다고.”
정작 리하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방해 말고 지켜나 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아우성치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휴거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끼어들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약속이나 지키시구려, 취익.”
짧은 대화를 끝으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휴거의 굵은 다리가 터질 듯 팽창했다.
곧 그가 땅을 박차고 덤벼들었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앞세워 달려드는 붉은 오크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풍겼다.
쾅!
그의 도끼가 리하르트가 서 있던 자리를 거칠게 파헤쳤다. 과연 덩치에 걸맞은 괴력이었다.
하지만 큰 공격이 실패했을 땐 빈틈이 생기는 법.
리하르트의 드래곤 투스가 휘둘러졌다.
“취익!”
휴거가 땅에 박힌 도끼의 자루를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피했다.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가 발을 내뻗었다.
뻐억-!
다급히 검을 회수한 리하르트가 검면으로 막아 냈지만,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뭔 놈의 오크가!”
저렇게 날렵하냐- 라는 말을 삼켜 낸 리하르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도끼를 뽑아 낸 휴거가 곧바로 공격을 재개했다. 넙적한 도끼날이 리하르트를 스쳐 갈 때마다 끔찍한 파공음이 귓가를 때렸다.
웬만한 오크 족장의 힘을 뛰어넘는 흉흉한 괴력.
그리고 그 덩치에 걸맞지 않은 민첩성과 유연성.
“최소 상급 기사 이상……!”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잭이 억눌린 신음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도련님은 도련님.
저 오크의 도끼에 반 토막 나 버리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크워어어!”
돌연 휴거가 괴성을 질렀다.
그것을 들은 성벽의 기사들이 한껏 인상을 썼다.
오크들 사이에선 ‘워 크라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상대를 압박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표정은 평온했다. 얼음 왕관은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빈틈을 포착한 리하르트가 휴거의 품을 파고들었다.
카드득!
전력으로 찔러 넣은 드래곤 투스는 도끼의 넙적한 날에 가로막혔다.
사방으로 튀기는 불똥 사이로 휴거와 리하르트가 서로를 노려봤다.
“크하하하하!”
잠시간의 대치. 난데없이 휴거가 웃음을 토해 냈다.
다시금 지르는 워 크라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우렁찬 성량이었다.
“이거, 이제 보니 전투를 즐기는 참된 전사였구려, 취익!”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닌 척 마시게. 이 대련이 즐겁지 않소!”
리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휴거와의 싸움은 조금 전 기사들과 했던 대련의 연장선이었다.
목적은 조금 바뀌었지만 결국은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해 내는 것.
‘……사실 조금 재밌긴 하지만.’
어느 새부턴가 전투가 좋아졌다.
피땀 흘려 수련한 검으로 마물을 쓰러트릴 땐 성취감을 느꼈고, 기사와의 대련에서 승리하면 심장이 뛰었다.
이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이를 애써 억눌렀다.
평범한 일반인 ‘이지훈’과 게임 속 주민인 ‘리하르트’사이의 괴리감.
전투를 반기고, 승리에 열광하는 것은 ‘이지훈’에겐 아주 낯선 것이었으니.
“췩, 뭐 아무래도 좋지.”
휴거는 짧게 도끼를 휘둘러 리하르트를 떨쳐 냈다.
이미 휴거의 몸은 한껏 달아올랐다.
원만한 협상을 위해 접어놓았던 전투 본능이 치솟았다.
쿠우우-
금빛 기류가 솟아올라 그의 육신과 도끼를 휘감았다. 오크 특유의 금색 오러였다.
“안 돼!”
그것을 본 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쇳소리를 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들이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들고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였다.
쿠구궁!
어디선가 작은 발구름 소리와 함께 땅에서 거대한 나무가 솟아올라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무슨……!”
“그리 난리 피울 것 없습니다.”
당황한 기사들을 진정시키려 나선 것은 아론이었다.
그는 우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보십시오.”
폴크를 비롯한 기사들이 다급히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오러……?”
묵빛의 검날에 엮인 새하얀 빛무리. 그 검을 치켜든 리하르트의 모습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리, 리하르트 도련님이 어떻게?”
그는 마나 불감증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저 하얀빛은…….”
“도련님은 마나 특성 보유자입니다.”
아론의 말에 기사들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론!”
아론은 저를 향해 물어 오는 폴크에게 씩 웃었다.
제3기사단.
그의 조부가 전(前) 기사단장으로 있었으며, 아론이 리하르트의 직속 기사가 되기 전까지 속해 있던 바텐베르크의 세 번째 검.
때문에 아론은 이들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머잖아 경들도 도련님께 흠뻑 빠질 겁니다.”
“뭣이?”
