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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30화 (30/216)

30화. Episode. 11 아델가르텐 (2)

“아! 미치겠네, 진짜!”

보르헴 왕국의 일개 병사, 왈슨은 마경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 마경의 한 구석이 새하얀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빛이 가라앉을 때부터 본격적인 이변이 벌어졌다.

쿠궁, 쿠구궁…….

대체 무슨 소란인 건지.

한동안 잠잠하던 마경에서 끊임없는 진동이 일었다.

‘그 망나니, 바텐베르크의 망나니가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

며칠 전 갑작스레 나타나, 막무가내로 마경에 몸을 들이민 망나니.

그의 소행이 아니라고 하기엔 시기가 너무도 딱 맞아떨어지는 이변이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랐건만!'

왈슨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외부인이 마경에 발을 디딘 것이 발각되면 일개 병사인 그는 처벌을 피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보고를 올릴 수도 없다고!’

리하르트가 마경에 들어가기 전 내뱉었던 살벌한 경고.

수틀리면 사지를 분쇄해 버릴 듯한 그 서슬에 보고도 올리지 못한 채 며칠간 전전긍긍했다.

부디 아무도 모르게 온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떠나 주기를 바랐지만……

“소집 명령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왈슨의 바람은 대차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기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야.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          ◈          ◈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품에 단단히 끌어안은 성배가 혹처럼 거추장스러웠다.

“도련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그냥 뛰어!”

옆에서 나란히 뛰는 아론의 목소리 또한 지쳐 있었다.

며칠간 내리 진행된 마경 탐험은 쉴 틈을 주지 않았으니, 그간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만도 했다.

아무튼 이건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키에에엑!

-이기기긱!

음, 곧바로 후회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세계수의 알림 테러 이후.

마물 몇 마리가 은신처에 기웃거린다 싶더니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십, 수백의 마물에게 쫓기고 있었다.

나는 품 안의 성배를 내려다보았다.

마석 사이사이로 새겨진 홈을 따라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성배라는 성유물이 지닌 힘 중에 하나, 주변 마물들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그것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개 숙이십시오!”

푹!

달려드는 원숭이 마물의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이기가 무섭게, 아론의 창이 그 위를 가로질렀다.

“제가 놈들의 이목을 끌겠습니다!”

“제발 그냥 뛰어!”

자살을 자처하는 아론에게 소리쳤다.

희생정신이야 감격스럽지만, 애먼 체력을 낭비하게 둘 순 없었다.

그때였다.

『아델가르텐이 길을 인도합니다.』

싸아아-

종아리까지 올라오던 무성한 잡풀이 바닥에 누웠다.

거대한 나목들이 제 가지와 몸뚱이를 비틀었다.

하나같이 다 일정한 방향으로, 마치 숲 자체가 길을 터주는 것만 같았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세계수의 초대를 받을 것이란 건 예상했지만, 숲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와 아론은 쉴 새 없이 숲을 가로질렀다.

우리가 지나치고 나면, 식물들은 뒤틀었던 제 몸을 바로 했다.

덕분에 마물의 추격이 조금씩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얼마나 뛰었을까.

바쁘게 놀리던 발을 슬그머니 멈춰 섰다. 기감을 날카롭게 세워도 뒤쫓아 오는 마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성배에는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데.

“후우, 숲에 들어온 건가.”

마경을 말하는 것이 아닌 엘프의 숲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거주하는 숲은 초대받지 않은 자는 들여보내지 않으니.

제아무리 수많은 마물이 마경을 헤집어도 이곳은 안전하리라.

“여기가 엘프의 숲……!”

아론이 경계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마물에게 쫓길 때보다 한층 더 날을 세운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겠지.

인간과 엘프의 사이는 썩 좋지 못하니까.

“그런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엘프의 숲이라기엔 영 초라한데.”

사시사철 따사롭게 내리쬔다는 햇볕도, 생명력을 머금어 만개한 꽃밭도. 나와 아론 앞에 펼쳐진 숲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고개 숙인 풀잎만 있을 뿐. 이건 오히려 마경보다 못하지 않은가.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풀숲 너머의 인영을 응시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과 쭉쭉 뻗은 팔다리. 결정적으로 뾰족한 귀까지. 완벽한 엘프였다.

다시 봐도 틀림없는 엘프다.

그런데…….

“그냥 말라비틀어진 도라지 같습니다.”

홀쭉하게 패인 볼, 퀭한 눈두덩이를 비롯해 온몸이 삐쩍 마른 것이, 도저히 아론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어디 몇 년간 쫄쫄 굶은 게 아니고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따라오십시오.”

엘프의 입에서 날 선 음성이 들려왔다. 인간과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그녀.

그토록 고생해서 마침내 조우한 엘프가 저런 도라지라니.

부디 저 엘프만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          ◈          ◈

엘프의 뒤를 따라 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그들의 거주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바람은 대차게 무너져 버렸다.

‘젠장, 여긴 그냥 빈민촌 아니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엘프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도라지가 하나, 둘, 셋…….

본래는 찬란한 미모를 발했을 그들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건 말랐다기보다는 ‘시들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

이들이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란 것을 누가 믿을까.

경계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세계수까지 저 모양일 줄이야.”

확실히 크기는 무척 크다. 다만 말라비틀어진 것은 세계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이여, 숲의 정원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엘프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삼백 살은 된 엘프였다.

“북쪽 엘프들을 이끄는 타사르라고 하네.”

그나마 그는 초라한 행색과는 다르게 형형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다.”

일순, 주변이 침묵으로 뒤덮였다.

대전쟁 시절, 바텐베르크는 엘프들에게 가장 증오스러운 이름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악랄하고 추잡한 바텐베르크의 핏줄!”

“어머니께선 어찌하여 저런 극악무도한 이를……!”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눈빛에 사나운 기색이 스며들었다.

“도련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솟구치는 살기에 아론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며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게임 속 정기 넘치고 고고했던 엘프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바텐베르크의 이름에 발작하듯 경기를 일으키는 그 모습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머릿수도 고작 수십.’

이곳이 무인들의 땅인 북부라 해도, 세계수의 가호 아래 모여든 엘프들이라 하기엔 너무나 적은 수다.

마법가의 그놈이 동맹을 맺었던 남부 엘프들이 몇 명이었던가.

가물가물하지만 적어도 일천에 달하는 수였던 건 분명하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살기에 반응한 얼음 왕관이 스스로 효과를 발동한 것이다.

숨 막히는 대치 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프는 손님 대접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되도록이면 원만한 거래를 취하려 했으나 이야기가 달라졌다.

저들에게 있는 거라곤, 죄 말라비틀어진 것뿐이니.

굳이 내가 저자세를 자처할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다.

“우리를 이끈 것은 세계수, 아델가르텐이다. 불만 있으면 그쪽에 가서 따져.”

그 말과 함께 품에 안고 있던 성배를 슬쩍 내보였다.

“……!”

모조품이니, 최하급이니 하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곤 해도 성배는 성배.

그 안에 담긴 성스러운 기운에 모든 엘프들의 이목이 쏠렸다.

“너희들 이게 필요하지 않아?”

성배를 흔들어 보였다. 어느새 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들의 시선에 담긴 것은 절실함과 간절함.

성배가 무엇인지 모를 텐데도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우리가 큰 실수를 범했군. 상황이 상황이라, 다들 예민해졌을 뿐일세. 부디 노여워하지 말게나.”

타사르가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신다네. 따라오겠는가?”

“가지.”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있는 줄 알았던 세계수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세계수의 열매와 생명의 샘물.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는 열매는커녕, 앙상하기 짝이 없는 가지만 내보이고 있었다. 보나 마나 생명의 샘 또한 다를 바 없는 상태겠지.

“미치겠군. 대체 왜 이 꼴이 된 거지?”

그간의 고생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답답함에 역정을 내 보았지만, 타사르는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곧 세계수의 앞에 도착했다. 타사르와 나머지 엘프들은 아론을 뒤로 물리곤,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사르르-

바람이 불었다.

세계수의 앙상한 가지가 가늘게 떨어 댔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가만히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세계수의 감정이 내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보며 기뻐합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싸아아-

'뭘 하려는 거지?'

앙상한 가지들이 내 쪽을 향해 몸을 뒤틀었다. 마치 나를 감싸 안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이 감정,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가지 하나가 기어코 내 몸에 닿았을 때였다.

- 아…….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설마 지금 말을 걸어온 건가. 나는 다시 귀를 기울여보았다.

- 아, 아…….

잔뜩 갈라진,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

- 아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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