뜬구름 잡는 소리에 폴크의 미간이 찌푸려졌을 때였다.
“우, 움직인다!”
한 기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리하르트와 휴거로 향했다.
콰앙-!
금빛 오러를 휘감은 도끼와 새하얗게 물든 검이 맞부딪쳤다.
검과 도끼를 중심으로 땅이 울리고 굉음이 일었다.
“취익! 돌연변이였구려!”
휴거가 말하는 돌연변이는 마나 특성 보유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휴거의 도끼와 리하르트의 드래곤 투스가 허공에서 서로를 밀어 냈다.
본래라면 결코 성사되지 않았을 오크와 인간의 힘겨루기.
마나 특성 앞에선 종의 차이에서 오는 힘의 격차가 무색했다.
“아직은 미숙한 오러건만, 굉장한 힘이구려. 취익!”
결국 물러선 것은 휴거였다.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완숙한 자신의 오러와 비교하면 저 인간의 오러는 어설펐다.
하지만 그것이 품은 위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쾅! 콰앙!
곧바로 달려든 리하르트가 공격을 이어 나갔다.
허공에서 연신 굉음이 터졌다. 그 충격파로 땅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허어!”
기사 하나가 탄식을 내뱉었다.
잭과 폴크는 침만 꿀꺽꿀꺽 삼켜 댔다.
확실히, 그들이 알던 철부지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변해도 너무 변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사들의 눈에 기묘한 빛이 어렸다.
“취익! 그대와 싸우는 건 참으로 즐겁소! 이런 전투가 대체 얼마만인지!”
물경 이백에 달하는 인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휴거가 잔뜩 달아올라 외쳤다.
언제 인간들이 들이닥쳐 자신을 포위할지 모른다는 불안 따윈 없어 보였다.
자신의 상대가 그럴 자가 아니란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크는 머리가 아닌 심장에 이끌리는 종족.
그 덕에 날카롭게 벼려진 본능과 감각은 다른 이의 진심을 읽어 내는 데 탁월했다.
눈앞의 전사는 전투를 즐기는 강인한 수컷이었다.
콰앙!
애써 그것을 숨긴다 해도, 검을 휘두르는 리하르트의 몸은 정직했다.
얼음 왕관의 냉정 효과로 딱딱히 굳은 얼굴 속에 희열이 일렁였다.
“후욱…… 후욱……!”
리하르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휴거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기사로 치면 상급을 넘어, 최상급을 바라볼 정도의 경지였다.
“취익, 아무래도 승패는 정해진 것 같소만.”
휴거의 말대로였다. 리하르트의 검을 휘감은 오러는 형태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휴거의 오러는 굳건했다.
오러를 다루는 숙련도의 차이가 승부를 가른 것이다.
“아쉽소. 오러를 좀 더 능숙히 다뤘다면 더욱 즐거운 싸움이었을 텐데.”
리하르트는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초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등 뒤를 찔러 오는 기사들의 시선이 절절히 느껴졌다. 예의 냉랭하고 싸늘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대련을 자신의 패배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오러를 다루게 되었고, 트롤 서른 마리와 그 우두머리를 처치했으며, 기사 대여섯과의 대련에서 승리했다.
참으로 알량한 몇 번의 성공.
그 이력에 눈앞의 오크도 추가하고 싶었다.
패배를 직면하노라니, 이제껏 모른 척해 왔던 승부욕이 들끓었다.
다시금 머리가 차게 식었다.
“후우…….”
말하는 법조차 잊은 듯, 숨만 내쉬던 리하르트가 눈을 떴다.
텅 비어 버린 마나 루트에 신성력 대신, 신앙이 질주했다.
쿠구국-!
드래곤 투스에 다시 오러가 맺혔다. 압도적인 기운을 줄기차게 내뿜는 신앙의 오러였다.
리하르트로서도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기예(技藝).
“취, 익!”
눈을 부릅뜬 휴거가 반사적으로 도끼를 쳐들었다.
그의 두뇌론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재간이 없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경각심이 종을 울려 댔다.
이윽고, 리하르트가 검을 내리그었다.
콰가가각-!
강렬한 굉음과 함께 빛이 폭사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주둔지가 한순간 밝게 물들었다.
“…….”
휴거는 말없이 도끼를 내렸다.
죽음이 그를 피해 갔다.
그가 디딘 땅 바로 옆에 크게 할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직격했다면 도끼와 함께 몸이 갈려 나갔으리라.
“맙소사…….”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손을 떨었다. 한순간이나마 어둠을 몰아내었던 빛이 뇌리에 선명히 남았다.
어째선지 모를, 적어도 리하르트에겐 평생 느낄 리가 없을 거라 여긴 경외심이 고개를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